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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21. 2020

민둥산 억새꽃 물결 속으로

민둥산 가을 산행

바야흐로 10월이요 네 계절 중 가장 눈부신 가을이다. 기온이 내린 탓인지 사람들 옷차림이 제법 두터워졌다. 청량리역에서 산행 친구 세 분과 만나 며칠 전에 매진되었다는 중앙선 7:00발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운길산역을 지나 한강 위 철교를 지날 때 차창 밖에는 비 온 후 웃자란 고사리 마냥 안개가 수면에서 피어오르다 말고 멈춰 서있다. 안개도시 양평은 농무에 묻혀 아직 주말 아침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차창 밖 눈썹 위 높이로 떠오른 태양은 안개에 가려 낮달처럼 말갛다.

기차는 시와 도의 경계를 넘으며 안갯속을 헤치고 달린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던 야스나리의 설국으로 들어가는 기차처럼.

마음은 벌써 민둥산역에 내려 하얀 억새꽃 밭으로 오르고 있다.

앞좌석 등받이 너머로 빼꼼히 내민 젊은 여성 머리의 분홍색 헤어롤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외모를 꾸미는 화장을 혼자만의 공간에서 은밀히 하던 일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 버렸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눈썹 화장을 하고 파운데이션 패드를 두드리는 등 여성의 몸치장은 때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 시대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기차는 막걸리가 유명한 지평을 지나고 일신 양동 삼산 등 자그마한 역마다 짧은 정차와 출발을 반복한다. 군 복무 시절 강릉역을 출발해서 다음 날 청량리에 도착했던 야간열차는 모든 역마다 정차하는 비둘기호였다. 그 비둘기호는 통일호와 함께 십여 년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M이 준비한 삶은 땅콩은 맛도 달콤했지만 옛 기차여행의 기억을 추억하게 하는 즐거움도 주었다. 제천역에서 일단의 등산복 차림 승객들이 몰려 탔다. 영월로 들어서자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가 차창 멀리 스쳐간다. 가파른 산기슭에 옹기종기 들어선 손바닥 만한 고구마밭 깨밭 고추밭도 스쳐 지난다.

청량리에서 제천까지 중앙선 철로를 달리던 기차는 제천에서 분기하여 단선 태백선으로 옮겨 탄다. 마주오는 열차를 비켜주려고 잠시 정차한 자미원 역은 해발 600미터가 넘는 고지대다.


세 시간 반 만에 민둥산역에 도착한 기차는 색색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을 플랫폼에 내려놓고 다음 역으로 출발했다. 민둥산역은 1966년 개소된 무연탄 수송의 중심역이던 '증산역'을 정선군 남면 주민 1,130여 명의 뜻을 모아 2009년 9월 개명한 것이란다.

우리 일행은 기차역에서 동네로 난 높은 계단을 내려와 택시를 잡아탔다. 민둥산과 지억산을 왼쪽에 끼고 난 민둥산로와 절벽과 어천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소금강로를 거쳐 십오여 킬로미터 거리의 화암약수터로 갔다. 사람들로 붐비는 코스를 피해 경사가 완만한 반대쪽 능선을 들머리로 택한 H의 기획이 산행 내내 돋보였다.

1910년에 발견되었다는 화암약수는 탄산이온 철분 칼슘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위장병 피부병 빈혈 안질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정자 안 약수터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약수는 톡 쏘는 맛이 탄산수를 마시는 듯했다.

계곡을 따라 불암사를 지나 지억산과 민둥산 들머리로 들어서서 포장도로와 임도를 따라 오른다. 능선길은 서로 어우러져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와 벌들이 한창 잔치를 벌이고 있고 꽃 향기는 코를 간지럽힌다. 꽃은 제각기 자기만의 색깔로 더욱 진하고 선명하다.

고사리 농원 푯말을 지나고 임도와 능선길을 차례로 지난다. 임도 위아래 능선에는 조림을 한 듯 나엽 송이 높고 곧게 하늘로 쭉쭉 뻗었다. 해발 1,000미터에 달하는 지억산 줄기 능선으로 들어서자 우리와 반대편에서 올라와 하산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난다. 능선 숲에 자리를 펴고 각기 준비해온 사과대추 꼬마 토마토 포도 김밥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지억산 능선의 호젓한 등산로가 임도와 서로 만날 듯 가까워지는 곳에 지억산과 민둥산 갈림길이 있다. 지척인 해발 1,117미터 지억산을 지나쳐 2.2km 거리의 민둥산으로 향한다.

이 산 곳곳에 산재한다는 석회암이 녹으면서 땅이 꺼져 움푹하게 들어간 돌리네 지형을 산행 중에 두어 곳을 스쳐 지났다. 정상 1.2km를 남기고 억새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햇빛이 쏟아져 넘어오는 계단을 올라 능선 위로 올라서면 정상까지 이어진 너른 능선을 따라 참억새밭의 장관이 펼쳐져 있다. 능선마다 등산로를 따라 사람들이 억새밭과 어우러져 추억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해발 1,119미터 민둥산.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을 부르는 일반명사인 민둥산이 이곳 정선에서 고유명사가 되었다. 산정에서는 사방이 장쾌하게 조망되고 그 정상 표지석 부근에는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다.

태양빛이 투과되면서 산란되어 새의 속 깃털처럼 반짝이는 억새꽃의 모습이 아름답다. 태양을 등지고 보는 억새는 빗자루처럼 거칠고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태양을 마주 보는 방향에서 감상하는 게 제격인 듯싶다. 산행코스를 잡은 H에게 한 번 더 '엄지 척'이다.


증산초교 쪽으로의 하산길은 중간 휴식처 매점에서 막걸리 한 잔 걸친 시간을 포함해서 민둥산역까지 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 길은 짧지만 가팔라 '산행'이 아니라 '억새 구경'을 온 듯 손을 잡고 오르는 연인이나 가족들의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 안쓰럽고 한편 대견하다.

사북과 석항을 연결하는 38번 국도가 민둥산로와 교차하는 지점의 날머리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20여 분 만에 민둥산역에 도착했다. 역사 안팎에는 산행이나 억새꽃 구경을 마치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청마는 1954년 6.25로 황폐화된 산을 바라보며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 나무를 심자'라고 노래했다. 이곳 정선의 민둥산이 '메아리가 살 수 없어 떠나버린 벌거벗은 붉은 산'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덜컹거리며 어둠을 뚫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동요 '메아리'를 조용히 흥얼거려본다.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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