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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lee Dec 08. 2023

저녁에는 영업 안 합니다.

나를 지키면서 일할 권리, 그것은 곧 쉴 권리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같이 사는 파트너 R이 말했다. 10분 후에 과외 수업이 1 시간 정도 잡혀있었기 때문에 저녁밥을 입으로 쑤셔 넣고 있는 중이었다. R의 말에 속 편한 소리 한다고 한 소리를 날리고 싶었지만 순간 불어로 번역이 되지 않아 눈만 흘기고 말았다. 급히 밥을 먹으면서 막 퇴근하고 돌아온 R과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나눌 겨를도 없는 것이 속상한 것은 사실이라 한숨만 깊게 내쉴 뿐이었다. 


“하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저녁은 편하게 먹고 싶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안 하고 싶은 거잖아. 이 시간에.”


몇 분 남지도 않은 시간, 밥도 제대로 음미할 수도 없는 시간에 괜한 신경질을 부렸다가 후회할까 봐 나는 아니,라고 까지만 말을 뱉고는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어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짜배기 선생한테 수업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삼보백배를 개선문부터 에펠탑까지 해도 모자랄 텐데 무슨. 


“그럼 다른 시간으로 바꿔. 네가 가능한 시간들을 알려주면 되잖아.”

“그럼 어떡해. 학생들이 내 시간에 맞춰야 하잖아.”

“왜 안돼? 너도 그 사람들 시간에 맞추잖아.”

“나는 돈을 받잖아. 그러니까 내가 맞춰줘야지.”


이윽고 R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 모습에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아주 팍. 잔반통을 쓰레기통에 비운 것처럼 진득한 소스에 곳곳에 눌어붙은 그릇을 겹쳐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다. 당당하게 수업료를 받으려면 최소한 5분 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자세까지 잡고 나니 노트북 뒤로 못마땅한 표정의 R이 보였다. 슬쩍 눈치가 보이려는데 그가 입모양으로 조용히 말했다. 수업 잘해.





한참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1년 전에. 스케줄 조절이란 완벽하게 불가능했다. 출근 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직장인은 새벽 6시에, 퇴근 후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저녁 6시 혹은 밤 10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블랙핑크를 좋아해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초등학생은 학교가 끝난 직후인 오후 3시를 원하기도 했다. 군데군데 해져버린 양말처럼 내 시간들은 내 손을 떠나 여기저기로 찢어져 흩어졌다. 새 일을 시작하는데 게다가 프리랜 서니까.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초반 6개월은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멱살 잡혀 쏜살 같이 한 달이 흘러가면 단지 짧은 식사시간이 허락될지라도 그 시간에 먹고 싶은 음식을 자유롭게 사 먹을 수 있는 여유금이 손에 들어왔으니까. 무늬만 어학연수생이지 다른 말로 하면 백수였던 때에, 나가는 돈만 있고 돌아오는 돈이 없을 때 0.1 썽팀, 그러니까 140원에도 쉽게 원하는 것을 포기하곤 했으니까. 한인마트에서 발견한 김치가 비싸 포기하고 돌아온 날 집에서 맨밥만 먹으면서 이게 자발적으로 집 나와서 무슨 개고생인가 생각한 날에 나는 한국어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에 만날까요?” 

“좋아요. 저한테 딱 좋아요.”

“... 음. 네! 좋아요.”


찝찝한 마음도 금세 잊고 열중했던 60분의 끝에 다시금 찝찝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시간에 또 수업을 하면 바로 앞 수업과 차이가 30분 밖에 나지 않아 또 오늘과 같이 급히 밥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같은 상황이 연속해서 몇 주째 데자뷰처럼 펼쳐졌을 때, 나는 R에게 말했다. 


“그래도 맛있는 밥 먹잖아. 이거 다 저 학생이 내 수업 들어줘서 가능한 일인 거다?” 

“그래. 네가 만족한다면 괜찮아.” 


R은 묵묵히 밥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눈물샘에서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맛있다. 맛있고 좋은데 30분만 더 여유로우면 좋겠고 생각했다.  맛있는 거 더 맛있게 먹게. 갑작스러운 감성에 축축해지는 눈이 부끄러워 곧장 숨겼다. 


“잊지 마. 너도 권리가 있다는 걸.”


에잇. 눈물 참기 실패다. 


“물어봐도 돼. 다른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때 가서 다시 계속 그 사람과 수업을 할지 말지 결정하면 되니까. “ 


R은 내 어깨를 다독여줬고 나는 비싼 배달비까지 내 가면서 주문한 브리또가 명치 언저리에서 멈춘 것 같이 불편해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일단 그냥 물어봐. 불편하면, 그래도 돼.” 


R은 내 어깨를 다독여줬고 나는 비싼 배달비까지 내 가면서 주문한 브리또가 명치 언저리에서 멈춘 것 같이 불편해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반의 반이 남은 브리또는 R에게 넘기고 감상에 젖을 시간 없이 젖은 얼굴은 건조한 후에 수업을 했다.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 드는 건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조금씩 말을 배워 어눌하고 서툴지만 애써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보면 뿌듯함이 들기도 했다. 말랑했던 마음이 금방 단단해졌고 강한 펌프질로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 체한 것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업이 끝날 즈음에, 나는 입을 옴짝 달짝하다가 이내 오므리고는 소리 없는 미소로 안녕을 고하고 카메라를 껐다. 그리고 등을 보이고 앉아 헤드폰을 쓴 채 조용히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R을 바라봤다. 같이 밥을 더 천천히 먹고 함께 게임을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자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구 남친이 새벽 감성으로 보낼 법한 구구절절한 사연을 써 내려갔다. 한국어로. 학생이 알아서 파파고를 돌릴 거니까. 


‘00 씨. 안녕하세요. 아까 수업시간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못 했어요. 제가 다음 주부터는 저녁 6시 이후로는 수업을 못 해요. 저랑 계속 수업을 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주말 오전에 시간이 있어요. 이때도 가능하시다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구구절절. 구질구질해 보일까 봐 불안한 마음도 잠시 민망함이 밀려들어왔다. 주제넘은 행동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는 저녁 시간을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동안 잘 버텨왔다고 합리화를 했다. 하고 또 하고 반복하다, 불안한 마음에 눈알까지 욱신거릴 때쯤에 답장이 왔다.

 

‘그럼요! 저는 토요일 오전 10시에 가능해요. ‘


얏호.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런데  주말에도 일을 하나요? 괜찮나요?’


나도 무시해 온 나의 워라밸을 살펴주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얘기해 볼 걸 그랬다. 얼마나 괴로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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