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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ffodil May 22. 2024

마차가 있는 섬

발리 한 달 살기

오전 10시, 꾸따의 숙소 앞으로 여행사 픽업 차량이 도착했다. 전날 예약했던 길리행 페리에 탑승하기 위해 항구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꾸따에서 항구까지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될 예정이었고, 그리 크지 않은 차량에는 나를 포함한 총 여섯 명의 여행객과 짐이 들어찼다. 두 명의 한국인 여성이 반대편 차창 옆좌석에 잠들어있었고, 후에 탑승한 나는 그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항구에 도착했다. 여행사 차량은 항구 앞 작은 식당에 우리를 풀어놓더니 하염없이 기다리라고만 알려주고 먼지를 뿜으며 떠나버렸다. 페리가 몇 시에 오는지 도통 알 길이 없이 시간은 점심때를 넘어섰고, 나는 괜스레 서성거리다 작은 그 식당에 앉아 인도네시아 대표 음식인 나시고랭과 망고주스를 주문해서 먹었다. 내 옆으로 콜롬비아에서 온 커플과 호주 출신 남자가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양측 모두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장기여행자들이었고 이 중 콜롬비아 커플은 곧 중국과 일본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에는 오지 않는 걸까?-의문) 점심을 먹는 척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사이, 드디어 페리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다. 기약도 없이 거의 3시간 가까이 대기를 하였던 터라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반가움이었는지 분노였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페리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우리는 안전하게 길리에 도착했다....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페리는 길리가 아닌 롬복(발리에서 길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섬)에 도착해있었고 승무원은 탑승객인 우리더러 다른 배로 갈아타라고 지시했는데, 이 갈아타는 배가 요물이었다. 통통배도 아닌 것이 어선도 아닌 것이 짐칸과 객실 구분도 따로 없는데다 그마저도 짐을 자신이 직접 들고 날라야했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해변가를 20kg 무게의 캐리어를 직접 머리에 이고 가로질러 배에 올라 타야하는 것이다. 선원에게 짐 나르는 것을 도와줄 수 없냐고 했더니 다짜고짜 돈을 내란다. 울며 겨자먹기로 값을 지불하고 선원에게 짐을 맡긴 후 배에 올라탔는데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벌써 석양이 보였다. 오 마이 갓... 지는 해와 함께 뱃멀미가 몰려왔다. 누가 길리를 발리에서 1시간 반 거리라고 하였던가. 오전 10시에 출발한 여정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배가 정박한 다음에는 어둑해진 길리 항구에 덩그러니 서 있다가 숙소로 내 짐을 날라줄 마부와 다시금 한참 흥정을 해야했다. 숙소 이름을 알려준 뒤 마차를 타고 캄캄한 골목으로 들어선 지 몇 분 이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룸 컨디션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쓰러지듯 잠을 잤다. 길리에서의 나의 첫날이었다.      


이 날은 잃어버린 물건이 있거나 특별한 장소를 방문한 것도 아니었기에 정말 딱히 추억할 거리가 없는 하루라고 할 수 있다. 오래 걷지도 않았으므로 체력적으로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그저 가까운 목적지를 먼 길을 돌아서 간다는 느낌이 들어 심리적으로 지치는 하루로 기억된다. 하지만 위로가 되었던 것은 가는 길 옆좌석에 앉은 젊은 한국인 여성 두 명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다. 동갑내기 친구 사이로 같은 회사를 다니다가 동시 퇴직을 하고 함께 발리 여행을 왔다는 두 사람은 각각 그림 그리기, 영상 만들기 등의 취미 활동을 하며 항구에서의 긴 대기 시간도 즐겁게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긍정적인 두 친구는 그 통통배같은 배가 뱃멀미를 유발하던 중에 보이던 석양이 현재까지 발리에 와서 보았던 것 중에 최고라고 극찬을 하며 즐거워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숙소를 직접 걸어서 찾아간다던 두 사람을 보며 해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뒷모습도 참 정겨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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