힘들다고 외칠 수밖에 없던 하반기였다. 다른 말은커녕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지치는 때가 있지 않나. 모든 일과 사람이 갑자기 나를 어렵게 할 때. 고통을 마주한 후 해탈과 극복은 아주 뒤의 감정이다. 그것도 무척 많은 생각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감정. 응급실에 실려온 위중한 환자처럼 맥박을 잃은 내 영혼은 실시간으로 다시 죽었다 깨어나곤 하였다.
힘든 이유들보다 고통 그 자체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삶이 녹록지 않고 괴로움이란 흔하다지만, 이번에는 과거에 경험한 가장 아픈 상처들이 비슷하게 건드려지는 문제들이었다. 아는가? 고통도 아는 맛이 더 아프다. 이유 없이 맞는 뺨도,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간신히 살린 믿음을 정확하게 건드려 부순 트라우마의 지점들도. 그러나 그냥 이유 없이 넘어지라고 밀면 내가 어쩌겠는가.
살면서 처음 공황이란 경험도 하였다. 우와, 처음 겪어봐요. 웃으며 수긍하는 나에게 의사는 초기 증상이긴 한데 늘 실제보다 괜찮게 말하는 환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약을 추가해 주었다. 공황이란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그다음에 깨달았다. 트라우마에 익숙한 나는 견딜 만하다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임상적인 증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으로 누르지 않을 때는 과거의 고인 슬픔이 진액처럼 올라와 명치를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잘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아픈 기억이 날 때마다 심장이 폐를 부수듯 뛰어 과호흡처럼 숨이 막히는 경험이라니. PTSD와는 다른 생경한 느낌이었다. 뭐, 신기하기도 하다. 진료받던 병원에서 공황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그런 건 연예인들이나 곧잘 걸리는 줄 알았던 나를 반성하였다. 얌전히 처방약을 먹으며 만성이 되기 전에 치료하는 중이지만, 아마 원인이 된 문제가 재발하지 않아야 나을 것이라고 의사는 말한다. 사실 문제가 된 환경이 그대로일 경우 약이 진통제 역할을 할 뿐이다. 의사는 괴로운 요인이 바뀌지 않는 한 치유가 어렵기는 하다고 하였다.
나는, 삶이 나에게 교훈을 주었다고 여긴다. 몇 년 간 비슷하게 살던 나에게, 이제 다른 길을 가라고 떠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변하지 않고 통찰하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과거의 결핍에 매몰된다. 트라우마처럼 흉터가 남더라도 화상에 약을 바르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결과가 다르다. 나는 집중하였다. 괴로운 문제들 중 내가 통제하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우선 바꿀 수 없는 것. 다른 사람의 의지와 행동은 바꿀 수 없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특정 순간의 정치적인 결정과 타이밍도 바꿀 수 없다. 내가 화를 낸다고 달라질까? 아니다. 화를 내는 대신 그걸 깨끗하게 포기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과 나의 언행은 바꿀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연초다.
나는 분노와 비난을 붙들지 않기로 했다.
포용과 성장이라는 말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착하거나 무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마음 넓어 보이는 태도가 무엇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기대와 애정, 믿음을 오래 붙들기 어려운 트라우마. 깊은 슬픔 속에서, 한때는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여겼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포기한 채 가라앉는 쪽을 택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남기고, 내 마음을 내 방식으로 잃지 않기 위해서 어렵게 걸어가고 있다. 매일 애써 결심하듯이. 주저앉고 싶으면 한 번씩 앉았다가 다시 걸어가면서.
πάθει μάθος(파테이 마토스). 고통과 고뇌를 통해 지혜를 얻는다는 그리스 속담인데 어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통을 겪음으로써 깨닫다, 혹은 고통을 통해 배우다. 그것이 작년의 하반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알게 된 게 있다. 결핍이나 상처를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생각보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는 것. 그것이 죽을 만큼 힘들더라도 똑바로 봐야 걸어갈 수 있어. 그건 살기 위한 깨달음이었고, 나는 그걸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