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마쓰에이 마사시 장편 소설

by Daffodil


좋아하는 일본 작가 마쓰에이 마사시.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를 오늘 읽고 느낀 감명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마쓰에이 마사시의 글에서는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 그 연필이 은은하게 젖은 나무향을 내는 냄새, 종이 위에 부드럽게 쓰여지는 느낌, 손바닥에 전해오는 단단하지만 무른 나무와 목탄의 감촉 등이 묻어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덤덤한 소설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잔잔함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깊이에 푹 빠져서 며칠을 보냈다.


전에 읽었던 <여름은 아직 그곳에 남아>는 촉각적인 분위기가 압도하는 글이었다. 반대로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가족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끄집어 내는, 뇌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가족과 혈통과 그들 모두와의 관계에 대한 아련한 기억, 느낌 그리고 상념을 포함하여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그려보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이곳에 있었다.


가족,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인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입학할 나이가 되어 도시로 떠난 남매, 어린 시절의 아픔이 가슴에 맺힌 하나의 공동으로 남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사연을 갖고 있는 고향 친구들, 새로이 인연을 맺은 사람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달라진 것은 없는 인간의 모습 속에, 삶이란 시간이란 그리고 성장이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바로 그 누군가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듯, 순수하게 과거의 모습 그대로인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복잡다단한 길을 걷지 않은 채 돌아와 조금씩 늙어가는 가족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자의 사연대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자못 슬프기도, 안쓰럽기도, 어쩔 수 없기도하는 우리 모두의 주변이었기에, 그 마지막을 설명할 때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그것을 맞딱뜨려야하는 이들의 고통과 괴로움이 그저 남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임을 실감했을 때, 그토록 담담한 필체로 쓰여진 나무 향기같은 이 소설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한국의 문학에는 특유의 유교적인 색채가 어딘가에 배어있고 고전문학을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그것도 현대 소설이라(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 누군가가 몰래 숨겨둔 일기를 꺼내 읽는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 현대문학 한켠에 자리잡은 이러한 감촉이 고교시절 도서관을 떠올리듯 추억에 젖게 하고, 내가 겪지 않은 일조차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모든 일을 지나치게 격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게 적어내는 마쓰에이 마사시의 시선도 그에 크게 일조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훗카이도견 4세대는 혈통있는 개이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족보와 함께 뿔뿔이 흩어져 ‘형제’의 의미를 모르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 훗카이도견을 위한 대회를 개최할 때면 명예로운 훈장을 달고 집으로 복귀하는, 소설 속 인간에게는 가족보다 친밀하고 귀한 개였다. 이 훗카이도견들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 인물들은 한 데 모여 살며 삶을 공유하지만, 감정적인 연결성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을 묶어준 최초의 인물이자 할머니인 요네는 조산사로서 생명 탄생의 순간에 관여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수양딸로 남의 집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경험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크게 찾지 못했던 사람으로, 그렇기에 더욱더 갓 태어난 아이를 받아내는 일에 집중했는지도 모른다. 요네는 자신의 자녀들과 남편을 뒤로 한 채 조산일에 몰두했고, 생명을 낳고 생명이 태어나는 그 순간에 집착했다. 생명을 기르는 일이란, 어쩌면 요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정작 그리고 본인은 자신의 손녀가 태어난 얼마 뒤, 손자를 품에 안아보지 못한 채 죽었다. 요네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4남매 중 유일한 남자였던 신지로는 4마리 훗카이도견의 주인으로, 남매들 중 혼자서만 가족을 이루었지만 끝끝내 손주를 보지는 못했다. 아내 도요코와 오랫동안 함께하며 장수했지만, 이웃에 사는 누이들과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한 채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굳어져 갔다. 젊은 나이에 잃은 딸 아유미같은 활달함과 대담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나치게 차분하고 글이나 쓰는 아들 하지메만 곁에 둔 채 점점 더 꼬장꼬장하고 건강염려증이 심한 노인으로 늙어가게 된 것이다. 개성이 서로 달랐던 세 누이는 결국 모두 같은 병인 알츠하이머로 요양병원에서 차례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어느새 소년에서 초로의 남자가 된 하지메가 고향인 에다루로 돌아와 젊고 활기찼던 누나 아유미를 추억하며 그의 첫사랑이자 오랜 친구인 구도 이치이 목사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하지메의 아내는 뇌조를 관찰하기 위해 후지산으로 떠난지 한참 되었고, 그 둘의 관계가 헤어졌는지 어떤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하지메가 늙어가는 부모와 고모들을 돌보면서 혼자 남겨질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으로 미루어, 신지로의 아들 하지메는 아마도 철저히 혼자일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 쓰인대로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성장하면서 ‘집’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환경으로 여기고 떠났던 아유미와 하지메. 하지만 각자 천문학자이자 문학교수로 도쿄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들의 삶의 의미는 희미해져 갔고 정체성도 옅어졌다. 아유미는 젊음의 한 가운데서 별처럼 스러졌고, 하지메는 교수직을 버리고 에다루로 돌아와 부모 곁에 섰다. 고향과 집,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가 그 오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그곳에는 생명을 받아내던 요네가 있다.


소설 속에는 하지메의 아버지 신지로가 계곡에서 물고기를 낚는 모습이 종종 등장하고는 한다. 신지로는 꼿꼿한 사람이었고 타인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는 고지식한 남자였으나 물고기의 마음은 감각으로 읽는 듯 했다. 그는 도구를 어떻게 다루고 어느 때에 계곡에 가면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지 모두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일렁이는 강물처럼, 이 소설도 차거나 넘치지 않게 계속해서 넘실댄다.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는 강둑의 물결같이, 어떠한 사건 앞에서도 깊이 빠지지 않는 짙은 감정의 움직임들이 소설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 감정들의 강한 이끌림에 소설 속 인간들은 모두 ‘귀향’의 본능을 느낀 채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리며 최후를 맞는다.


글을 읽는 중간중간 나는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슬픈 사건 앞에서도 담담한 그들의 삶의 순간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몸으로 전해져와서 눈물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럼에도 감정의 잔향은 남아 나를 움직였다. 내 마음 속은 세 번째 훗카이도견 에스를 사냥꾼에게 넘겨주고 한참을 울었던 아유미의 마음과 같아지다가, 그것을 바라보던 하지메의 시선과 같아지기를 반복했다. 죽기 전, 목사가 된 이치이에게 세례를 부탁하던 젊은 아유미와 그 앞에서 느끼는 이치이의 고통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하지만 나는 신지로와 도요코처럼, 그리고 하지메처럼 울지 않았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하여 이처럼 사실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소설은 처음이다. 시간을 뛰어넘은 장면의 묘사에 충실한 마쓰에이 마사시의 순일한 문체 덕에 모든 씬이 뎃생 그림처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브런치 작가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