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웠던 꽃샘추위가 지나 날씨가 풀리고 이 계절에 이르면 수선화, 벚꽃, 유채꽃, 튤립 등 온갖 봄꽃들이 겨우내 모아두었던 땅의 정기를 폭죽처럼 터트리고, 햇볕은 더욱 따뜻하고 찬란해진다. 이렇게 축복받은 지금 충남 성환에 자리한 이화마을에서 여지없이 일제히 동시에 꽃잎을 피워올리는 배꽃 동산을 바라보며 기쁘게 서 있다. 산도 바다도 강도 없어서 자랑할 곳 마땅찮은 이 도시는 평소에도 삭막하기 그지없으나 겨울에는 그 지루함과 단조로움이 절정에 이르는 동네이다. 오직 4월, 드넓은 배밭 전체에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는 배꽃을 볼 무렵에야만 일 년 중 그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흰 배꽃 잎은 눈송이보다 눈부시고 봄 햇살보다도 화사하여, 새하얀 꽃송이가 어깨높이 나무들 위로 융단처럼 깔린 이 일주일의 기간에는 일절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며 발길 가는 대로 하염없이 머무르다 결국 시간을 헛되이 쓰고 만다. 온 지역 가득하게 흐드러지게 핀 하얀 배꽃은 겨울이라는 긴 죽음을 뚫고 솟아오른 생명의 환희를 마치 드라마처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달항아리처럼 흰 무명천처럼, 무늬도 없고 장식도 없는 하얗기만 한 배꽃의 피고 짐에 대해 누가 슬퍼하고 애도한 적이 있던가? 사랑스러운 분홍빛으로 하늘 천장을 뒤덮는 벚꽃과 짙은 향기 및 매혹적인 색깔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장미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봄꽃이다. 날리며 지는 벚꽃잎을 첫사랑에 빗대어 읊은 이는 수없이 많아도,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하여 한 시절 잠시 피고 지면 그뿐, 배꽃이 저물어간다고 해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Thomas Gray가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 Yard』에서 노래한 어느 무명의 소박한 젊은이의 죽음을 연상할 때 나는 이 배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Large was his bounty, and his soul sincere.
Heaven did a recompense as largely send
비천한 출신으로 대단한 부와 명예도 없었지만 높은 학식과 관대한 인품을 갖추었던 한 청년의 영혼이 진실했음을 칭송하는 이 대목에서, 이름없는 이 청년처럼 배꽃이 가진 소박하고 고매한 아름다움을 함께 발견한다. 하지만 Thomas Gray가 말한 그 이름 없는 젊은이의 삶과 죽음은 칭송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다간 청년과 같이, 예로부터 이화가 선비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유 또한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아도 분수를 알고 때에 따라 피고 지는 은은하게 갖춘 기품과 고귀한 품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4월 첫 주부터 며칠간 배꽃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르다 이제 다 저물었다. 이 화사한 절경이 스러지는 순간에도 배꽃의 피어남과 그 작별 또한 알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애통하다. 10년간 이 도시에 살면서 만개한 배꽃을 제대로 감상한 것은 오직 단 두 번이었다. 삶의 중요한 일들이 뭐가 그렇게 많았던 것인지 이 고장의 세상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짬을 내 알아보지 못한 채로 속절없이 그냥 봄날이 지나가 버렸다.
And Soonest our best men with thee do go
John Donne이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은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을 먼저 데려가는지도 모른다. 봄날의 찬란함과 꽃잎들의 절정도, 청춘의 환희도 모두 우리가 알아차리기 전 너무 일찍 빠르게 지나간다. 짧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배꽃의 피고 짐은 매년 봄마다 찾아오는 그저 수많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일 년 중의 어느 한 주일 뿐이지만 지금 이 순간 노을이 유난히 잘 보여 석양길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배밭 골목길의 어느 공간에서 저무는 해와 함께 사라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아쉽고 적적한 일이다. 머물지 않고 흘러버리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땅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하얀 꽃잎에 대한 아쉬움, 내가 놓치고 흘러 가버린 그 수많은 봄들에 대한 아쉬움이 자욱한 배꽃 향기보다 더 짙게 내 발밑에 깔리는 것 같아서다.
그러나 Alfred Tennyson은 슬퍼하기보다는『Crossing the Bar』에서 석양 무렵 바다를 향해 떠나는 배를 그림 그리듯 묘사하며 시간의 흐름의 자연스러움을 노래하고 죽음 그 순간에 오히려 평온함이 깃들기를 소망했다.
