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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30. 2020

추곡리 작은 안나의 집과 태화산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로 향했다.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던 백마산에서 태화산까지 소위 '태백 종주' 산행을 매듭지을 참이다.


아침마다 사무실 창문 너머 인천 내항 바다 위에서 스멀거리는 해무처럼 요즘 내게도 아침마다 어지럼증과 가벼운 두통이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병원 처방과 함께 스트레스, 운동부족, 식습관 등 증상의 주원인을 알려주는 의사 선생의 말을 곰곰이 귀담아서 들었다.

그래서인지 지난여름 나섰다가 마치지 못한 태백(태화산~백마산) 종주코스의 잔여구간을 주말에 완주해 보자 하는 생각이 배낭을 챙기라고 채근했다. 이번에는 저번과는 반대쪽인 태화산에서 치고 오르기로 했다. '작은 안나의 집' 부근 들머리에서 태화산, 마락산, 벌덕산, 정광산을 거쳐 용인 외대 쪽으로 내려설 요량이다.

새로 뚫린 분당과 여주를 잇는 경강선 전철을 이매역에서 탔다. 판교에서 시작되는 이 노선은 그다음 역인 이매역 까지는 지하구간이고 이매에서 그다음 역인 삼동역 까지는 성남시와 광주시를 가르는 영장산을 뚫고 지나는 터널 구간이다.

빠름을 추구하는 이 시대엔 수많은 길이 놓이고 있다. 그 많은 길들 중 대부분은 터널 구간을 포함하고 있는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길을 놓는다'거나 '길을 포장한다'라는 말보다 '길을 뚫는다'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인 듯싶기도 하다.

태화산에서 시작되는 이번 산행코스의 지도를 살피다가 여러 들머리 가운데 추곡리 '작은 안나의 집'이라는 이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크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세태와는 달리 왜 굳이 '작은' 안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무엇하는 곳일까 하는...


곤지암역에서 추곡리행 버스가 출발하는 곤지암 터미널로 가는 곤지암천변 도로를 따라 걸으며 뒤를 돌아보니 늦게 떠오른 게으른 겨울 태양 햇빛에 비친 곤지암천 모습이 황홀하다.


터미널에서 37-32번 공영버스에 탄 손님은 나와 젊은 여성 한 명 이렇게 달랑 두 명이다. 젊은 여성은 중간에서 내렸고 내가 목적지에서 내릴 때까지 승차하는 손님이 하나도 없어 혼자 버스를 전세 낸 듯하다.


모란에 산다는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기사분은 '버스 수입이 택시 한 대 벌이만도 못하다'라고 푸념이다. 그나마 공영버스라 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운행하는 조건으로 회사가 시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을 거란다. 도척 저수지 옆을 지나는 도로 '안나의 집' 정차장에서 기사님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아홉 시가 훌쩍 지났지만 '작은 안나의 집'은 유정 저수지 안개처럼 고요만이 내려앉았다. 이 노인 요양시설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선양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안중근 장학기금을 조성하여 불우학생들을 돕기도 하는 종합복지원이 운영한단다. 왼손에 십자가 오른손에 이토를 처단했던 권총 어깨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앉아 있는 안의사의 동상이 당당하고 의연하다.


산 밑자락 등산로로 들어서니 솔숲길이 나오고 '태화산을 지키는 산새 가족 소개' 안내판에 곤줄박이 황조롱이 후투티 멧비둘기 등과 함께 소개된 딱새와 콩새들이 솔숲 여기저기 사방에서 지지지 베베 지저귀며 산객을 맞이한다.


등산객들로 북적대는 북한산 관악산 등 도심 인근에 있는 산들과는 달리 태화산 산행 중에는 마주치는 산객이 드물다. 등산로 초입에서 산을 내려오던 두 사람과 산정 부근에서 지나친 노부부 일행 등 열댓 명 남짓한데 그들 모두와 간단한 인사말이나 산행코스 등을 소재로 짧으나마 한 마디씩은 모두 주고받았다. 평소 도심에서 좀 떨어진 산을 더 자주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산행 중 혹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잠시 서서 기다려 주면 '감사합니다' 또 내가 양보받을라 치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기 마련이다. 산행 중의 작은 배려와 양보는 상대방과 내 기분을 좋게 하는 미덕이다.


