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생긴 변화 ‘말의 책임감’
가끔 외식을 한다. 파리에 사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식비를 투자하는 것이다. 밥도 먹고 기분도 내고 일석이조니까. 식당을 선택하는 기준은 조명이다. 주로 황색 불이 켜진 곳들을 찾는다. 조도가 약간 낮은 공간에서는 경계의 온도가 낮아진다. 아늑하다. 고요한 온실 안에 있는 것처럼.
이 나라의 식당에는 종업원을 부르는 벨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초기에는 잃어버린 참을성을 되찾느라 꽤 애를 먹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익숙해진 덕에 이제는 나도 직원을 묵묵히 기다릴 줄 안다. 앞선 테이블 두 개를 거친 후에야 직원이 나를 향해 온다. 나를 보고 웃는 모습에 나는 갑자기 초조해진다. 메뉴판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메뉴판’이 여자였던가? 남자였던가? 헷갈렸다. 왜 ‘메뉴’가 남자일까? 왜 ‘판은 여자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그가 내게 경쾌하게 ‘봉쥬 마담!’ 하고 말을 건네기 전까지 이어진다. 이럴 때만큼은 내 피부색이 유용하다. 설령 남자인 명사를 여자로 칭했다고 해도 명백하게 다른 노란 피부 뒤로 숨을 수 있다.
나는 얼버무렸다. 남성형 관사 Un 도 여성형 관사 Une 도 쓰지 않았다. 한국어처럼 명사만 냅다 툭 던져버렸다. Carte des menues. 직원이 알아듣는다. 그래. 중요한 건 메시지니까. 굳이 머리 아프게 하는 성수 따위 모르면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가게 내에 있는 물건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시계, 그림액자, 식물, 선반, 와인병, 창문, 옷걸이. 이들은 생명력을 갖고 나에게 은밀하게 묻는다.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무시가 안 된다. 너는 여자. 너는… 남자였나? 너도 여자인가? 울고 싶어 진다. 프랑스어 학습 2년 차를 좌절시키는 너란 성수.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너란 존재. 발화 전에 나를 멈춰 세우는 방지턱. 또다시 걸려 넘어졌고 나는 옛 기억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를 진득하게 붙잡고 늘어지고 있는 이유를 발견한 날의 기억에.
프랑스 비자를 준비할 때였다. 주한프랑스대사관 교육진흥원인 Campus France를 통해 화상 면접을 봤다. 초반에는 당연하게도 기본적인 질문을 했다. 왜 프랑스에 가는지. 왜 어학연수를 하려고 하는지. 어디에서 할 것인지.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이 정도는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었다. 이후에 다소 생경한 물음이 이어졌다.
“프랑스어를 배워보니 어때요?”
면접관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본다고 덧붙였다. 배워보니까. 배워보니까요. 운을 여러 번 뗀 뒤에 말했다. 어렵다고. 너그러운 웃음에서 그가 내 말에 공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통분모가 생긴 거 같자 친밀감이 들었다. 분위기에 힘입어 나는 말했다.
“특히 명사요. 컴퓨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다 외워야 해요. 성수가 한국어에는 없잖아요. 이해가 안 가요.”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외워야 해요. 저는 그것도 단어의 일부분인 거라고 생각하고 외웠었어요.”
그는 규칙이 없으니 그냥 암기하라고 조언을 건넸다. 그리고 덧붙였다.
“좋은 점도 있을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입은 작동버튼이 눌린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말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건 프랑스어 공부 6개월 만에 내 일상에 스며든 균열을 내가 얼마나 자주 들춰봤는지를 알리는 결괏값이었다.
“제가 얼마나 한국어를 대충 사용했는지 깨달았어요. 엉망으로요. 프랑스어에서는 명사 성수가 갈리니까, 어떤 말을 할 때 어떤 관사를 써야 할지 그래서 형용사에는 성수일치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짧은 순간 안에 명사를 중심으로 질서가 잡혀요. 규칙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거죠. 조금 더 신중해져요. 반면에 한국어는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고. 그래서 엉망진창으로 말을 내뱉어버리기 전에 이 문장에 대해 검토하는 적이 없었어요. 이건 문장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과도 같아요. 아. 또 국어에서는 주어가 자주 생략되잖아요. 그래서 말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호한 경우가 많아요. 화자는 주어 뒤로 숨어버려요. 하지만 프랑스어에서는 보통 주어가 명확하기 때문에 책임소재가 명백하고 정정당해요. 비겁하지 않아요.”
면접관은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했다. 메모를 하는 것 같은 모습에 이 대화의 목적이 상기됐다. 아, 이거 면접이었지. 비자를 줄까 말까 하는. 프랑스에 어울리지 않는 회색분자처럼 보여 자격미달이라고 거절당하는 건 아니겠지? 뒤늦은 걱정이 찾아왔다. 면접관이 말했다.
“솔직하고 인상적이네요. 음, 결과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우기 잘한 거네요.”
안도했다. 적어도 부정적이진 않은 반응. 아 비자는 곧 손에 들어오겠다 싶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는 덕담을 건넸다. 화상 면접은 딱 30분 만에 끝이 났다. 마침 내가 주문한 탄산수와 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더불어 나의 회상도 멈췄다.
“Alors, je vous écoute”
종업원이 말했다. 듣고 있으니 말하라고. 주문하라고 한다. 자, 내가 지금 시키려는 이 메뉴에 파인애플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알고 싶다고 물어야 한다. 나는 파인애플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할 차례다. 파인애플과 알레르기라는 명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리지만 피부 뒤로 숨지 않기로 한다. 틀리면 암기하면 된다. 문법으로 접근하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파인애플은 남자니까 항상 un 이 함께 한다고. 둘은 세트라고. 한글의 자모 결합처럼. 하나의 명사라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까다롭고 절대 넘을 수 없는 벽도 사고를 바꾸면 한결 편안하고 쉬워진다. 당당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