Twillight and evening bell, and after that the dark!
And may there be no sadness of the farewell, when I embark;
죽음을 초월하거나 극복할 대상이 아닌 신의 안식처로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바라본 Alfred Tennyson의 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계절의 흐름과 피고 지는 꽃들의 생의 주기를 자연의 섭리로 이해하게끔 한다. 잠든 이의 소박한 삶의 순간들과 훌륭한 면모들을 칭송한 Thomas Gray와 달리 Alfred Tennyson는 석양에 빗대어 떠나는 그 순간 자체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듯하다. 붉고 희미하게 물드는 석양처럼 작별의 순간이 주는 아련함과 평온함, 겸허하게 받아들임 그런 것들 말이다. 나도 아쉽지만 하얀 꽃잎을 떨구고 연초록 잎사귀를 드러내는 배나무의 어깨들을 바라보며 짧았기에 더욱 아름다웠던 그 환희를 슬픔 없이 보내주어야 하나 보다. 모래톱에서 사라져가는 배와 석양을 바라보듯 저무는 배꽃과 안녕하며 망연자실한 내 모습이 어느새 내리는 어스럼과 함께 어둠에 묻혀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John Donne이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으로 가는 통로이자 더 큰 행복을 위한 관문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One short sleep past, w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죽음과의 한순간의 짧은 마주침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더 영원하고 평온한 안식에 들 수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그에 굴복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John Donne이 그의 시에서 던지는 메시지이다. 오히려 그 순간에 이르면 ‘죽음’ ‘절망’ ‘끝’이라는 그 단어가 위력을 상실하고 소멸하게 된다. 그의 말처럼 저무는 봄날을 아쉬워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싱그러운 여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곧 풍요로운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겨울에 이르는 것은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될 봄과 생명의 순간을 위한 기다림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생의 주기는 끝없이 반복되며 영원에 이르기에 우리는 ‘죽음’과 ‘끝’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눈부신 배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 각각 삶의 아름다움과 떠나는 순간, 죽음의 의미에 대해 노래한 세 시인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 또한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봄날의 상념에 잠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원할 것 같았던 배밭의 화사한 눈송이들이 뜨거운 봄 햇살에 하릴없이 녹고 있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터질 것 같던 행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가버렸고 이제는 아쉬움과 애잔함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죽음이란 나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하고 소중한 현재의 순간을 일깨워주는 것, 그런 의미를 주는 것 같다. 너무 아름다워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화양연화를 자각하게 만들어주고 세상이 알아주는 위대한 명성이 아닐지언정 현재 내가 갖고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 말이다. Thomas Grey가 말한 바와 같이 너무나 평범하고 알려지지 않은 그리 대단치 않은 삶이었지만 하늘이 그를 귀히 여겨 많은 선물을 주었고 운명의 여신이 그를 선택한 것처럼, 너무나 소중하고 애틋한 우리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봄 햇살 아래 보석처럼 빛나는 것인지를 꽃잎이 모두 지고 나서 우리는 깨닫는다. Alfred Tennyson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순간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누릴 줄 안다면 헤어지는 일에도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저물어가는 그 순간조차도 아름답게 바라보며 그곳에서 또 다른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John Donne의 말처럼 그러한 영혼은 영원히 굴복당하지 않고 신의 안식처에서 영생을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4월의 봄날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배꽃이 피어나던 순간부터 그 향기를 맡고 걷던 순간, 햇살 아래서 반짝거리던 솜사탕 같은 흰 꽃송이들을 만끽하던 순간, 꽃잎이 바람에 날려 바닥에 흩뿌려지는 걸 바라보던 모든 순간이 황홀하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봄날이 영원하지 않은 것에 관한 아쉬움 또한 훌륭하고 다정한 옛 시인들의 위로 속에 묻어둘 수 있었고, 내가 가진 삶의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어느 때보다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고찰하며 외려 행복이란 것을 찾고 즐기고 누리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미룸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석양처럼 먼 거리에 있는 친구가 나에게 일러준 이야기였고, 이것은 며칠 후에는 보지 못할 이화마을의 오늘 풍경을 더욱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절박한 이유가 되었다. John Donne과 Thomas Grey, Alfred Tennyson 세 명의 시인들에게 우정을 전하면서, 무엇보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감사하고 진심으로 찬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