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과 살아가기
R이 학교 다니느라 바쁘고 나는 나대로 뭐하는지 모르겠으나 바쁘다. 한 동안 집 밖에 나가기가 싫어서 지나치게 처박혀 있었더니 몸이 간지러워 요즘엔 하루에 한 번이라도 꼭 나가 커피를 마시고 온다. 해가 지면 날이 선선하니 좋아 테라스에 앉아있기 딱이다. R과 나는 나란히 감기에 걸렸는데 그래도 이 날은 굳이 남의 담배연기까지 마셔가며 테라스에 앉아 나는 글을 썼고 그는 홍콩에 있는 회사와의 면접 준비를 했다. 이대로 잘 풀린다면 우리는 내년에는 런던에, 그 후년에는 홍콩 아니면 상해에 살 것이다. 서울이라면 좋겠다. 사실 원한다면 갈 수 있다. 쌀 한 톨만큼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이 가능하다니 밀의 나라에 남고 싶다. 매일이 고슬고슬한 밥이 그립지만 기름진 버터향을 머금은 빵이 깨우는 것이 얇게 나의 아침에 스며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나를 위해 나라를 바꿀 일을 감행하는 R은 오렌지 나무처럼 향긋하다. 아낌없이 준다지, 그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중력에 눌린 로켓이 역으로 암흑 속으로 추진력을 내어 영향권을 필사적으로 벗어나듯이 밤 사이 악몽과 사투를 벌였다. 분리된 정신과 힘 빠진 정신에 호흡이 가빠지는 건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하며 깨어났을 때 나는 오른쪽 팔을 뻗어 매트리스를 더듬었다. 차가웠다. 자리를 떠난 지 어느 정도의 흘러버린 시간을 알리는 온도였다. 이번엔 왼쪽으로 손을 뻗어 베개 밑에 숨겨둔 핸드폰을 꺼내었다. 새벽 6시였다. 새벽 운동이 R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방향을 잃고 헤매는 원망을 애써 삼키고자 했다. 세 샷의 커피 원액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따끔했다. 며칠 째 나를 고생시키는 쓰린 목감기는 각성할 줄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R에게 전화를 걸어서 짧은 하소연을 마친 뒤였다. 그러자 R은 힘들어도 잊고 자라고 했다. 속 편한 소리. 그랬다가 다시 가위에 눌리는 걸로 모자라 조각조각 잘리면 어쩌라는 건지. 태평한 R 목소리 뒤로 둔탁하면서도 경쾌하게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그는 내 볼멘소리보다 저 쇳소리가 그리울 거라 생각하며 천천히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라고 했다. 라디오를 켰다. 속보를 전하듯 빠르게 쏟아지는 프랑스어를 이제는 반의 반 정도나마 알아먹을 수 있었다. 금세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면서 좀 전의 불쾌했던 중력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그 몽롱한 상태에서 흡수한 서사를 되짚으며 글로 쓰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글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써 내려가지 않으면 휘발될 섬광이 아쉬웠으나 내 몸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잠을 잤는데 한바탕 전쟁을 치른 용사와도 같은 소모전에 대자로 뻗어있는 것만이 현재로서 최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 까. 계단을 뒤꿈치로 밟지 않고서는 울릴 수 없는 진동이 이 모래성 같은 아파트 전체를 휘집고는 우리 집 현관 앞에서 멈췄다.
R이 왔다. 계획한 운동량의 반의 반의 반도 마치지 않고서 곧장 집으로 온 거였다. 아무리 오렌지 나무라 해도 그가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오렌지 나무는 밑동까지 내어주니까 그럴 수도 있을까. 아침 운동에서 그 하루에 사용할 에너지를 얻어내는 그로서 이를 포기했다는 건 꽤나 감동적이었지만 그 이후의 말이 더 나를 노곤하게 만들었다.
“Je suis là, tu n’es pas toute seule.”
