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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27. 2024

라이히라니츠키의 어떤 우정.

우정에 대하여, 그리고 친구 없음에 대하여

'나의 인생' 4부의 어느 글에서는 작가의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막 서독으로 이민을 갔을 무렵부터 참여했던 'Gruppe 47'이라는 문학모임에서 만난 발터 옌스이다. 발터 옌스는 어릴적부터 천식을 앓았고, 그것은 그의 전반적인 삶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너는 장애가 있으니까 정신적으로 '큰 사람'이 되어야해."


어머니가 요구한 바대로 그는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고민하고 추구하는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했던 옌스와 라이히라이츠키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학모임에서 둘 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생각했기때문이다. 문학 모임에 나온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2차세계대전에서 복무했던 전직 군인이었던 반면, 옌스는 당시 건강때문에 군복무를 하지 않고 대학에서 공부를 했으며, 라이히라니츠키는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전쟁에서 군인이었던 쪽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둘은 동질감을 느끼며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둘의 동질감에 대해 라이히라니츠키는 그 모임의 리더였던 리히터의 말의 빌려 설명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리히터의 말은 내게 들어맞는 만큼 옌스에게도 들어맞는다  - "그는 한명의 아웃사이더이다, 여기에 속하기도 하지만 또한 완전히 속하는 것도 아닌 아웃사이더 말이다."


둘의 우정은 좀 독특했다고 그는 말한다. 만남은 일년에 한두번일 정도로 적었으나, 그둘은 거의 매일 전화로 긴시간 통화를 했다고 하니 말이다.


폰섹스가 개발되기 한참 전에 우리는 '전화우정'을 실제에 적용했다.


더욱더 특이한 것은 둘이 문학과 그들이 집중했던 작업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라이히라니츠키가 옌스에게 날씨 이야기를 하자 옌스는 '우리 할머니와도 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너와 통화를 하는게 아니다'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둘의 대화는 다양한 인간관계나 활동없이 거의 책과 글쓰기에 파묻혀 살았던 라이히라니츠키에게 작업적인 면 뿐아니라, 고립되다 시피한 그를 정신적으로 지탱해줄 만큼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서로 통화하는 도중에 라이히라니츠키와 마찬가지로 옌스도 본인의 작업에 대한 영감을 많이 얻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책에 대한 영감이 말 뿐일 뿐, 실제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해서 사실만 언급할 뿐 어떤 비판적인 코멘트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옌스에 대해 다른 부분을 높이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옌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글의 곳곳에 나온다. 아마도 작가는 그를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와 30년이라는 오랜시간 우정을 나누었기에 자연히 파악된 것이기도 할테다. 책에 인용된 옌스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을 옮겨본다.


"나는 상처받은 경험을 한 사람이다. 나는 삶의 다채로움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넓은 의미에서 현실감각이 부족하다."


옌스는 그가 어떤 작업을 하든 자신에게 이렇게 삶의 다채로움에 대한 것이 결여되어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예술가적이 아니라 지성인에 가까운 사람이고, 그가 감각적이 아니라 논증적인 접근을 편안하게 여긴다는 면도 그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다음에 언급되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옌스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가 '호기심'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주요 성향중의 하나로 그는 '호기심'을 든다. 그가 현실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면서도 그가 강한, 그리고 숨길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은 언뜻보면 모순같아 보인다. 사실 그 둘은 서로의 원인이 되고, 그 점이 그의 사람됨의 주요한 특질이다.


이해가 잘 안되어 여러번 읽었다. 현실감각이 부족한 그가(감각적이지 않은 그가) 호기심이 강하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현실감각이 부족하기에 그런점은 호기심을 강하게 만든다고 이해를 하였다. 호기심이 강한 것은 현실감각을 부족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번 편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라이히라니츠키가 옌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오랜시간동안 매일 전화통화를 하면서 했던 그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교류의 시간을 그는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랬기에 그에게 이 책에서 그와 관련해 언급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드물게 '우정'이라는 단어로 둘의 사이를 정의했으니 말이다. 그외에도 옌스가 자신의 건강상태에 영향을 받으며 자라서인지, 자신의 관심 늘, 알콜중독자나 약물중독자, 우울한 사람, 동성애자, 장애인 같이 뭔가 소외되고 부족해보이는 인간에 두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는 옌스를 하나의 고귀한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글의 중간중간, 그리고 글의 말미를 보면 옌스와 그의 30년간의 오랜 우정은 어느 시점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해받고 위태로워졌다gestört und gefährdet'는 어휘를 쓴 것을 보면 그냥 소원해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점 때문에 그와 갈라섰는지에 대해서는 글에는 나와있지 않다.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었을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글 중간중간 비판을 자제한 옌스에 대한 그의 중립적으로 보이는 설명을 보면, 그가 감각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식인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관심이 사람에 쏠려 있지만, 작업에 대한 영감을 그때그때 작품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마도 옌스와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면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라이히라니츠키가 나치에 우호적이었던 음악가 바그너에 대해, 여전히 그의 아름다운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좋아한다고 언급한 부분을 보면 예술가에 대한 그의 시각이 참고가 될 것 같다. 글의 중간에 누군가 옌스에 대해 "그는 바흐의 푸가와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도 구분을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독일문학 만큼이나 독일음악에 심취했던 라이히라니츠키가 옌스의 이런 면에 대해 아쉬움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점차 그가 상당히 의뭉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책의 초반에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행간에 들어있다"라고 한 것처럼, 그의 글에서는 숨기고 이야기하지 않는 듯한 부분이 종종 느껴진다. 그의 아내와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후의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나, 이번 글에서처럼 그와 소중했지만 끝나버린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때에서 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언급하는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있고, 그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부분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할 것 같다.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그런 부분을 추측해가면서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지금껏 책의 4/5를 읽어오면서 그가 인간적으로나 혹은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많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였던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 가까웠을지라도 그의 글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와 거의 20세 무렵에 만나서 홀로코스트를 같이 견디고 결혼을 하고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 토시아에 대해서도 550페이지의 두꺼운 이 책에서는 적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문학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의 삶은 내게 개인적인 면에서도 위안을 준다. 이번편은 제목에서도 그렇지만 그와 옌스의 오랜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정'이라는 단어를 보며, 내게는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내가 감동받은 책이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친구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같이 어울렸던 친구는 더럿 되 그들은 연락없이 지내다가 10년만에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냈을 때도, 크리스마스 이브임에도 불구하고 열일 제쳐놓고 내게로 와주었을만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거의 매일 만나며 시간을 보냈을 당시에도 나는 누구도 마음 깊숙히 가까이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한때 이런 점이 내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게 '문제'라고 하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종종 연락하며 허물없이 일상을 이야기할 친구가 전무하다는 것이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라이히라니츠키의 책을 읽다보면 '그럴수도 있겠구나'싶다. 이것은 어떤 이유로 형성된 나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니까 말이다.


한 10년전쯤 거의 도피하다시피 제주도에서 갔을 때 읽은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라는 책이 있다. 내가 혼자라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책에서 평생 인간적인 교류 없이 혼자 지내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접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굳이 자신의 작업이나 문학, 예술같이 고차원적인 것에 시간과 마음을 쏟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 자체에, 현재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단순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읽은 지 오래되어 어떤 의미의 행복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처럼 인간관계에서 좀 부족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한편으론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라이히라니츠키가 옌스를 만난 것은 거의 40살 무렵이니 지금의 나의 나이와 비슷하다. 그때부터 30년의 우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런것을 보면 내게 인간관계란 아직 많은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는 은 아닐까. 인생에 한번쯤은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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