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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20. 2020

봄날 밤 인천 속으로 유영하다

관거험로(關據險路)

영동 산간지방에서 때늦은 눈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던 삼 월 초순 인천으로 발령을 받고서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세 평 남짓 넓이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북서풍을 타고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온 황사와 미세먼지가 제일 먼저 상륙하는 이곳 인천의 탁한 공기 때문인지 코감기 목감기 알레르기 등이 골고루 순서대로 찾아와서 떠나질 않았었다.


내항(內港)에 접한 본관 사무실에서는 맑은 날이면 하역용 크레인 숲 사이로 월미도(月尾島)가 한눈에 들어온다. 추위가 물러나고 날이 풀리면서 이른 아침의 연안 앞바다는 해무(海霧)로 뒤덮이는 날이 많아졌고 바다 건너편 월미도도 짙은 안개에 묻혀 정수리 부분만 살짝 드러내곤 했다.


몇 년 전 근무지였던 부산에서도 ‘수호제일관문(守護第一關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본관 건물의 창 밖 부두 너머로 영도(永島)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저만치 바다 위에 어른거렸었다.


퇴근 후 산책을 겸하여 인천의 옛 도심을 둘러볼까 하여 저녁식사를 잠시 미루고 숙소를 나섰다.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할 무렵 내게는 아직 낯선 이 도시의 골목길은 이국적 풍치마저 느껴진다.


아름다움뿐 아니라 추함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낮과는 달리 때로 어둠은 세상 골목이나 거리의 지저분한 구석을 가려주고 우아하게끔 보이게 하는 아량을 베풀어 주어서 좋다.

30여 년 전 임용을 앞두고 항동에 위치했던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3주일간 인천에 머물렀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인천이란 도시는 역전 거리의 혼잡, 유람객으로 붐비는 월미도, 소위 ‘먹방’ 바람 탓인지 외지인으로 북적대는 차이나타운, 곡물창고나 원료창고에 가로막힌 바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이념(理念) 공방 등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이미지로 머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으론 부산, 원산에 이어 1883년에 개항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니 만큼 인천 본연의 옛 모습과 의미를 간직한 특별한 곳이 어디엔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늘 머릿속에서 맴돌았었다.


중국인을 비롯해서 동남아계, 아랍계 등 외국인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고 텁텁한 공기 탓인지 지루하리만큼 좁고 길게 느껴지는 신포(新浦) 지하상가를 한참 걷다가 19번 출구로 탈출하듯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여기서 외지인의 인천 답사코스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홍예문(虹霓門)이 있는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1885년 7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세웠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 교회가 언덕 위에서 맞이한다.


평일 저녁 교회당 안에는 소위 '삼포(三抛) 시대'를 살아가며 풍족함 속에서도 무인도에 고립된 듯 무엇엔가 항상 목마른 젊은 청년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교회 마당에는 최초의 한국인 목사 김기범을 비롯한 목자 세 분의 흉상이 격랑처럼 휘몰아치던 개항기의 일들을 회상하듯 어둠 속에서 조용히 묵도하고 있다.


다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1890년 영국 해군 종군신부 코르프(한국명 '고요한') 주교가 세운 내동 교회가 나뭇잎 사이로 조명을 받으며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큰길에서 조금 벗어난 골목인데 도심의 소음과 번잡함은 아득히 멀리 있는 듯하다. 단아한 주택들과 그 사이에 하나 둘 숨겨져 있는 아담한 찻집이나 운치 있는 카페들에 정신을 팔다 보면 어느새 골목길은 마치 고갯마루에 뚫어 놓은 터널처럼 보이는 홍예문 위 정수리에 와 있다.


개항 후 인구 유입으로 거주지가 확장되자 일본군이 남북을 가로막은 언덕을 뚫고 홍예문을 세워 쉬운 통행을 도모했다고 한다. 무지개처럼 아치형 모양새를 해서 이름 지어졌다는 홍예문을 정점으로 그 양쪽 편 비탈에 들어선 동네에도 아기자기한 음식점과 앙증맞은 카페들이 모여 있다.


그중 한 카페 안을 들여다보니 바리스타는 한가롭고 언덕 아래로 향해 난 창문 옆 테이블에 서로 닿을 듯 얼굴을 맞대고 앉은 연인 한 쌍은 짧은 봄날 저녁이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부근 실내 야구연습장에서는 중학생 서너 명이 등에 메고 있던 무거운 가방을 잠시 벗어놓고 호기롭게 배트를 몇 번 휘두르다가 이내 제 갈 길을 간다. 꼬이고 뒤틀린 팔자의 인생들을 잠시나마 위로하고 주름을 펴줄 점집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이런 곳이 인천의 속살이고 본토박이들이 사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든다.
홍예문 위를 지나는 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루 공부를 마치고 학우들과 짝짝이 집으로 향하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 모습이 참새들의 유쾌한 재잘거림처럼 싱그럽다.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완만한 경사의 비탈길을 오르면 초파일을 앞두고 천왕사에서 내걸었을 여러 색깔로 정성과 염원을 담은 봉축등이 길을 따라 머리 위에서 불 밝히며 길을 안내한다. 숲이 좋은 자유공원의 밤공기는 맑고 신선해서 공복에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원 마루에 올라서면 인천 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는 한 손에 망원경을 든 채 이른 새벽의 어둠 속에서 상륙작전을 지켜보듯 변함없이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상 뒤편 아래쪽엔 펜 대신 총을 잡고 스스로 전쟁터로 달려가 포연 속에 스러져간 학도병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옆 정자에는 막노동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고단한 삶의 무게 인양 묵직해 보이는 작업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채 소주와 안줏거리를 걸고 바둑 대국을 벌였다는데 흑과 백색 돌의 기세 다툼이 점입가경이다. 외모나 술기운에 툭툭 묻어 나오는 말투가 다르듯 기풍도 한 사람은 실리(實利)를 쫓고 다른 한 사람은 호기롭게 중앙으로 세력(勢力)을 펼친다.


