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ine

도전하는 마음과 포기할 용기

포기는 또 다른 도전에게 기회를 준다.

by 라미


작년 10월 초, 수능을 다시 보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대학교 3학년 2학기의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제 무사히 4학년이 되어 취업 준비를 하는 일만 남았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내 주장에 가족들은 많이 당황했다. 특히 늘 걱정이 많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나의 병이 더 심해질까 걱정하셨다. 재수할 때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굳이 자세한 금액을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우리 집은 몇 천만 원 씩을 알 수 없는 미래에 던질 수 있는 정도의 형편은 못 되었다. 가난한 것도 아니지만 풍족하지도 않은 환경 속에서 나는 욕심을 내보고 싶었다.


계기는 별 거 아니었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는 학과에 왔고, 나름 열심히 해보겠다며 3년 동안 쉴 틈 없이 달려왔다. 그러다 권태기가 온 것이다. 내가 뭘 위해서 이러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고, 나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데 정작 날 위해주는 사람은 어디 있지, 그게 사뭇 속상했다. 이렇게 고생해서 자격증 시험까지 합격한 뒤 얻을 수 있는 건 200 언저리의 월급과 망가진 워라밸, 고도의 감정 노동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명감 따위로 맞지 않는 일을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랐고, 그 성공의 종류에 내 전공은 없었다.


다시 대학교에 들어가 휴학 없이 졸업하면 스물여덟 살인데, 문과로 취업하긴 글렀다 싶어서 이과로 전향했다. 나는 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도 인정한 ‘수포자’였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난생처음 과학 공부도 해봤다. 예상했지만 당연히 쉽지 않았다. 나 때와는 많이 달라진 수능 체계에 적응하는 것도 시간이 걸렸고, 잘한다고 자부했던 국어와 영어도 헷갈렸다. 차라리 스무 살 때 바로 도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루하루가 후회와 자책의 연속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 15분에 도서관에 도착하고 밤 9시가 되면 집에 가서 마저 공부를 하다 12시 언저리에 잠드는 생활을 반복했다. 나보다 더 혹독한 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애들이 많았기에 지금까지도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던 재수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학 문제 하나를 푸는 데 사십 분이 넘게 걸리고, 글을 쓰던 사람이니 쉬울 줄 알았던 문학에서 자꾸만 오답이 나오고, 지각 변동과 해수에 대한 이야기는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여자친구가 대신 결제해 준 업계 1위 인강 사이트에서 일명 ‘일타 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강의를 듣고 또 들었는데 그럴수록 내 한계만 느껴졌다.


몇 개월만 더 붙잡고 있으면 분명 체화될 거라고, 잘할 수 있다며 여자친구는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공부하던 중간에도 연락을 하길 원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나와 통화를 길게 이어갔다. 탓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나 역시 그러고 싶었으니까.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여자친구 한 명뿐이었기에 돌아보면 너무 감정 쓰레기통으로 썼던 것 같아 미안하다.


23년 10월에 시작했던 재수는 24년 4월 12일, 이미 결제한 사설 모의고사의 배송 4일 전에 끝났다. 많은 고민을 했다. 내 전공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선택한 길 위에서 나는 또다시 도망가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뭐가 있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종일 달고 살았고, 급기야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지경까지 갔다. 휴학한 김에 정신이 건강해질 때까지 잠깐 쉬겠다는 핑계로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시청하는 데 사용했다. 집에 자주 안 들어온다며 속상해하던 할머니가 밖에 좀 나가라고 할 만큼 집에 처박혀 있었다.


사람이 너무 우울했던 시기는 나중에 가서 뒤돌아봤을 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에겐 그런 시기가 총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22년 전체,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이때다. 어떤 걸 하며 지냈는지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고 병원과 집만 왔다 갔다 하거나 가끔 사람을 만났지만 외롭고 공허한 마음은 여전했다. 당연히 재수에 성공할 것이라 생각해 전공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고 무엇보다도 진짜로 그냥 하기 싫었다. 난 사회복지사랑 죽어도 안 맞는다. 가끔 한두 시간씩 봉사활동을 가는 건 너무 즐겁지만, 그 이상은 원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쭉 좋아했던 게 책 읽고 글 쓰는 거였다. 무력감이 약 효과로 조금 가셨을 때, 오랜만에 책상에 다시 앉았다. 한 뮤직 비디오를 보고 문득 영감이 떠올라 여자친구와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그때 ‘이거 글로 써 줘’라고 부탁받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쓴 글은 생각 외로 괜찮았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아졌다.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잔뜩 받는 건 언제 겪어도 설명하지 못할 쾌감을 안겨준다. 봉사를 가든, 실습을 하든, 학교 공부를 하든, 뭘 하든 간에 부족하고 어리숙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입장이 되니 즐거웠다. 그래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게 됐다. 날 즐겁게 만드는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번 여자친구와 얘기만 하고 미루었던 웹소설 연재도 시작하였고, 월정액 메일링 서비스도 시작했고, 개인 홈페이지에 꾸준히 소설을 업로드하고, 공모전을 준비하느라 머리를 쥐어 싸매기도 하며 간간이 소소한 외주를 통해 용돈을 벌고 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로 버는 돈은 금액의 크기와 상관없이 무척 값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오직 나의 글이 좋아서 돈을 지불한다는 데에서 오는 성취감은 24시간 내내 누워있던 나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절대 침대에 눕지 않는 사람으로 바꾸었다.


약 7개월 간의 여정을 나는 ‘꿈을 꾸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학교 졸업반이라지만 사회에 나가면 아직 한참 어린 스물셋, 밑에 후배들이 줄줄이 생겼지만 진정한 ‘선배’ 노릇을 하기엔 철없고 모르는 게 많은 나이. ‘졸업하기 싫어’, ‘평생 대학교 1학년 할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 속에는 분명 준비되지 않은 성장에 대한 두려움이 스며 있다.


예전에는 빨리 철이 들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럴수록 내가 정해둔 ‘나’라는 틀에 갇혀 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채 지내게 된다는 걸 나는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진작에 알았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하지만 지나간 과거를 되짚는 대신 앞으로의 나를 응원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꿈을 찾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바삐 지내고 있으니.


취업에 대한 고민, 인생에 관한 고민 등으로 한창 어지러울 시기이지만, 나는 아직 우리가 꿈을 꿔도 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전망이 있든 없든, 돈을 잘 벌든 말든 – 실제로 툭하면 가족들에게 작가 하면 굶어 죽는단 소리 듣는다. – 우선 그런 건 다 제쳐두고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설령 그게 실현되지 않더라도, 꿈꾸던 나의 모습은 추억 속에 한 장면으로 기록된다. 그때의 아름다움은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다.


우리 인생 화이팅.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먹는 게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