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일독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오랑캐의 침략 앞에서 풍전등화의 벼랑 끝에 선 조선의 왕과 위정자들은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이 소설은 최후의 결전지이자 피난처인 남한산성에서 생존과 죽음, 명분과 실리, 자존과 굴욕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극한의 명제를 놓고 벌인 47일간의 사투이자,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사실(史實)을 각색한 것이다.
작가는 처절한 죽음과 생존의 전쟁 이야기를 담담한 일상의 어조로 관조하는 듯 읊조리고 있다. 그러면서 말 못 하는 벙어리가 가슴속 가득히 간직한 울분을 삭이듯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거대한 침략의 파도, 그 앞의 민중들은 고통도 삶의 한 부분 인양 담담히 감내하고, 지배계급인 통치자들은 주화(主和)와 주전(主戰)이라는 상반되는 논리로 갈린다. 기실 극한의 상황 아래서 두 논리 모두 생존과 죽음, 명분과 실리, 자존과 굴욕이라는 궁극의 갈림길에서 어떤 것이 생존과 자존을 지킬 수 있는 길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결사항쟁을 고집한 주전파 김상헌, 치욕도 삶이 있어야 그 고통스러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승산이 없는 상황 아래서도 군인의 본분을 지키려는 전시 총사령관 김류, 결사항전의 자세를 잃지 않는 수어사 이시백, 번민 속에 결단을 주저하는 인조,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받는 민초들, 이들 모두가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자기의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주장에 대한 당위(當爲)의 이유를 찾고자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병(淸兵)에게 길을 잡아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 요량으로 피난을 가지 않았던 송파나루의 늙은 사공, 그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고 청병을 돕지 못하게 칼로 뱃사공을 베는 김상헌, 적에게 빌붙어 사욕을 채우려는 관아 노비 아들 출신 정명수, 초가지붕 뜯어 말에게 먹이고 마누라 속곳까지 벗겨 군병을 입힌, 말 그대로 “할 만큼 한” 대장장이 서날쇠,....
전쟁의 아수라장에서 소설 속 어떤 사람은 삶을, 어떤 이는 자존(自尊)을, 어떤 이는 사직(社稷)을, 또 어떤 이는 사욕(私慾)을 생각한다. 임금과 지배계층의 몸부림도 결국은 살자는 것이지만 굴욕적이지 않게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과 삶을 동시에 얻을 수 없는 극한 상황 아래서가 문제인 것이다.
‘지배자들이 일으킨 전쟁 속에서도 그저 땅을 파고, 쟁기를 만들고, 아이를 낳고 낳아 끝까지 남을 것’이라는 소설 속 인물 나루의 말처럼, 민초들에겐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삶과 아름다움, 삶과 더러움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아름다움도 더러움도 모두 ‘삶’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인조는 오랑캐 황제에게 피가 나도록 이마를 땅에 찧으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스러운 항복의 예를 올렸다. 투항대(投降臺)로 가면서 인조는 자기 백성들, 부녀자들의 비참한 절규를 듣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갔다고 한다. 60여만 명의 부모형제 아들 딸들이 청나라로 끌려간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조의 치욕스러운 항복 절차는 하나의 사치스러운 의식에 불과했다고 하겠다.
남한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유비무환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등한시한 우리 선조들이 격은 치욕의 상징이다.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이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처절하게 유린당한 당시 지배계층의 무능에 대한 질책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담담하지만 뼈 있는 경고이기도 하다.
총칼 들고 포연과 선혈이 낭자하는 전쟁만이 전쟁은 아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단어는 평화시에는 한낱 모토에 지나지 않는다. 막상 유사시에는 이미 때는 늦고 생존과 자존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남한산성에서의 전쟁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지 않는 우리들 마음속 망각이라는 둥지에서 또 다른 굴욕이라는 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20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