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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직딩 Oct 31. 2020

스펙트럼을 넓히는 육아

항상 ‘인생은 레벨 업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다'라고 믿는데, 옛날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레벨 업한 버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옛날의 나로부터 지금의 나까지를 모두 다 품은 내가 더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는 할 수 있겠다.
<말하기를 말하기>, 김하나


아이가 170여 일 되었을 즈음 복직을 했습니다. 아직 혼자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는 아이를 두고 출근을 하는 게 옳은 선택인가 싶었지만 일단 워킹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복직 후 사흘쯤 되었을 때입니다.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아이 컨디션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돌봐주시는 엄마도 오늘따라 아이가 유독 많이 보챘다고 하시더군요. 자기 전에 먹었던 분유도 왈칵 다 토해냈습니다. 그냥 오늘따라 컨디션이 좀 안 좋았겠거니 생각하며 아이를 재웠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밤에 자다가 좀처럼 잘 안 깨는 아이가 1시경 깨서 울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달래려 안아 올려 볼을 가져다 대니 아이의 체온이 심상치 않습니다. 체온을 재어봤더니 열이 38도 가까이 나더군요.

태어나서 아무 이유 없이 처음으로 열이 났던 터라 덜컥 겁부터 났습니다. 그리고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출퇴근을 하면서 지하철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겨준 게 아닐까? 에어컨 바람을 너무 많이 쐬어서 감기에 걸렸나? 세균 감염이 있었나? 아까 저녁에 구토를 심하게 했는데 체한 건가?

일단 응급실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고 예방접종을 하러 다니는 병원에 갔더니 요즘 시국이 시국 인터라 열 환자는 병원에 들어갈 수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어찌어찌 사정을 설명해서 병원 입구에서 의사 선생님 진찰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아이가 열이 날 때 응급실에 가도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타이레놀 처방해주고 내일 아침에 다시 병원에 오라고 합니다.

다행히 아이는 타이레놀을 먹고 미열 수준으로 열이 많이 내려 늦은 밤 다시 잠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다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소변검사를 했죠.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습니다. 아이 열도 많이 잡혀서 며칠간 경과를 지켜보다가 해프닝으로 넘기게 되었고요.

이 일을 겪고 저와 남편은 ‘육아 능력치가 한 단계 레벨업’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밤에 열이 나는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간 일, 처음으로 약이란 걸 먹여본 일, 소변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에서 3시간 이상을 머물며 그 흔한 아이 소변을 기다렸던 일. 2인 1조가 되어 팀워크를 발휘하여 잘 해결했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육아력이 한 단계 레벨업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레벨업이 되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아이가 자라는 속도만큼 레벨업 되기는커녕 아기 개월 수의 반 만큼이라도 레벨업 되면 좋겠습니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위의 문장을 쓴 이하나 작가의 생각처럼 레벨을 높이는 것보다는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일인 듯합니다.

아이를 낳은 이후로 그동안 내 시선의 영역 밖에 있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유모차, 아기 엄마들의 모습, 노 키즈존, 황혼육아, 그리고 버려진 아이들. 예전에는 예사롭게 보이던 것들에 자꾸 눈길이 가고 시선이 고정됩니다.

아이 엄마로 내가 이전보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적어도 내 아이만 예쁘다 최고다 하기보다는 우리 가족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더욱 겸손해지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지고 싶습니다. 레벨 업 보다는 스펙트럼을 넓히는 육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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