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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17. 2024

부당한 책 읽기

⁠책을 다 읽지는 않았고, 초반 1/3정도 읽다가 나머지 부분은 대충 훑다가 생각나는 것들 적어본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서 적는다는 것은 상당히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책에 대해서보다는 나의 생각이 위주가 된다고 우선 말해두고 싶다. 책 자체는 좋은 책이고 다 읽은 누군가에게는 내가 느끼지 못한 감동을 줄 거라고 믿는다.

이 책은 제 7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라고 표지에 적혀있다. 브런치의 글들을 종종, 대충 읽는 편인데, 독일어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구독해둔 작가가 새로 글을 올렸길래 호기심에 읽어보았다.


'stolpern(걸려넘어지다)'이라는 독일어 단어 설명으로 시작해서, stolperstein은 네모난 돌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최근 독일 등지에서 희생된 유대인을 기리며 네모난 돌을 그들이 살았던 집앞 보도 바닥에 박아놓는 추모이벤트가 진행중이라는 것과 이어지면서 글은 확장되었다. 글이 보통 생각하는 브런치의 글 한편 분량을 넘어서길래, 이 분은 필력이 좀 된다고 추측을 할 수 있었고, 작가의 이력을 보니 출판한 책이 있었다. 제목을 보니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라고 내 흥미를 끌기에 바로 주문을 했던 것이다.


책을 기다리며, 그리고 받고나서도 펼치기 전까지 제목의 '철학'이라는 단어가 내게 많은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여태 엄마됨을 써낸 작가들의 책을 몇몇 읽어보았다. 최근에 올린 글의 '질문이 될 시간'의 임희정 작가도 그랬고, '벼락엄마' 김아영 작가도 그랬다. 그 두권의 책까지는 많은 공감을 하며 읽기는 했는데, 아이의 출생부터 너댓살 어린아이를 키우면서까지의 여정을 담은 책이라서 세세히보면 각기 다른 개인의 경험이지만, 넓게 보면 사실 비슷한 책이었기에,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을 바랐다. 그래서 표지의 '철학'에서 좀 기대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기대반 걱정반이었는데, 철학이라면 내겐 물론 낯선 영역이고, 이름만 아는 철학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는 것도 없고, 사실 알고싶은 생각도 크게 들지 않는다. 예전에 살았던, 어찌보면 배부른 남자들이 한 이야기는 나와는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을 잘 모르는 나의 크나큰 오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변명거리가 많다. 독일이나 프랑스, 혹은 영어권 나라에서와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철학서라고 하면 대부분 번역문을 읽어야하고, 학교에서는 완성된 이론으로 수준낮은 너희는 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그저 외우라는 식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수도, 삶과 가깝게 체득할 수 있도록 토론이라도 하면서 철학적 명제들을 이리저리 파헤쳐볼 기회도 없었던 내게 철학이란 그저 책속에 있는 나와 먼, 어려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것을 저자도 아는듯, 서문에서 최대한 철학을 쉽게 느낄 수 있도록 적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했다. 책은 작가가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기르는 과정에서 느꼈던 것을 철학적인 사유와 연관시켜서 이어가고 있었다. 작가가 적은 임신, 출산, 양육의 과정은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책과 큭게 다를 것은 없었다. 종종 철학자들의 이름과 말이 언급된다고 해서 그것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철학적인 이론의 언급이 맥락을 좀 끊는 느낌이라 갈수록 뛰어넘고 읽게 되긴 하였다. 언급한 철학자들이 많은 부분 남성이라서 더 그랬다. 남자가 아이를 못낳는다고, 모유수유를 못한다고, '남자가 뭘 알겠는가'라고 치부하기는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 경험해보지 않은 그들의 말은 그저 얼추 덮어씌운 것일 뿐, 내가 경험한 그것에 대한 이야기일 수가 없다. 철학자 없는 철학이야기였더라면 어땠을까.


