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인산 Sep 16. 2020

추석, 축령산과 서리산

Man in Love with Mountain

추석 연휴다. 이번 보름달은 다른 해 보다 유난히 더 밝아 보였다. 이른 아침 서쪽 청계산 능선 아래로 잠기려는 보름달이 인사를 한다. 긴 연휴가 여유로워 배낭을 챙겨 들고 남양주와 가평의 경계를 이루는 축령산을 향해 집을 나섰다.


평소 교통량이 많은 외곽순환도로와 경춘고속도로는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소통이 원활하다.

얼리버드가 먹이를 쉽게 찾듯 부지런함은 시간을 여유롭고 넉넉하게 한다. 


동쪽에 길게 뻗은 검은 산줄기가 하늘과 또렷한 경계를 긋고 있다. 화도 IC로 내려서니 읍내는 아직 어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수동면에 들어서니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천마 철마 주금 서리 축령 운두 등 7~8백 여 미터의 산에 둘러싸인 수동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구운천은 주변 산에서 제각기 발원한 지둔천 외방천 가곡천 등을 끌어안고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좋아 삼림욕장과 야영장 등을 갖춘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된 축령산과 그 이웃 서리산 산행은 통상 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된다. 7시가 되기 전 이른 시각 매표소를 들어서자마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서리산과 축령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축령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숲 속 공기가 차고 신선하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아름드리 잣나무 숲 사이 야영데크의 야영객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산행 초입 잣나무 아래 산길에 부지런한 청설모 한 마리가 바닥에 떨어진 잣송이 하나를 들고 씨름하고 있다. 맛있는 먹이를 두고 길을 내어줄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엽다. 갑작스레 나타나 아침식사를 방해하는 산객이 성가신가 보다.

능선에 올라서니 노랑 빨강 보라 등 색색 산악회 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길을 알려준다. 올라온 능선 반대편 오른쪽은 절벽처럼 가파르다. 능선 너머 멀리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닭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앞쪽 멀리 봉우리 뒤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눈부시다. 산자락 가까이 조림이 잘 된 잣나무 편백 나무 숲과는 달리 능선 가까이는 소나무 참나무 등이 자연스레 섞인 혼효림이다.

"숲은 모름지기 혼효림(混淆林)이라야 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격의 없이 모여 서 있을 때,

비로소 우수한 숲의 사회상을 보여 준다."


수필가 목성균은 참나무와 소나무 75:25 비율이 우수한 숲의 전형이라 했다. 그의 잣대로 볼 때 축령산은 이상적인 혼효림으로 보인다.

독수리 머리를 닮았다는 수리바위 쪽에서 유쾌한 웃음과 함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산새들 노래처럼 들려온다. 청설모보다 더 부지런한 산객들이 있었나 보다. 몸에 조금씩 배어 나오는 땀은 금세 산들바람에 씻겨 날아갔다. 무더위가 물러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맘때가 산행의 최적기이다. 이제 곧 단풍 소식도 날아들 것이다.

머리와 날개 모양을 갖춘 바위의 오른쪽 날개 부분에 매달린 밧줄을 타고 올랐다. 정작 수리바위는 그 위 100미터 지점에 나타났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옹기종기 들어선 전원주택들이 마치 알프스의 어느 마을을 보는 듯 아름답다. 가평 쪽 산맥들 사이 계곡들은 구름에 덮여 너른 바다를 이루고 있다.

수리 바위 위에 케이스에 든 선글라스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사랑이건 노름이건 그 무엇엔가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데, 필경 앞서 간 산객 중 하나가 이곳에서 내려다 뵈는 장관에 빠져 깜빡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정상까지 절벽처럼 깎아지른 사면을 우측에 끼고 오르는 능선길, 정작 수리들은 보이지 않고 까마귀들만 제 세상인 듯 신이 나서 까악 까-악 소리 지르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거북 머리 모양 바위 등 곳곳에 눈길을 끄는 바위들이 나타나는 암릉 구간을 한참 지난다. 그중 천 길 허공으로 툭 삐쳐 나온 바위가 일품인데, 그 위에 올라서면 오금이 찌릿찌릿 저려오고 멀리 왼편으로 서울 잠실 방면이 한눈에 들어오고 천마산 철마산 능선 너머로는 북한산 줄기가 또렷하다.


