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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Dec 17. 2022

관악산과 배나무골

햇살 좋았던 봄날의 추억

'은행과 솔' 모임 산행에 참석하러 집을 나섰다. 주말 아침 신분당선 판교역 플랫폼은 한가롭다.


전철이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타는 백발의 노인. 빈자리 없이 자리를 차지한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고 장년들은 다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전철 천정 손잡이를 잡은 노인도 지그시 눈을 감는다. 고령 사회로 접어든 탓인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눈에 많이 띈다.

선심 쓰듯 객차 양쪽 끝부분 구석에 경로석은 좁고 임산부 배려석은 드물다. 일반석 1/10도 안 되는 좁은 경로석, 우리 사회가 노인들에게 베풀 수 있는 배려의 최대한인가 싶어 씁쓸하다.

강남역에서 환승했다. 지하도 벽면이 게임 '신 삼국지' 홍보물로 뒤덮였다. 속니까지 드러내고 포효하는 뻣수염의 장비, 봉황 눈매에 미려한 턱수염의 관우, 부드러운 천의를 걸치고 미소 짓는 초선... 방학 때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8권짜리 삼국지를 읽었었다.

역사의 골격에 허구의 대리석으로 각색한 영웅들의 대서사시, 사드를 두고 중국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의 세대도 이천 이백여 년 전 이민족 중국 영웅들의 무용담에 매료되기는 우리 세대와 마찬가진가 보다.

사당역 4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먼저 도착한 K형 후배 B와 C 동기 K 등이 반겨 맞아준다. 80년 대 후반 처음 만났을 때 젊은 얼굴들엔 세월이 내려앉았지만 예전의 풋풋함은 그대로다. 9시 반경 사당에서 모여 관악산 자락을 올랐다가 내려와서 사당에서 점심을 함께 할 예정이다.

약속된 시간에 아홉 명이 다 모였고 일행은 나란히 또는 앞뒤로 서서 관악산 들머리로 출발했다. 관음사 옆 짙푸른 소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낯익은 얼굴들과 걸음을 옮기며 지내온 얘기를 나눈다. 예전 혈기 넘치던 때 주고받던 호기로운 영웅담은 줄었고 가족 안부 일 사업 건강 등 대개 진솔한 현실 얘기들이다.

배낭 멘 사람, 빈 손, 달랑 물병 하나 든 사람... 근래 드물게 쾌청한 날씨에 주변 남녀노소들이 모두 관악산으로 몰려나온 듯 능선마다 산객들이 줄지어 오른다. 발을 떼고 걸음을 옮기며 능선을 올라설 때마다 시시각각 기암괴석과 골짜기에 안겨 있던 경관을 보여주며 관악이 숨겨둔 매력을 뽐낸다.


이십여 년 전 회원들과 함께 올랐던 때와는 달리 비탈 암벽 위로 철계단이 놓여 한결 편안한 길로 바뀌었다. 세월과 함께 인생도 평탄한 길로 이어지면 좋겠다.


관음사 국기봉 위 능선에 올라섰다. 툭 인 시야가 가까이 남산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청계산을 비롯해서 여의도 63 빌딩 잠실 L빌딩 남산타워 황톳빛 한강, 멀리 문학경기장 계양산 강화 마니산 등을 펼쳐 보인다.


힘겨워하는 S형과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K형 C후배는 공룡 머리 위 바위능선에서 자리를 틀고 앉았다. 나머지 일행은 자라바위 지나 헬리 포터 기점 그늘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풀고 두어 잔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경각골, 리버사이드 프랭크, 코어, 결가부좌, 카르마 등 생소한 단어들과 절도 있는 동작으로 풀어놓는 H형의 즉석 생활 건강체조가 인상 깊다. 군대 학교 교육원 등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접해본 동작들이지만 삼시 세 끼처럼 매일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성상근야 습상원야(性相近也 習相遠也)'라는 말처럼..


정오가 지날 무렵 사당 쪽으로 하산길을 잡고 공룡 머리 좌측 능선 바윗길과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을 옆에 끼고 느릿느릿 쉬엄쉬엄 산을 내려왔다. 관악산 자락 남현동 골목마다 눈부신 봄 햇살이 가득하고 담장 너머 장미는 붉다. 출발했던 사당으로 내려와서 예약해둔 식당으로 들어섰다. '배나무골'은 연령대별 끼리끼리 모여 앉은 사람들로 빈자리가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한 스타일하는 Y선배, 국회 앞 일인시위로 변호사로부터 세무사의 권익을 되찾은 L후배, 초면의 L후배 등은 식당에서 합류했다. 열두 명이 모여 앉아 주고받은 얘기는 지내온 세월만큼 멀리 또는 가까이 시공을 넘나들며 끝이 없을 듯하다.


만발한 배꽃처럼 이야기꽃이 만발했던 배나무골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다. 자리를 옮기는 일행과 악수하고 전철역으로 향한다. 아직 해는 중천에 있다. 빌딩 숲 그늘에 부는 바람이 얼굴로 달아오른 막걸리 열기를 날려 주어서 좋다. 사당역 사거리 모퉁이 쉼터에 앉았다.


카페의 다정한 사람들, 모이를 쪼는 비둘기, 아이스크림 가게, 지나는 사람들, 햇빛과 바람까지도 평소 번잡스레 보이던 사당이 달리 보인다. 몇 잔 걸친 막걸리가 마법을 부렸는지 마음은 여유롭고 세상은 온통 아름답다. 날마다 오늘 같다면 사당을 사랑하게 될 듯싶다. 아니, 사당에서의 오늘 같은 봄날을...L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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