여기서부터 책에서는 좀 멀어진게 아닌가 한다. 사실 '철학'을 뺀, 철학을 했던 저자의 엄마가 된 개인적인 소감을 책으로 썼더라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되면서 아주 낮은 차원의, 동물과 다를바 없는 사람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책을 통해서는 '나는 훨씬 고차원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내가 한때는 말이야..'하면서 '내가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고'하는 억울한 토로를 하고 싶은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 것이 아니꼽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처럼 대기업에 다녀본 적도 없고, 아름답게 꾸미고 다녀본 적도 없어서 '한때'라고 할 게 없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일 것이다.


철학하는 사람이 철학을 통해 육아를 바라보는 것이 뭐가 문제랴. 하지만 그런 것을 덮어씌워야만 글이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틀에서보면 앞의 두권과 함께 이 책까지 세권의 책은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임신부터, 너댓살 아이의 양육까지의 개인적인 경험. 딱 내가 경험한 것까지의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정말 내가 속속들이 경험한 이야기라 너무도 잘 알고 공감이 되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제는 좀 다른 걸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게 뭔데?"라고 물으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최근 어딘가에서 읽은 말인데, "네가 정말 읽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네가 써야한다"나. 이렇게 투덜거릴게 아니라, 읽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내가 직접 써봐야할런지 모를일이다.


여태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더 분명해지는 것이 나의 책읽기의 목적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려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잘 이야기해줄 책을 찾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 무렵 내가 예술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예술가를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같은 사물을 예술가는 각각의 다른 시각으로 묘사를 한다. 예술작품은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투영이며 그것을 통해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을 언뜻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한 작가의 예술작품을 모아보면 그것은 그 작가가 구축해놓은 커다란 하나의 세로운 세상인 것이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대했던 것 같다. 내 마음에 드는 세상을 골라담듯이 책을 읽는 것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는 작가의 말을 적어두고 나의 말과 함께  붙여넣는 것이다.


그래서 책속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내 생각과 다르면,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책읽기는 더 진행이 안된다. 이것은 아주 부당하고 나쁜 책읽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변명처럼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두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대한 나의 마음을 좀 더 누그러뜨려야 하는 것인지, 더 날카롭게 내가 마음에 드는 세계를 그린 책을 골라내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좀 더 책이 빠져들고 싶다는 것만 말해둔다.


이 작가의 책에서 흥미가 생겼던 부분은, 작가가 크게 중요하지 않게 언급한 것 같아보이는 독일에서의 생활이다. 아마 독일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은 마음도 책을 구매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책에서는 뭔가 특별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독일에서의 생활이야기가 조금 나왔을 뿐지만, 그것만으로도 반갑고 좋았던 것 같다.


가끔 아이들과 독일에서 사는 것을 꿈꾼다. 경제활동은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고, 남편은 독일어를 배울 생각은 없어보이기에 독일로의 이민은 가능하지 않아보이지만 말이다. 현실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외동딸인 나에게만 (심적으로라도) 의지하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놔두고 거의 하루걸려 도달할 거리에 가서 사는 것은 죄를 짓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안되는 이유를 찾자면 많다. 10년 전에도 길거리에서 대뜸 말을 거는 아프리카계열 사람들, 터키인들 때문에 불편했는데, 현재는 더욱 난민들이 넘쳐날 것 같은 독일은 한국처럼 치안이 좋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난 독일에 대해 생각하면 미련이 남는다. 몇 안되는, 내가 만난 독일 사람들은 내 안에서 한국인이라면 지나칠 무언가를 보아주는 사람들이었다. 독일문화원에서 만난 김그레베 선생님이 그랬다. 피부처럼 편안한 한국인들이지만, 나를 깊은 잠에서 깨게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쉽게 잠재워지지 않는다. 자극을 받고 싶다. 내안에서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게 하는 자극. 그런 것을 생각하면 단 7개월 머물렀던 독일, 베를린이지만 내게 '향수'가 불러일으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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