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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원 Jan 11. 2019

04.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아침 7시에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죽은 듯이 잠든 것 같았는데 막상 깨고 보니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웠다. 장례식장에서의 3일 차 마지막 아침,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고는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돌아와 밥을 먹었다. 왜 장례식장에서 시래깃국이 자주 선택되는지 막상 먹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질리지 않고 무겁지 않으며 맛있었다. 그런 이유인 것 같다. 이런 빈소 음식의 선택 또한 다들 경험에 의한 걸까. 옆에선 이모와 숙모가 과일이랑 남은 음식을 챙기고 있었다. 들고 가기 힘들지만 맛은 괜찮고 많이 남은 반찬은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다 우리 차지였다. 초코볼과 고추냉이 과자까지도 챙겼다. 할머니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다. 그러기 위해, 자식에게 다 주려고 오신 것 같다. 


  8시 반이 되니 교인들과 목사님이 빈소로 다시 오셨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에 먼저 오셔서 조문을 해주시고, 오늘 입관에 맞춰 다시 오신 것이다. 장소를 옮겨 예배실에서 입관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는 장지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이 매우 흐린데,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기억나는 건, 입관예배부터 장지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계속 울었고, 너무 우는 나를 엄마는 다그쳤으며,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엄마와 형제들은 그다지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딱히 진짜 마지막이다라고 강조하여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대형버스에 탑승해서 실려가는데 날씨가 너무 좋았다.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또한 목요일이어서 입관이 토요일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덜 미안하기도 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죽음의 복이 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걱정했던 것보다 할머니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고, 입관 날까지도 비바람이 치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하지 않은 선선한 좋은 날씨여서 또한 운구 및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었던 분들에게 미안함이 덜하였다. 


  할머니를 모실 곳을 선정하고, 화장터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까. 땅바닥에 누워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 발을 구르는 사람, 울다가 지쳐 뒤로 쓰러지는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망자를 이제는 완전히 보내드려야 하는데 그리움과 회환을 넘어 죽음을 부인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열하고 절규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아렸다. 누구 아빠, 누구 엄마, 누구야, 여보 당신... 생전에 망자를 대표하던 많은 이름들이 쉴 새 없이 불려졌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땐 할머니 이름을 자주 부르기도 했는데 오히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입안에서 할머니라는 단어가 울음에 복받쳐 빙빙 맴돌았다. 부계 쪽과 연결이 없어 유일하게 한 분의 할머니였던 나의 외할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추모공원에 도착해 사진과 함께 이름표를 붙이고 나니 정말로 모든 장례가 끝이 났다. 거대한 동굴과 같은 추모공원의 룸 안에 수십 명의 혼이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로, 엄마이자 아버지로, 가장이자 기둥으로, 희망이고 소망이며 사랑이자 자랑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부디. 이제는 행복하기를. 이곳에서의 힘들었던 시간은 다 내려놓고 늘 행복만 하시기를. 


  추모공원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상복을 벗어 장례업체에 전달하고 할머니의 짐을 정리한 박스를 들고 병원에서 나와, 친척들은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엄마와 나는 할머니의 짐을 정리한 박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박스에는 물티슈와 기저귀, 수건, 양말, 안경, 두유, 양갱, 모나카, 속옷, 카디건, 슬리퍼, 양치컵, 치약 칫솔, 로션 등이 들어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담기에는 박스 하나면 충분했다. 병원에서 몇 년을 있었던 그녀가 얼마나 단조로운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박스를 정리할 수 없어 바닥에 내려놓고, 받아온 음식을 대충 냉장고에 집어넣고는 자리에 누웠다. 너무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엄마와 격일로 병문안을 가던 병원을 이제 가지 않아도 되어 저녁에 시간이 생겼다. 할머니에게 말싸움을 걸던 병실의 다른 할머니와 더 이상 입씨름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했던 많은 일들이 사라졌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도 함께 사라져 버려 모든 것이 함께 소멸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느낀 것이지만, 고인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또렷해지고, 그리움은 배가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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