내가 여기 있어, 넌 혼자가 아니야. R은 내가 다시 평온한 잠에 들 때까지 손을 잡아줬다.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뜨니 R은 다시 떠났고 머리맡의 흰 서랍 위에는 머그잔이 놓여있었다. ‘벤티 라떼’ 였다. 한국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 체인점의 라떼. R이 만들어놓고 간, 진짜 벤티 라떼의 모조품. 진짜가 아닌 걸 알면서도 방금 한국의 집 앞에서 사 온 거라고 착각하며 마시는 그 벤티 라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카페에 대한 애착은 그곳에 ‘벤티 카페’에서 일하는 두 명의 바리스타 덕분에 시작됐다. 두 바리스타는 청각장애를 가졌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처음에는 혼자 다양한 오해를 빚어냈다. 여성분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예의가 없다고 낙인을 찍었고 남성분은 커피를 낼 때마다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며 조아리기에 이 동네 사람들에게 극심한 갑질을 당했다며 이웃들의 예의 없음을 나무랐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이크아웃 전문점답게 밀려든 방문객들로 내 순서가 한참 밀렸을 때, 비로소 시간을 내어 가게 안을 둘러보면서 주문대 옆에 쓰인 작은, 정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눈치챌 수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의 그 작은 안내가 눈에 들어왔다. 청각장애인 바리스타가 일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카운터에 메모지가 놓여있는구나, 그제야 이해했다. 할 말은 여기에 써주세요.라는 메모도 나란히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간단한 수화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과 눈도 마주치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소리는 못 내도 눈을 통해서, 손과 팔을 통해서 조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가게에 나는 한국에 잠시 머물던 무렵에 매일같이, 그러니까 거의 연속해서 30일 이상을 갔다. 고정적인 시간에 가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기다리는 일이 잦았다. ‘기다렸어요.’라는 말을 쓴 메모장을 바리스타 언니가 보여줄 때 내일은 오후 3시쯤 오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얼마나 들을 수 있는지, 그들이 가진 불편함의 정도는 알지 못했지만 천천히 또 정확한 입모양으로 말을 하면 곧장 메모장에 쓴 답장이 날아왔다. 두 바리스타의 환한 미소가 쏟아지는 카페에 들어서면 고소한 환대가 아찔하게 나를 안았다.
우습게도 짧은 한국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올 때 슬펐던 일 중에 하나는 이 벤티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찌도 서럽던지 마지막으로 카페에 방문한 날에 나는 작은 손 편지를 매달은 간식거리를 선물로 건넸다.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더 커도, 작아도 서로에게 불편했을 거라 생각했기에 어떤 크기의 선물을 골라야 할지 꽤나 고심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선물은 두 명의 바리스타도, 나도 아닌 R을 울렸다. 바리스타 언니가 무성의 문장을 우리 사이에 띄웠기 때문이다. ‘가지 마세요.’라고. 엄마도, 여동생도, R도 아닌 누군가의 곁에 남고 싶었다. 그 솔직한 애절함은 두고두고 곱씹고 싶은 고소함을 품고 있었다. 내가 벤티 카페에 가면 꼭 원두를 가장 고소한 맛으로 바꾸던 것처럼. 딱 그만큼 고소했다.
파리에 돌아와서 마시는 커피는 하나같이 맹맹했다. 카페는 예쁜데 커피는 이렇게도 볼품없단 말이야. 항상 얼굴을 찌푸렸다. 라떼는 감히 시킬 수도 없었다. 탁한 원두맛에 죽어버린 우유가 목을 적실 때면 나는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렇게 파리의 카페들은 나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괘씸하게 값도 벤티 커피보다 3배는 비싼 주제에. 뭐 잘 났다고 3배의 커피 값을 내게 이토록 당당히 요구한단 말인가.
R은 애를 썼다. 도통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나에게 카페라도 가보라는 권유를 하고, 벤티 커피 맛이 나지 않아 짠 눈물을 흘리는 나를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 맛을 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에 걸친 실험이 시작됐다. 시판되는 돌체구스토 라떼부터,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등의 다양한 캡슐 커피를 샀다. 차가운 물에 캡슐을 터트려보기도 하고 뜨거운 물에 지져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지만 집념의 실험은 불어나는 매운 실망에도 굴하지 않았다. 커피 캡슐을 결정한 R은 이번엔 우유에 변주를 주기 시작했다. 저지방, 고지방은 고사하고 평소에 먹지 않던 브랜드의 우유에까지 손을 댔다. 그리고 몇 주 후에 그는 해냈다. R의 짝퉁 벤티커피를 처음 마신 날에 나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지만 비슷했다. 어떻게 만들었냐는 물음에 R은 말했다. 돌체구스토 더블 에스프레소에 내가 항상 마시던 파란색 마크의 우유가 아닌 약간의 지방이 추가되어 고소하다는 빨간색 마크의 우유로 바꿨다고. 또 우유의 양을 머그컵의 반 그리고 커피의 양은 한 샷 반 정도로. 커피는 꼭 뜨겁게 내릴 것을 강조했다.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이 떠오른 자리에 어렸던 벤티 카페의 바리스타들의 얼굴도 함께. 그들의 웃음과 원두가 갈리는 소리. 키오스크의 결제소리. 자신의 커피를 재촉하던 날카로운 말소리. 문을 열고 나서면 보이는 익숙한 거리 풍경. 우리 집 근처. 위례. 밀리토피아 호텔 쪽으로 걸어가는 길에 만나는 떡볶이 집. 코너를 돌면 엄마나, 여동생이나, 남동생을 우연히 마주칠까 괜히 두근거리던 심장. 혹시나 그럴 경우에 야! 너 뭐 해! 왜 여깄어! 라고 머리를 거치지 않고도 쏟아낼 수 있는 나의 모국어. 반사적인 표정과 깨끗하게 정비된 거리. 커피 한 모금에 나의 터전에 다녀오고는 내 앞에 있는 이국적인 생김새의 남자를 마주했다. R은 나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담백하게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온몸은 신이 나서 종잡을 수 없이 뛰어다니고 있을지언정 조금 차분할 필요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말했다. Parfait 최고! R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미소가 번진다.
