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의 <創造的 進化>를 읽고
@photo: 루카스 크라나프의 <아담과 이브>
“太初에 하나님이 天地를 創造하시니라 ...” 舊約聖書 창세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하여 絶對神인 하나님이 6日 間에 걸쳐서 宇宙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천지란 宇宙萬物을 지칭하고 太初란 우주의 처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즉 基督敎에 있어서는 聖書에서 말하는 우주란 절대자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전지전능의 존재- 인 하나님이 만든 皮造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宇宙의 歷史를 보면 -지구의 역사만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발생하기 이전 시대에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生命體들이 존재하다가 滅種했고 또 새로이 生겨나곤 했음이 科學的 탐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人間의 歷史를 돌이켜 보더라도, 인간은 유사 이전의 先史時代로부터 부단히 知的 활동을 계속해 왔고, 그것을 점진적으로 확장해 왔으며, 이를 통해 生活領域을 넓히고 향상시켜 온 것이다.
실로 인간의 역사는 思考영역의 확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原始的 動物의 상태에서 부터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며, 言語로 서로의 意思를 소통하고 文字로써 정신적 유산을 기록하여, 技術과 知識을 축적했으며 드디어는 만물의 靈長임을 자처하는 지위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人間歷史의 과학적 고찰에 바탕하여 인간은 정신적.육체적 進化의 산물이며, 世上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현존하는 實在 또한 進化의 結果라는 과학적 주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처럼 創造論이 宗敎的 배경을 짙게 내포하고 있음에 반하여, 進化論은 神과 倫理的 관념 -인간의 精神과 生活을 억압하는 의미로서의 倫理 - 에서 벗어나서 보다 合理的인 인간 理性에 바탕한 과학적 고찰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創造와 進化는 별개의 개념이며 서로 調和될 수 없는 것인가? 또 兩 說이 시사하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랜 옛날부터 人間은 그가 속해있는 宇宙와 그 속의 萬物의 本質에대해서 궁금증을 갖고 그것을 밝히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古代 그리스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하여 物質의 本質에 관한 탐구가 행해졌고, 오늘날에는 물질의 근본 구성요소인 原子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서 모든 物質을 형성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물질의 문제뿐 아니라, 인간은 살아서 生命을 향유하는 生命體의 本質에 관한 의문 또한 점증하여, 그에 대한 論亂과 硏究가 적지 않게 진행되었고 오늘날에도 진행 중에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生命現狀이 無生物에서 일어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生氣論과 그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機械論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科學이 神學의 시녀로서 기능하던 基督敎 지배시대에 있어서는 物質과 時間이 모두 神의 天地創造 이후부터 존재한다고 주장되기도 했다.
또한 東洋에서는 우주를 陰陽之氣로 꽉 차있는 하나의 有機體로서 파악하여 인간을 自然의 一部라고 보았다. 즉 자연현상의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動因을‘氣’라고 하며 그러한 자연현상이 있는 까닭을 ‘理’라고 하는 理氣說이 그것이다. 기실 太初의 生命發生에 대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개념은 너무나 막연한 것일 수 밖에 없다. 創造란 無에서 有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進化란 어떤 先在의 것을 전제로 하여 그 형상이나 기능 등이 그가 속한 자연에 적응하기에 보다 적합한 것으로 發展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創造나 進化는 일정 시점에서 단편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連續的이며 不斷하게 진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 神이란 것도 이와 같이 정의되면, 무엇 한 가지 創造한 것이 없고 不斷한 生命이며 行動이고 自由인 것이다...” 라는 말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物的 精神的 형상들은 神이나 絶對者에 의해 애당초에 결정되어진 것이 아니며, 自由意志나 生命의 本能에 따라서 부단히 變化 發展한 결과로서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창조와 진화는 생명의 기원과 그 변화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상호 對立하는 것이 아니라 發生과 成長 - 이를테면 닭과 달걀 - 의 관계가 아닐까한다. 그런 의미에서 “行動은 前進하면서 成長하며 進前됨에 따라 創造해 가는 것으로서...”라는 베르그송의 견해는 人間과 宇宙 속의 모든 생명체의 본질에 대한 적절한 고찰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進化는 前進運動 만을 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경우도 많으며 脫線이나 뒷걸음질 치는 경우가 더욱 많다는 것이다. 이는 다윈(1809 - 1882)이 주창한 진화론에서의 適者生存의 法則이나 自然淘汰의 原理와도 상통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生命은 行動을 통해서 前進 成長하고 進展됨에 따라 創造해 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進化와 創造는 상호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위에서 설명했다. 그러면 베르그송은 왜 ‘進化的 創造’가 아닌 ‘創造的 進化’라는 말로써 상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을까 ? 이것은‘창조적 진화’란 진화의 獨創性 또는 最初性으로 인해 변화 이후의 모습에서는 그 이전의 殘在를 좀체로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의 轉化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반면,’進化的 創造‘란 말은 창조가 진화라는 개념을 포함할 수 있음에 반해 그 逆은 성립할 수 없음으로 인해 의미상의 誤謬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創造性이 결여된 창조 - 진화적 창조 - 란 이미 창조가 아니라 進化 그 자체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基督敎的 創造 - 우주생성의 太初의 창조라는 개념 -와 유사한 창조개념을 전제로, 宇宙의 歷史를 創造의 連續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여하튼 우주의 지속은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創造의 넓이와 한가지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倫理的 神學과 결별하고 經驗的 事實主義에 입각한 科學의 사상을 새로이 神學的 道德性과 結合시키려는 시도가 아닌가 한다. 즉 모든 생명체는 創造의 要求를 의미하는 生命의 衝力을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世界創造는 자유로운 行爲이며, 生命도 物質世界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러한 자유를 갖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을 人間에게 유추할 때, 인간의 意識은 創造의 要求를 의미하게 되며, 그 의식이 자기원리에 合致되기 위해서는 ‘完成된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完成되어 가는 것’에 接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이것은 神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人間을 創造했고, 따라서 인간은 神의 完全함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基督敎의 敎理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이것은 理想 - 이데아 -를 전제하고 그것을 向해 부단히 前進하는 - 또는 그 반대로 무한히 墮落할 수도 있는 - 人間精神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完全함을 향해 전진하는 過程으로서의 創造라고 하겠다.
創造와 進化에 대해서는 인간이 宇宙의 生成과 그 變化 發展 및 生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의문시 되어 왔으며, 지금껏 그 秘密에 대한 완전한 解答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창조와 진화는 古代의 哲學者들에 의해 상호 긴밀한 관계하에서 연구되었고, 基督敎의 영향으로 창조론이 지배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科學이 神學의 그늘에서 벗어나면서 進化論의 타당성이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즉 創造란 神學의 범주로, 진화는 科學의 범주로 간주되어 상호 無關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창조를 부단히 連續하는 것으로 보아 自由意志에 의거한 創造의 要求로서 파악한다.
創造가 完成된 것을 의미한다면, 進化는 未完成의 것으로서 완성을 향해 부단히 계속되는 過程을 뜻한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辨證法에 있어서의‘正(創造) - 反(進化) - 合(새로운 創造)’의 사상과도 통하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停止하고 있는 대상이 아닌 부단하게 變化 發展 - 또는 退步 - 하는 대상으로서의 우주만물을 바라보는 태도라 하겠다.
“哲學이란 生成一般의 完全한 규명이고 참다운 進化論이다”고 하는 그의 말은 부단히 自由로이 行動하는 생명에 있어‘創造’와 ‘進化’의 調和點을 찾고자 하는 고뇌와 타협해 보려은 미완의 해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1989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