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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26. 2020

초승달과 함께한 저녁 산책

봄이 왔던가 싶더니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렸다. 초여름 한낮의 이른 더위와는 달리 어둑해질 무렵 저녁 공기는 선선하여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인천항 내항 가까이 자리한 세관 숙소에서 큰길을 건너 해광사의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율목공원을 빗겨지나 '참외전로'라는 특이한 이름의 골목길을 지나면 배다리 사거리에 금방 닿는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개관한 율목도서관은 인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시립도서관이다. 특이한 길 이름 참외전로는 '참외+밭(田)+길(路)'의 조합으로 보인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매립으로 바다를 메우기 전에 배가 그 앞까지 들어왔음을 짐작케 해준다.

배다리 헌 책방거리는 아홉 시도 안되어 모두 문을 닫았고 배다리 지하철역 전통공예 상가 점포들도 모두 일찍이 셔터를 내렸다. 경비아저씨 혼자서 처진 어깨만큼이나 풀이 죽은 모습으로 너른 지하상가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송도 등 쾌적하고 번화한 신시가지로 모두 빠져나가고 오래되고 낡은 이 주변 골목에는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만 몇몇 지나갈 뿐이란다.

배다리 거리에서 동인천역으로 길게 이어진 혼수용품 거리도 사정은 매 한 가지다. 이삼백여 미터는 족히 되는 긴 거리를 빠져나오는 동안 왼쪽 이마 위쪽으로 낮고 가냘프게 떠 있는 초승달만 외로이 길 동무를 하자고 살며시 미소 짓는다.

동인천역 북광장에 다다르면 그 건너편으론 빌딩이 높고 불빛이 화려하다. 광장 벤치엔 취객들이 취한 몸이 힘겨운지 어깨에 짊어진 삶이 무거운지 잔뜩 움츠린 자세로 푸념인 듯 내뱉는 주사가 거칠 줄 모른다.

화평동 냉면거리는 함흥냉면, 평양냉면, 새수대야냉면 등 온갖 메뉴로 손님을 부르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지만 오가는 사람은 드물어 식당들도 한적하기 그지없다.

냉면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철로 위로 놓인 화평운교를 건너서 자유공원 쪽으로 향한다. 가파른 계단 골목길로 오를수록 초승달은 낮은 지붕 처마 위로 내려앉고 뒤돌아 보면 도시의 불빛은 아득히 멀어져 간다.


처음 걷는 이 골목길도 자유공원으로 닿으리란 걸 알기에 저녁시간이 비록 짧아도 마음은 아무것에도 구애됨 없이 한가롭다. 익숙한 공원 정상에 서 있는 노병 맥아더의 동상에 목례를 하고 발을 옮겼다. 그 아랫 편 정자에서는 일단의 무리가 묵직한 작업 가방을 내려놓은 채 소주와 안줏거리를 걸고 바둑 대국을 벌였다. 흑과 백 돌의 기세 다툼이 점입가경이다. 외모나 술기운에 툭툭 묻어 나오는 말투가 다르듯 기풍도 한 분은 실리를 쫓고 다른 한 분은 호기롭게 중앙으로 세력을 펼친다.


말이나 돌을 부려 승패를 가르는 장기나 바둑에서도 한 번 패하면 기분이 좋지 않고 두세 번 연이어 패하면 화가 나고 돌을 던지기 일쑤인데 한 번뿐인 인생에서의 승부는 돌을 던질 수도 없을 터이니 절치부심이 바둑판에 비할까.


홍예문 위를 지나는 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루 공부를 마치고 학우들과 짝짝이 집으로 향하는 여학생들 모습이 참새들의 유쾌한 재잘거림처럼 싱그럽다.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물의 내음을 잊지 않듯이 저들도 이 가파른 고갯길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나간 봄 혼탁했던 공기에 염증 들어 마비된 내 코처럼, 내 마음 어항 속의 연어는 고향의 강물 내음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듯 먼 타향에서 꿈속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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