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내 평생 처음으로 병실이란 곳에서 아버지 옆을 지켰다. 응급실이라는 전쟁통 같은 곳을 지나 입원실이라는 평온한 곳에 있으니 이제야 긴장이 풀어진다.
일요일 새벽 5시 30분. 이른 잠에서 깨어... 주무시는 아버지가 깰까 병상 한곁에서 숨죽이고 책을 보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글을 쓴다. 아니 고백을 한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
젊은 시절 전라도 담양에서 부산으로 온 아버지는 세탁소를 하며 성실하고 검소하게 사셨다. 다행히 당시는 경기가 좋아 운영이 잘 되었고, 주변에 큰 공장들이 많아 그곳에 일하는 멋 부리기 좋아하는 젊은 직원들 덕분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거리가 넘쳐났다고 하셨다.
단칸방에서 두 칸 방으로 그리고 작은 마루도 있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자식 세명 대학공부 다 시키면서도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작은 집도 마련하셨다.
나는 자라면서 먹고 싶은걸 못 먹어서 서러운 적 없었고, 갖고 싶은 건 열심히 떼쓰면 결국에는 얻어낼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중학교 때 컴퓨터가 너무 가지고 싶었다. 전화선을 연결해서 PC통신을 한창 하던 시절. 컴퓨터가 갖고 싶다던 나에게 아버지는 컴퓨터가 뭐가 필요하냐며 들은 척도 않으셨다. 하지만 컴퓨터가 너무 갖고 싶던 나는 '거짓말' 아니 '거짓글'을 썼다.
일기장에 학교에서 나만 컴퓨터가 없어 힘들다느니...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따돌린다느니... 하는 글을 쓰고는 책상 위에 무심하게 펼쳐놓고 학교를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머뭇거리며 나를 부르셨다. 일기장을 보려고 본 게 아니고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참 둘러둘러 하시다가 나의 손을 이끌고는 집 근처 큰 길가에 있던 컴퓨터 가게로 데리고 가셨다.
"제일 좋은 걸로 주이소!"
돈에 대해서는 개념이 없었던 나이어서 내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100만 원 가까이하는 당시 최고 사양의 부팅 디스크 없이 부팅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가 달린 컴퓨터였다. 그렇게 해서 친구들 중 제일 먼저 하드디스크가 달린 초고속- 컴퓨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 중학생 아들 일기장을 보고 얼마나 걱정하고 맘 졸이셨을까 싶고 지금도 적은 금액이 아닌 컴퓨터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큰돈이었을까 싶어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세탁소를 하는 아버지 덕분에 교복의 흰 셔츠는 매일 하얗게 반짝거렸고, 바지의 날은 반듯하게 서 있었다. 그렇게 날 키우셨다.
깨끗하고 곱게.
그런데 난 처음이다. 아픈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것조차....... 때마침 어머니는 1박 2일 여행을 가셨고, 다행히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맘 편하게 놀다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다.
차고 넘치는 사랑에도 부족하다 원망하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인 모양이다.
내 새끼 귀한 줄만 알았지 늙어가시는 아버지는 못 보고 어제까지도 나는 철없는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