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술(酒) 이름에 담긴 미덕
십오 년 전쯤 중국 북경에 두 해 동안 거주했었다. 당시를 회상할 때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만, 그중 한 가지가 술이다. 수많은 중국의 술 가운데, '소호도선(小糊涂仙)'이라는 고량주가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산지는 구이저우 성(贵州省) 인회 시(仁懷市)이고, 주원료는 여느 고량주와 마찬가지로 물과 고량 그리고 소맥이다.
이 술은 고량주 특유의 화학성 냄새와 맛이 덜하고, 감미롭고 깊은 풍미가 곁들여져 부드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그 술이 남다른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지금껏 남아 있는 이유는 그 이름이 갖는 예사롭지 않은 의미 때문이다.
붉은색 종이 상자에는 '소호도선'이라는 술 이름과 함께, '총밍난 후투껑난(聰明難 糊涂更難)'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총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리숙하게 보이기는 더 어렵다.'라는 의미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할 뿐이다(酒不醉人 人自醉)’라는 술에 대해 달관의 경지에 이른 주선(酒仙)이나 할 수 있을 법한 아리송한 부연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오 년 전 광동성의 주도인 광저우로 출장을 갔었다. 한 만찬장에서 그 아류인지는 모르겠지만, '백년호도(百年糊塗)'라는 고량주와 조우했다. 마오타이 등 중국의 이름난 술과는 달리, 이 술은 소호도선과 마찬가지로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맛과 향 모두 ‘띵하오(頂好)’ 그들 말마따나 훌륭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소호도신(小糊涂神) 소호도성(小糊涂聖) 등 ‘호도(糊涂)’라는 단어가 든 유사한 브랜드의 고량주도 있다고 한다.
중국어 사전에서 호도(涂)는 ‘어리석다, 멍청하다, 애매하다, 흐릿하다’ 등의 의미로 설명되고 있다. 우리 사전은 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한자어 호도(糊塗)를 ‘사리에 어두워서 흐리터분하거나, 어떤 사실을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린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호도(糊涂)와 호도(糊塗)는 끝 한 글자가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도(涂)와 도(塗) 모두 간자체 도(涂)로 표기되고 있어, 결국 두 단어가 같은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국내 대중주인 소주는 하나같이 '이슬'이니 '잎새'니 하는 새큼하고 개운한 느낌의 이름에, 젊고 개미허리를 가진 날씬한 여성 모델의 라벨을 달고 있다. 쓴 소주에 이처럼 달콤한 옷을 입혀 서민의 지갑을 들추고, 외형중시 풍조를 조장하는 자본의 본모습이 가소롭지만, 많은 이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위로해 주기도 하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와 달리 중국인들은 그들의 대표적인 술, 고량주에 왜 굳이 어리석고 흐릿하고 애매하다는 의미인 '호도(糊涂)'라는 이름을 붙이는 걸까?
언젠가 북경 사무실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한 친구가 불룩 나온 다른 동료의 배를 가리키며, ‘저 친구 배는 인격이다’라는 농담을 건네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이 남산처럼 불룩한 배를 훤히 드러내 놓고, 해탈한 듯 초연한 모습의 포대화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온 가족이 밥상머리에 모여 앉아있을 저녁시간 대에 셔츠를 들추고 복근을 자랑하는 민망한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쁘면 다 용서된다.'라는 말이 더 이상 우스개 소리가 아닌 현실인 웃픈 세상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소위 ‘얼짱’이나 ‘몸짱’에 열광하는 외모지상주의로 치닫는 세태를 쉽게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배가 조금만 나와도 자기 관리에 실패한 '루저(loser)'로 호도되기도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배 나온 이를 오히려 인품이 높다고 추켜 세워주는 중국인들의 배려의 미덕이 싫지 않아 보이고, 부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찌 보면, 조금은 장난기 어린 중국의 고량주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다. 또 그럴 때면, 포대화상처럼 달관한 듯 초연한 미소가 저절로 입 언저리에 맴돌게 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