정상 가는 능선 한가운데 우뚝 솟아 턱 버티고 선 바위, 남이장군이 무예를 수련했다는 남이바위를 비껴 지났다. 크게 힘든 구간 없이 쉬엄쉬엄 산책하듯 오르다 보니 해발 886미터 축령산(祝靈山) 정상에 닿았다. 고려말 이성계가 이 곳에서 산신께 제를 올리고 나서야 멧돼지를 여러 마리 사냥할 수 있었다던 축령산, 산길 여기저기가 헤집어져 있는 것을 보니 옛 전설대로 아직도 멧돼지가 많은가 보다.

경기광주 청주 등에서 모인 세 중장년의 형제자매 부부 가족과 6살 아이 하나, 추석을 휴양림에 모여 보냈다는 이들이 수리바위 쪽에서 들려오던 유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주워 챙겨 온 선글라스를 받아 든 주인이 고맙다며 어제 주워 삶았다는 엄지 마디만 한 밤을 한 줌 내민다.


저 가족도 나처럼 고향은 있지만 찾아갈 사람이 없는 '명절 실향민'인지도 모른다.

정상을 뒤로하고 서리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축령산과 서리산 능선이 만나는 절고개까지 내리막이 이어졌다. 고개 부근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었고 밤새 무성한 풀잎에 맺힌 이슬은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축령산과 달리 서리산은 수풀이 빽빽이 우거졌다. 억새가 시나브로 다가오는 만추를 고대하며 하늘거리고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끊이질 않는데 꽃에 취해 걷는 평탄한 능선길이 한참 계속된다.


여느 산의 막바지 정상 구간처럼 서리산도 정상으로 치고 오르는 길이 힘겹지만 클라이맥스의 짜릿함이 있다.


평탄하고 너른 해발 832미터 정상, 서리산은 서리가 내려도 잘 녹지 않아 늘 서리에 덮여 있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상산(霜山)으로도 불린단다.

서리산 정상에서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능선은 화채봉까지 머리를 덮는 철쭉나무가 무성한 터널길이다. 봄이면 능선 일대가 연분홍 철쭉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밑동에서 예닐곱 갈래로 뻗쳐오른 소나무가 바위틈에 버티고 선 화채봉에서는 산행로가 없다. 그 직전에 휴양림 쪽으로 난 길이 정상적인 코스인데, 주 능선을 온전히 타고 싶기도 했지만 '질마재'라는 낯익은 지명에 끌려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발아래 흘러내리는 길 아닌 흙길을 나뭇가지와 줄기를 잡으며 스틱에 의지해서 미끄러지듯 급전직하로 내려간다. 산짐승들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길 중간중간 자신의 영역을 표시해 놓았다.

급한 내리막은 고개의 흔적조차 뚜렷하지 않은 질마재로 잦아들며 끝이 난다.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해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인 '질마'처럼 생긴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 '질마재'. 소금장수나 어물 장수 등 장사치들과 부근 주민들이 무거운 지게나 봇짐을 지고 힘겹게 질마재 고개를 넘나들었을 터이다.

시집 '질마재 신화'를 낸 미당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그의 고향 질마재를 시로 그려냈다.

진천 공주 여주 원주 문경 양평 충주 괴산 부여 봉화 진안 청주 보은 옥천...

미당의 고향 고창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질마재'라는 지명을 찾을 수 있다.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 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 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질마재의 노래, 미당 서정주>



질마재에서 내려서면 임도로 잘 닦인 다산길과 만난다. 해발 400미터 임도 위아래 쪽으로 침엽수림이 쭉쭉 잘 자랐다. 풀벌레들은 여전히 숲의 빈 공간을 가득 메우며 귀가 시리도록 쩌렁쩌렁한 생음악을 산행 내내 들려준다.

임도 벗어나 휴양림으로 내리 뻗은 능선으로 들어섰다.


비탈에 선 야생 밤나무는 토실한 알밤을 수북이 떨궈 놓았다. 외방천으로 흘러드는 가는 계곡을 끼고 휴양림 입구 아래 외방리 마을로 내려섰다. 갓 정오가 지난 시각 높고 푸른 하늘엔 조각구름이 한가롭고 마을 길가엔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춘다.

호텔캘리포니아 댄싱퀸 예스터데이 탑오브더월드 렛미비데어 우먼인러브...


FM2 라디오에서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에 선정된 곡들이 연이어 흘러나온다.

올드 팝송이 좋은 것은 필시 나도 올드보이가 되어간다는 얘기겠지.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절로 산으로 향하는 마음처럼...

18-09

매거진의 이전글 오월의 달밤 문학산을 걷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