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적합한 장소와 때가 있다
챗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에 대해 가장 큰 우려를 표했던 업계(?)중 하나는 단연 학교였다. 특히 글쓰기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과제들을 GPT로 수행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의견이 분분했다. 시대가 변했으니 GPT의 산출물도 학생들의 과제물로 인정해야 한다, 글쓰기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대신할테니 이런 과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 앞으로는 질문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니 프롬프트에 입력한 내용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등등.
GPT를 둘러싼 여러 논의들과는 별개로 학교의 글쓰기는 이미 무너지는 중이다. 학생들이 수행평가로 제출한 과제물들을 읽다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매끄럽지만 영혼없는 존댓말. 학생들이 참고했을 리 없는 참고문헌 목록. 자기가 쓴 글로 발표를 하는데도 그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는 모습.
인간이 만든 모든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장소와 상황이 있다. GPT도 마찬가지. 직장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으로서는 매우 훌륭한 도구인 게 분명하다. 나 역시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아이디어를 얻거나 참고자료를 검색할 때, 기획서 초안을 작성할 때 GPT를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글쓰기활동에서 만큼은 GPT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해악이 매우 크다. 글쓰기 자체를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엘리베이터가 등장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줄어든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헬스클럽의 런닝머신 위에 올라갔다. 먼 곳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다리 근육과 심폐지구력은 여전히 중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GPT가 나오면서 초등학생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에세이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한 언어적 능과 논리적 사고력은 여전히 - 아니, 오히려 더욱 - 중요하다. 사람들이 비만을 피하고 근력을 기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런닝머신에 올라가듯 학생들도 뇌의 건강과 기능을 기르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한 불편을 '굳이' 감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둥,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둥 여러 세련된 광고성 슬로건에 가려지고 있다. 심지어 어려운 글쓰기 과제를 GPT로 단숨에 해결해 버리는 걸 '유능하다'라고 평가하는 시각마저 있다. 문제는 글을 써 보지 않으면 글을 교정하는 능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이다. GPT는 글쓰기 작업의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높여줄 수 있지만, 그 작업 전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최종적으로는 글쓴이가 자신의 목적과 상황에 맞게 글을 다듬어야 한다. 무엇보다 GPT는 글의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발표할 사람이 글을 직접 읽고 다듬어야 한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 경험은 읽기 능력 향상에 매우 큰 도움을 된다. 축구교실를 다니며 축구를 배워 본 사람은 축구경기를 볼 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한결 많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축구경기 방송에는 늘 해설위원이 있는데 이는 축구를 더 깊이 배운 사람들이 경기를 '읽어'주는 것이다. 글을 읽는 작업도 같다. 머리를 감싸 안고 여러 시간을 고민 해 본 사람은 매끄럽게 읽히는 소설과 칼럼의 가치를 평가할 줄 알고, 글의 구조를 파악하며 글을 읽을 수 있다. 지식정보의 시대가 될수록 고급지식은 텍스트에 담길 수 밖에 없고 그것을 독해하는 능력은 앞으로 더 중요해 질 것이다. '읽기'능력은 '쓰기'와 함께 이른바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아니 더 중요한 능력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안타깝게도 세상의 요구와 무관하게 학생들의 쓰기 능력은 점차 쇠퇴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글을 쓰게 하지만 글을 쓰는 학생들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쓰지 않았는데 쓴 글이 종이에 적혀 있고 또 제출되는 기이한 풍경이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끔 어설픈 표현과 짧은 생각, 긴 분량의 글을 보면 반갑기까지 하다. 머리를 싸매고 스스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지워버린 어설픔이 이 시대의 학교에는 귀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