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라 대부분의 업무가 기획 또는 제안입니다.
2개의 기획안 작성, 3개의 제안서 작성이 2월 중순까지 나에게 떨어진 미션이고, 부지런히 기획안과 제안서를 쓰고 PT를 하고 있습니다.
하얗고 광활(하게 보이는)한 빈 화면에 텍스트와 이미지 형태의 아이디어를 이리저리 널어놓기도 하고, 마크다운 형식으로 개요를 짜보기도 하죠. 기획을 좀 더 탄탄하게 만들어줄 자료들을 모아 붙여 넣기도 해요.
기획의 방향과 목적을 정하고,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지에 대한 전략을 구조화합니다. 그리고 수행할 내용들을 써 내려가지요.
하얗게 비어있던 장표들은 어느새 텍스트와 표, 도식화된 도형들로 채워져 갑니다. '꾸역꾸역'이라는 단어 말고는 그 과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생각 나지 않네요.
기획안은 무거운 엉덩이에서 시작해서 머리를 거친 후 손끝으로 연결되는 생각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그리고 글자와 도형으로 채워져 있는 장표들을 한 장씩 넘겨볼 때 느끼는 뿌듯한 감정은 중독성이 꽤 강합니다.
기획서나 제안서를 만드는 일과 글을 쓰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빈 화면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밀어내며 첫 글자를 적는 그 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커서가 지나가는 길 뒤로 자음과 모음이 엮이면서 글자들이 또닥또닥 새겨지는 모습은 재미있기까지 하네요.
때론 커서 한 칸을 앞으로 밀어내는 게 커다랗고 무거운 벽을 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아마 대부분의 경우가 그런 듯해요.
그렇지만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흰 종이 위에 가지런히 적혀있는 글자들을 읽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기분에 힘을 얻어 또다시 커서를 밀어내죠.
글쓰기를 고된 노동에 비유하면 앉아서 글을 쓰기가 쉬워진다. 글쓰기는 도랑을 파는 일처럼 땀나고 지저분하고 진을 빼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의 직업은 종이에 단어를 하나씩 제자리에 배치하는 일이다. 벽돌공이 벽돌을 하나씩 쌓아 나가듯 우리는 단어와 문법을 쌓아 나간다. 그러려고 우리는 훈련을 하고, 글쓰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규칙적으로 글을 쓴다. 낮에는 기술자나 변호사로 일하더라도, 글쓰기를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인다면 그는 진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쓰기 공부>, 브라이언 로빈슨 저, 박명숙 역
오늘도 이렇게 글을 씁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출근해서 또 빈 화면에 "우리 회사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한테 일을 주세요."라는 의지를 전략과 수행 방안이라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며 제안서를 쓰고 있겠죠? 글쓰기를 고된 노동에 비유하면 앉아서 글을 쓰기가 쉬워진다고 하는데 오늘 밤 잠들기 전 "너는 고된 노동을 하는 회사원이야."라고 스스로 한마디 해줘야겠습니다.
밤낮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각을 쏟아내는 노동자로 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