태화산 산정 아래 능선에서 까투리 만한 덩치의 생소한 모습의 새 한 마리가 빠른 걸음으로 산 아래쪽으로 달아난다. 저런 새가 정말로 이런 산에 깃들어 살까 하던 내 의구심을 비웃듯 머리에 앙증맞은 벼슬을 인 새 한 마리 도대체 너 누구냐!


백련암은 산정 바로 아래에서 방향을 틀어 이백 미터쯤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 길을 내려가기가 선 듯 내키지 않고 버겁기도 하지만 마음속 호기심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지척에 있는 암자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단다.


백련암 옆구리로 난 길로 내려서니 두어 평 남짓되어 보이는 작은 암자 방에서 보살 한 분이 벽지 바르기를 막 끝내고 방바닥에 종이 장판을 바르기 위해 뻑뻑하게 끓인 풀을 물에 섞고 있다. 산신각을 위쪽 바위 밑 암각으로 옮기면서 빈 암자를 요사채로 꾸미기로 했더란다. 암자 옆 대웅전은 낮고 아담하지만 옆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중앙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불상 셋이 인자하게 자리를 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암반 지붕을 한 산신각에는 호랑이 등에 걸터앉은 청동 산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앞에 놓인 툇마루에서는 '담연'이라는 법명의 비구 한 분이 발원 공양한 양초 더미에 발원 내용과 발원자들의 이름이 적힌 표지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붙이고 있다. 나도 발원의 마음을 양초 하나에 담아 공양하고 발길을 돌린다.


대웅전 아래 빈터에서 낯선 객을 반기는 건지 경계를 하는 건지 짖기를 멈추지 않는 백구 세 마리를 애써 외면하며 종각, 부도, 비석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백련암으로 내려갔던 길을 되돌아 태화산으로 오르는 길이 힘겹다. 크고 화려하다는 뜻의 태화산 그 정상 표지석은 이름에 걸맞게 애 키보다 큰 자연석에 새긴 한자 글씨가 아름답다. 잠시 휴식을 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이어 연지봉을 만나고 내리막에 이어 비탈길을 오르면 가파른 바위 벽을 한쪽 옆구리에 낀 '말 아가리산'이라는 의미의 마구산이 맞이한다.


정광산으로 오르는 막바지 비탈진 길에서는 체력이 고갈된 듯 기진맥진 힘들다. 딱따구리 한 쌍이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요란스러운 사랑 다툼을 벌이고 있어 목책에 기대어 서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덕분에 뻐근하던 다리도 좀 나아지고 숨도 고르게 돌아왔다.


노고봉과 정광산을 지나면 오른편 기슭으로 하얀 눈으로 덮인 곤지암 리조트가 눈에 들어온다. 스키 슬로프에 동화 속 겨울나라처럼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는 사람들 모습이 동심 가득하다. 그 광경을 쳐다보며 걷다가 지나쳐 놓쳐버린 반대편 용인외대 캠퍼스로 내려가는 길을 사선으로 치고 내려가 따라잡았다. 그 길은 인적이 드물었는지 베어 넘어진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거나 수북한 낙엽에 지워져 희미하다.


골짜기 옆으로 난 그 희미한 하산길은 용인외대 캠퍼스 뒤쪽 임도를 만나면서 끝이 났다. 방학기간인지 너르고 산뜻한 캠퍼스는 인적이 드물고 썰렁하다. 외대를 출발하여 광주 성남 모란을 거쳐 송파 잠실로 가는 1117번 직행버스는 승객들로 거의 만원이다.


모란에서 환승할 버스를 기다리며 포장마차에서 좋아하는 어묵 두어 개를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이매동 집 앞으로 지나는 116번 버스를 탔다. 마침 버스 라디오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등려군의 '첨밀밀' 노래가 맛깔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텐미미 니 샤오 더 텐미미 하오샹 화~ㄹ카이 자이 춘펑리...' 꿀처럼 달콤해요 당신 웃음은, 마치 봄바람에 피어난 꽃처럼~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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