“자랑스러워요. 내가! ”
R이 한국어로 말했다.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이 단어를 꽤 일찍 가르쳐줬는데 잊지도 않고 잘도 써먹는다. 눈동자가 하나도 안 보일 정도의 눈웃음을 짓는 R를 따라 웃어봤다. 나는 그와 달리 좀처럼 눈동자가 가려지지 않는다. 입만 웃는 것이 버릇이라 종종 억지로 웃는다는 오해도 샀는데 그건 정말 나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눈이 휘면 그에 따라 광대뼈 근처 근육은 따라 내려가고 반대로 입꼬리 주변은 한껏 올라가면서 이가 보인다. 나는 선천적으로 송곳니 하나가 없었던 터라 어렸을 때부터 항상 웃음에 신경을 썼다. 방심했다간 임플란트를 위해 비어둔 송곳니 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갑자기 ‘영구 없다’를 재현하게 되니까 말이다. 굳어져버린 근육이 절제하는 웃음 덕분에 내 눈동자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꺼풀에 숨었던 R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R은 밤색 눈동자를 지녔다. 그의 프랑스식 주민등록증에도 눈색깔이 noissette 헤이즐넛색으로 적혀있다. 사실 처음엔 그 눈동자가 다른 옷을 입었기를 바랐다. 파란색이라면? 초록색이라면? 회색이라면? 컬러렌즈를 갈아 끼우듯이 바꿀 수 있다면? R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나는 눈동자 색으로 그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프랑스 사람은 모두 파란색 눈일 거라는 편협한 환상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R의 가족들을 만났을 때는 그 갈망이 더 커졌었다. 엄마와 형은 파란 눈인데 왜 그는 아빠를 닮아 밤색 눈을 가졌는지 말이다. R은 모든 프랑스인들이 파란색 눈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알지? 우리 엄마는 독일 사람이고 아빠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거.
그 색깔이 왜 중요했을까. 아직도 생각한다. 어떤 색으로 사람을 나누는 행위에 나도 동참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프랑스인이라는 광활한 정체성을 나는 단지 눈동자 안에 담으려는 시도를 했을까.
헤이즐넛 색 덕분에 나는 R이 완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근래 들어 다행이기도 하다. 내 눈에 그는 외국인이 아니다. 나와 거의 같은 눈의 색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동생과 R이 처음 만나는 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외국인 안 같지? 생각보다. 한국인 같지 않아?”
그러자 동생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니. 무슨 소리야. 누가 봐도 외국인이야."
외국인. 그 말에 거리감을 느낀다. 내 밖에 있는 존재. 그래서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가까워질 수 없을 거 같은 거리감에 지레 방어막을 세우고 숨는 것이다. 안과 밖을 나누는 흑과 백 논리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나로서 마주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익숙한 것에서 안정을 느끼듯 전혀 이질적인 것에서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자극적인 이미지를 소비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에 찍혀버린 나만의 ‘프랑스인’이라는 이미지에서 빗겨나갔던 R에게서 나는 나의 이상에 부합하기를 요구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자의와 일말의 연관성도 없는 눈동자의 색일지라도 말이다.
Noisette. 한국어로는 헤이즐넛색 말고는 이렇다 할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그 색상. 그 덕분에 나는 그를 나의 경계 안으로 쉽게 받아들였다. 오죽하면 넘실대는 바다와 달리 잔잔한 커피색 눈동자가 이제는 사랑스럽다고 느낄 정도니 말이다. 인종이란 없고 인종차별만 존재한다는 말에 무지함을 앞세워 무임승차했던 나의 일조와 그 폭력성을 그 눈동자가 지적한다. 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벤티 커피 한 잔의 느긋한 가르침. 배움의 속도가 더뎌도 묵묵하게 성장을 돕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나를 위해 커피를 만들고 내어주고 그 손으로 말을 걸고 대답을 하고, 고소한 부드러움으로 껴안아준다. 향긋한 냄새. 나는 R이 알려준 것처럼 커피를 직접 만들어 텀블러 안에 담아 밖으로 나선다. 머리 색, 피부색, 옷 색, 뭐 하나 같은 것 없는 다양한 색이 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말을 하기 힘들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의 커피색 눈동자로 다정한 소통을 해내보기로 결심하며 커피를 마시며 걷는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들을 바라본다. 갓 볶은 원두향이 진동을 하는 파리의 거리가 꼭 낯설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