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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26. 2020

달밤 부산 달동네 산책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사무실을 나서서 중앙동 40계단 골목을 지나고 부산시민공원까지 가파른 비탈에 계단식 논처럼 겹겹이 들어선 주택가 계단 길을 오르고 올랐다.

보수산 민주공원으로 가는 비탈에 '함대사령관'이라는 의미의 이름처럼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부산항을 굽어보며 자리 잡은 코모도 호텔은 79년 개관한 지상 15층 건물로 조선시대 왕궁을 모델로 했단다. 호주인이 설계한 것이라 그런지 한 중 일 세 나라 건축양식이 섞여 있는 듯 외관 애매해 보인다.

호텔을 지나면 영주로에서 망양로로 오르는 계단길 옆에 영주동 모노레일이 놓여있다. 70미터 길이의 이 모노레일이 높고 가파른 달동네 수많은 계단을 대신하지는 못할 듯싶다. 다만 고달픈 달동네 삶에 살며시 손 내밀며 잠시 위안을 주는 존재쯤이랄까.

보수산 위에 조성된 민주공원엔 어둠이 내려앉았다. 잠시 날이 풀려서인지 여기저기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눈에 띈다. 어제가 보름이라 곧 떠오를 달을 기다리며 삼각대 위 카메라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는 사진작가는 기대에 부푼듯하다.

공원 내에는 4월 민주혁명 희생자 위령탑과 민주기념관이 자리한다. 기념관은 천정이 없는 중앙 홀에 거대한 횃불 모형을 감싸 안고 나선형으로 휘돌아 오르게 설계된 건물이다. 마침 1층 로비와 강당에는 사람들이 모여 7,8대 민주공원 관장 이취임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위층 전시실에서는 엄 화가의 '달동네'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1층과는 달리 화가와 안내자 그리고 두어 명의 관람객만 보일뿐이다. 부근 달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는 화가는 내 생각과는 달리 30대 젊은이로 현직 교사라고 한다. 전시실에 걸린 작품이 20여 점이나 되고 이번이 여섯 번째 전시회라고 하니 창작에 대한 그의 열정이 대단하다 싶다.

그의 그림들은 여의도 63 빌딩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보이던 사회 초년병 시절 내가 살던 노량진 달동네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인지 친근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작품의 기교나 솜씨도 수준이 있어 보인다. 넌지시 가격을 물었다. 호당 칠팔 만원선, 53.0 × 45.5cm 크기 10호 한 점은...

기념관 밖으로 나서니 어느새 둥근달이 부산항 바다 위로 떠올랐다. 산기슭 달동네 빼곡히 들어선 주택들이 오징어잡이 선단 집어등처럼 저마다 불을 밝혔다. 중앙대로변 빌딩 불빛 너머로 멀리 부산항대교의 화려한 조명은 시시로 색깔을 바꾼다. 항구의 아름다운 달밤 야경과 더불어 기대하지 않은 전시회 관람이 덤으로 주어졌으니 호사로운 저녁 산책이다.

민주공원과 맞닿은 중앙공원의 산복도로변 동백은 어둠에 묻혔고 부산 앞바다 위엔 달이 휘영청 밝았다. 이야기 공작소, 하늘 눈 전망대 초량동 골목과 수정동 시장을 가로질러 부산진세무서에 닿았다. 세무서 옆 공원의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이 있던 자리를 기념해서 세운 '두모진해관 표지석'에 도착해서 오늘 저녁 산책의 마침표를 찍었다.


부산진 전철역으로 가기 전에 출출해하는 배를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달랬다. 전철을 타고 온천천변을 걸어 숙소로 가는 길 내내 둥근달이 졸졸 따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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