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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Oct 16. 2020

독감과 동백

금요일 오후 한 주간의 고된 역정의 끝은 부산역으로 가는 걸음이다. 부산발 수서행 SRT,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신세를 져야 할 고마운 고속철도다. 울산 신경주 동대구 대전을 지나면서 비어있던 좌석이 하나둘 채워지며 빈자리 없이 만원이다.

들쭉날쭉한 날씨 탓인지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들 대부분이 중년들인데 그 소리는 목구멍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듯 무겁고 둔탁하다. '인생 쓴 맛도 많이 보았는데 너쯤이야'라는 듯 배에 힘을 주고 완고히 맞서 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외지로 발령이 나서 집 떠나 마음을 다독일 틈도 없이 육신이 또 신고식을 치루나 보다. 그저께 비 오는 날 과회식 때 술기운에 나쁜 냉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었을까. 사무실 근처 내과에서 몸살감기에 인후염 약을 처방받았다.

처방대로 이틀간 약을 복용했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약골 체질이라 감기는 매년 한 두 번씩 찾아오는 손님인데 나이가 먹을수록 그 녀석이 내 몸을 아예 제 집처럼 드나들며 한번 오면 몇 날 칠을 눌러앉아 버티기 일쑤다.

비몽사몽 고속철도에서 내려 집에 도착해서 서둘러 저녁과 약을 먹고 누웠다. 밤새도록 우후죽순처럼 몸 여기저기서 난리를 치는 통증으로 전전반측이다. 결국 다음날 아침 동네병원에 달려가서 재차 검진을 받았다. 평생 처음으로 받아 든 '독감' 확진이다. 주사 두 방을 맞고 약국에서 독감 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약을 삼키고 자리에 누웠다. 부산 내과 다녀오던 길 중앙동 노변에 꽃망울을 틔운 동백이 떠올랐다. 대한 추위에 아랑곳없이 꽃을 피워낸 동백이 잔뜩 움츠린 행인들에게 곧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스마트폰에서 조영남의 노래 <모란동백>을 찾아서 틀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히 외로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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