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오후 늦게 염습이 있었다. 젊은 장의사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라며 가족들을 안내했다. 직계가족 중에서도 몇몇은 보지 않았다. 창 너머 누워있는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삼베옷을 입고 머리를 단장하고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였다. 삼베옷을 보니 생전에 엄마와 할머니가 삼베옷 때문에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할머니가 정정하실 때라 벌써 10년도 더 넘은 일인데, 70대 초반부터 할머니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해 삼베옷 등을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엄마는 그때마다 왜 벌써부터 그런 걸 준비했냐고, 준비를 해도 내가 한다고 할머니를 말리기 일쑤였고 할머니는 죽을 때라도 비싸고 좋은 옷 하겠다는데 왜 뭐라고 하느냐고 역정을 내셨다. 대화의 패턴은 뻔했다. 할머니가 죽음과 가까운 절차들을 알아보고 그러한 사실들에 넌지시 제시하면 엄마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대화 자체를 중단하셨고, 할머니는 마음이 상하는 그런 패턴이었다. 그러한 말싸움의 중간에서 늘 곤란 해한 건 나였던 것 같다. 할머니 말을 들으면 할머니 말이 맞는 것 같고, 엄마 말이 들으면 엄마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기 그 삼베옷을 입고 할머니가 누워있다. 병실에서 몇 년을 누워있었는데 몇 년간 본 할머니 모습 중 가장 단정하고 예뻤다. 누워있는 할머니의 발에 버선이 신기고 그 두 발을 삼베 끈으로 묶는데 가슴속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것 같았다. 장례식을 하는 이틀 동안 계속 울었지만, 정말 마지막이라고 염습을 하는 할머니를 보는 순간 이제 정말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자식들 키우시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병원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다. 염습에 참관한 친척들도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할머니가 더 가엾어 엄마손을 붙잡고 더 울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인사하시라고 말하는데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당신을 사랑했다, 함께여서 행복했다, 부디 좋은 곳에 가시라.. 그런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염습 이후 너무 많이 울어 진이 쭉 빠진 상태에서 다시 빈소로 돌아갔다. 기운이 없어도 입맛은 있어 시래깃국이랑 수육, 떡, 과일을 열심히 먹었다. 마지막 날 저녁 10시쯤이 돼서야 운구를 할 몇 명의 고향 분들과 친척분들을 제외하고는 빈소도 정리되고 한바탕 손님 치르기가 소강되었다. 마지막 날 밤에는 들어온 봉투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돈 세고 정리하는 걸 보고 숙모는 나에게 똑 부러지고 야무지다고 칭찬을 했다. 돈을 잘 세고 셈이 빠르면 똑 부러지고 야무진 걸까. 그런 기준이 똑똑함의 기준이 되는 걸까. 숙모는 몇 번이고 돈을 잘 세고 셈이 빠르다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숙모는 코가 크고 높으며 끝이 뾰족해 옆모습을 보면 가끔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엄마를 쳐다보며 짐짓 진지하게 나의 셈하기와 돈 세기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니 기묘했다. 같이 얘기를 들었던 엄마의 기분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칭찬이 썩 달갑지 않았다.
조의금 정산을 통해 개인에게 들어온 돈은 개인이 가져가고, 가족 공동으로 들어온 돈은 똑같이 1/n로 나누어 가져 가기로 하였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팩트와 그에 따른 슬픔, 그리움 등을 제쳐두고 둘째 날 밤 저녁은 누가 얼마를 가져갔고 총 입금된 금액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장례식이라는 행사를 통해 개인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위치 및 지위에 대해 고심하게 되었으며, 휴대폰에서 지워야 할 사람과 마음속 깊이 감사해야 할 사람이 나뉘는 척도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좋은 일에는 못가도 안 좋은 일에는 꼭 가라고 했던가. 조의금 금액보다도 먼길 한걸음에 달려와서 안아주고 함께 울어줬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지금도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다.
정산 이후 집으로 심부름을 가기 위해 상복 위에 코트를 입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11월 중순의 날씨는 춥지는 않았지만 제법 쌀쌀했다. 이틀 동안 입고 있으니 검은 한복도 입을 만했다. 종종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장례식장 근처에서 상복을 입고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서 상중인 그들의 덤덤함에 대해 의아함을 품었었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되어보니 산사람은 살아야 했기에 24시간 마르지 않고 울 수만은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떠나가도 남은 사람은 그렇게 또 씩씩하게 살아가야 하기에 말이다. 머리에 하얀 핀을 꽂았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한 채 집에서 짐을 챙겨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 저녁은 매우 고요했다. 마셔라 부어라 하는 술판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친척들도 모두 지쳤는지 적막했다. 내일 아침 일찍 발인이므로 얼른 자두라는 엄마의 당부와 함께 빈소 안 소파에서 머리를 대자마자 깊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