말이나 돌을 부려 승패를 가르는 장기나 바둑에서 한 번 패하면 기분이 좋지 않고 두세 번 연이어 패하면 화가 나고 돌을 던지기 일쑤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의 승부는 중간에 그만두거나 돌을 던질 수도 없을 터이니 절치부심이 바둑판에 비할까.

자유공원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인천항은 구한말 거침없이 밀려드는 거대한 개항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낸 곳이다. 1883년 1월 개항과 더불어 6월 16일 현재의 차이나타운과 인천역 사이 인근 목조 단층 건물로 설치되어 업무를 개시한 인천해관의 역사는 인천 개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어둠에 잠겨 말이 없는 저 바다는 스트리플링, 쇠니케, 미야기 등 생소한 이름의 외국인 해관장(海關長)들에게 수세(收稅)의 국가 주권을 내맡기다가 1910년의 한일합병으로 허울뿐이던 주권마저 온전히 강탈당하는 모습을 목도했을 것이다.


얼마 전 해상투기 수법으로 중국에서 밀수하려던 금괴를 세관 수사요원들이 인천 앞바다에서 적발한 적이 있었다. 인천공항에서는 미국에서 입국하던 대량의 마약 밀반입자가 세관 조사팀에 검거되기도 했다. 새삼 본관 회의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던 액자 속의 한자 글귀, '관거험로(關據險路)'를 마주하고서 고개를 끄떡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관문은 반드시 험한 길목에 근거하고 시장은 필히 요긴한 나루터에 의지해 들어선다(關必據險路 市必憑要津)’는 구당서의 한 구절이다.

자유공원의 밤은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재잘대는 여학생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젊은 아낙, 다정스러운 노부부 등 주변에 사는 토박이들의 공간이다. 그래서 내 동네 내 집처럼 편안해 보이고 차분한 분위기다.


저번에 둘러본 배다리와 도원역 인근의 동네들도 한때 우리나라 제2의 도시였던 인천의 구도심이라기보다는 소도시의 변두리에 온 듯 인적이 드물었었다. 우각로 골목에서 저녁 바람을 쏘이던 한 늙은 아저씨는 "한집 건너 두 집은 빈집"이라며, 이웃과 부대끼며 살던 옛적을 회상했었다.


오래되어 빛이 바래고 삭아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내는 일은 좁은 틈새에 빠진 열쇠를 손가락을 집어넣어 가까스로 집어 올리는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언제일지 모르는 재개발의 기대수익에 꿰인 외지인들에게 팔려나간 집들은 세도 나가지 않아 비워두고 있단다.


사람들로 북적이며 생기가 가득했을 마을들이 청라, 송도, 영종 등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주변 고층 아파트들에 주민들을 빼앗기고 날로 쇄락해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자유공원에서 과거 열강들의 사교장이던 제물포구락부 건물로 내려가는 계단 길과 인천 제일교회로 난 계단 길을 차례로 내려가서 초등학교 담벼락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다 보면 홍예문로 오르막길과 마주친다.


좁은 홍예문로를 가로질러 신포시장 쪽으로 향했다. 손님이 없어 더 넓어 보이는 볼링장, 아담한 차(茶) 박물관에 이어 ‘1883 개항장 근대역사 문화회랑’ 거리가 나오면서 오히려 근대 인천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혼잡스러운 어느 도시의 거리로 나온 듯하다.

신포시장(新浦市場)은 사람들이 발길을 거두기 시작하고 상인들도 하루를 마감할 채비를 서두른다. 한 식당에 들어서서 만두를 주문하니 김치와 고기로 속을 채운 만두에 뜨끈한 국물과 단출하게 단무지 세 쪽을 함께 내놓는다. 식당 아주머니 서 너 분은 여전히 내일 장사를 위해서 얇고 둥근 피에 속을 넣어 만두 만들기에 손길이 바쁘다.


빠른 지름길을 찾아 숙소로 돌아갈 요량으로 신포시장 초입에서 큰길을 건너 우현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과 첨탑에서 밝은 빛을 내뿜는 답동성당이 골목 담장 뒤에 숨어 있다가 우아한 자태를 슬며시 드러낸다. 우현로 50번 길과 맞닿은 답동로(沓洞路)로 접어드니 율목(栗木) 도서관 옆 성산교회 첨탑 언덕 위 저만치에서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다.


주택가 건물들에 가렸다 보이다가를 반복하는 교회 첨탑 십자가와 숨바꼭질하듯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큰길 건널목을 건너서 높은 아파트 숲 사이에 낮게 숨어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3월 봄날 밤이 깊었다. 내일은 날씨가 맑아서 내항(內港)의 잔잔한 바다와 그 건너편 월미도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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