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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24. 2020

꿩의 은혜와 보은 치악산

성남 시외터미널,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서 6:30분 발 원주행 버스에 올랐다. 신호등마다 걸려서 더디게 가던 버스는 도촌 갈마터널을 지나 광주로 들어서자 시원스럽게 달린다.


원주 터미널에서 택시로 원주역으로 향했다. 인구 35만 원주, 기억에 위치조차 어렴풋한 30여 년 전 군 생활을 했던 제1군수지원사령부는 곧 외곽으로 옮겨갈 예정이란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KTX가 임시운행을 비롯해서 파급효과를 예견하는 택시 기사분의 기대가 그대로 이뤄지면 좋겠다.

아담한 원주역은 사람 발길이 드문드문하다. 양쪽으로 서울 방향과 제천 영월 고한 태백 동해 정동진 방향의 승강장이 마주하는 플랫폼도 한적하긴 마찬가지다. 이곳 기차역은 여객수송의 역할을 버스터미널에 넘겨준 지 오랜듯 하다.

자그마한 키의 수도회 소속 여성 한 분과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태양을 등진 치악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하늘과 경계선을 긋고 있는 모습이 철길 너머 멀리 한눈에 들어온다.

H와 M이 탄 청량리발 무궁화호는 연착하여 8시 36분에 도착했다. 원주역에서 다섯 번째 역, 들판을 바라보며 산자락 아래 움막처럼 야트막하게 자리한 신림역은 외딴섬처럼 한적하다.


산행 들머리 상원골까지 택시를 탈 요량이었는데, 신림역 근처에는 택시나 버스가 없다. 콜택시 전화는 불통이다. 멀찍이 떨어진 도로로 나와 마냥 걷다가 히치하이킹을 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걸까? 신림면 소재지 병원으로 정기 진료차 노모를 모시고 가던 마음 씀씀이 좋은 분을 만났다.


강원 충청 경상 세 지역 어느 사투리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어기(어쩌다 기사), 그분 노모를 신림 삼거리에서 내려주고, 서로 너스레를 떨며 주포천을 따라 성남 1,2리 매표소를 지나 상원골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상원골 슈퍼는 찾는 담배가 없다. 'Esse 秀'를 좋아한다던 그분, 'Esse 라이트'에 만족했으면 좋겠다.


상원사까지는 3km 남짓. 동양화의 선경(仙景) 속으로 들어가듯 설레는 그 길은 푸른 산죽, 붉은 단풍, 원색 차림의 산행객이 어우러져 온통 컬러의 향연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 흐르던 물이 잠시 멈추는 소(沼)는 수면에 비친 단풍과 일찍이 떨어진 단풍으로 붉다.


여주 신륵사 주지님 인도 하에 불교모임 학우들과 함께 상원사에 하루 묵었다는 H의 기억은 흐릿한데, 계곡에서 비구 보살 세 분조우했던 기억만은 또렷이 각인되어 있는가 보다. 계곡 끼고 오르는 길 다람쥐 한쌍이 산객들의 시선엔 아랑곳없이 바위 위로 쫓고 쫓기며 사랑놀음을 하고 있다.


가파른 길은 얼굴을 위로 치켜들면 모자 창 끝으로 능선 위 높은 언덕에 위태하게 서있는 범종각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끝이 난다. 상원사, 치악산(雉岳山)의 '치(雉)'가 까치냐 꿩이냐에 대한 분분한 추측과 논란도 상원사에 도착하면서 말끔히 정리되었다.


남대봉 아래 절벽을 낀 능선 마루에 우뚝 자리한 상원사는 우리나라 최고 높이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가 넓고 아늑하다. 신라 때 창건되어 6.25로 전소된 것을 1968년 중건했더란다. 일주문 대웅전 관음전 심검당 범종각 요사채 동서 석탑 등 제법 규모가 크다.


대웅전 마당 앞엔 석탑 둘이 널찍이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동탑 옆에 배, 사지, 그리고 낯짝까지 땅바닥에 붙인 채 누운 백구는 산객들이 옆을 지나가도 눈꺼풀을 찡긋하며 눈동자만 돌릴 뿐 꿈쩍을 않는다. 달관인지 게을음인지 무관심인지 태평스럽다.


심검당 측면에 걸려있는 양각 목판에는 구렁이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구해준 선비에게 은혜를 갚은 꿩에 관한 전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은혜는 구하는 것이 아니요 베풀면 자연히 돌아오는 것이라는 교훈과 함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처럼 은혜와 보은에 대한 말씀에는 동서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 어떤 은혜를 베풀까 또 받은 은혜는 어떻게 갚을까를 먼저 헤아려 봐야겠다. 상원사 범종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은혜를 갚은 꿩처럼.


상원사에서 한 구비 돌아 주 능선에 올라서니 길은 평탄하고 바람이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내 탄성에 산길 옆 숲을 향해 몸속 물을 뿌린 M도 같은 말로 화답한다.


해발 1,181미터 남대봉을 지나고 능선을 따라 우뚝 우뚝 솟은 거친 암봉을 좌우로 비켜 우회하며 나아갔다. 향로봉 아래 쉼터에서 먼저 쉬고 있던 어떤 분이 쉬어가라 권한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계약직 산행 도우미라는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분과 얘기를 나누며 점심을 들었다.


방전되어가는 몸을 이끌고 1,043미터 향로봉을 지나고 긴 능선을 따라 고도를 높여가는 6km 거리의 비로봉으로 향한다. 중간중간 뒤돌아보면 지나온 능선이 비늘이 박힌 공룡의 등 마냥 길게 누워있다.


곧은재를 지나 내리막, 나무계단 작업이 한창인데, 그 가파른 길 기름 먹인 받침 나무를 지고 오르는 지게꾼이 힘겨워 보인다. 산행의 막바지 눈 위로 앙증스러운 뿔 두 개를 머리에 인 비로봉 모습이 내리막 저편 높이 피라미드처럼 우뚝하다. 오르다 쉬다를 반복하며 계단을 오르면 높은 돌을 쌓아 올린 두 개의 탑 사이에 해발 1288미터를 알리는 가슴 높이 정상 표지석이 산객을 반긴다.


하산을 보채는 H를 붙잡고 탑 둘레를 돌며 멀리 산 아래쪽도 둘러보며 산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조금 더 음미했다. 네 시경, 국립공단 안내원이 산객들에게 하산을 채근한다. 정상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짧고 아쉬울 따름이다.


사다리병창이 끝날 때까지 수직 빌딩의 회전 계단을 내려가는 듯 곳곳에 '추락주의' 표지판이 있는 하산 길은 가파르고 난간 옆 절벽은 아찔하다. 치악(雉岳)의 악(岳)에 의문의 여지가 없겠다 싶다.


세렴폭포를 지나 어스름 녘에 내려선 구룡사,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물든 산사 고루에서는 때마침 법고가 울린다. 법고의 두드림에 이어 맑고 정명한 범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산사를 나서는 산객은 온몸과 마음을 뒤흔들며 깊이 파고드는 법고와 범종 소리를 대책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알 수 없이 밀려드는 행복감이 피곤함을 밀쳐내면서...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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