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 도착 후 2주일 간의 격리를 마친 지도 두 주일이 지났다. 러우샨관(娄山关) 역에서 전철 2호선을 타고 런민광장역에서 8호선으로 갈아탔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상하이 시내 땅 밑은 온통 지하철 망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엉켜 있다. 윤봉길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 옛 홍커우(虹口)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1988년 루쉰 공원으로 이름을 바꾼 공원은 홍커우 축구경기장역 1번 출구 쪽이다. 남서쪽 앵화림에 조성된 유아 놀이터의 만개한 벚꽃,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 지켜보는 어른들이 어우러진 모습에서 코로나 19의 잔영은 찾아볼 수 없다.
공원의 남쪽 정문의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푸쉬킨 단테 위고 고르키 셰익스피어 디킨스 발작 톨스토이 등 대문호들의 동상이 널찍한 거리를 두고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세계 문호 광장이 맞이 한다.
일제 치하 조선을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 빛나던 동방의 등불의 하나 코리아"라고 노래했던 인도 시인 타고르의 동상을 지나면 루쉰 기념관이다.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기념관 앞 정원의 루쉰 동상을 멀찍이 물러선 벚꽃 울타리가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다. QR 건강코드를 확인하고 엑스레이 검색대를 지나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의자에 앉은 루쉰이 관람객을 맞아준다. '옛 우한(武汉) 시민 생활전'이 열리고 있는 1층 전시실 들어서니 19~20세기 초 우한 지역 역사와 관련된 사진과 생활용구 등이 전시되고 있다. 젊은 엄마가 여섯 살이라는 아이에게 유리 덮개 속 유물들을 하나씩 차례로 짚어가며 설명을 한 후에 질문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2층은 루쉰의 친필 원고, 문헌 사진, 유물 등 20만여 점을 소장한 생애 진열관으로 그의 출생, 성장, 사망, 문학, 사상, 출판물 등 노신의 일생을 사진, 친필 원고와 서신 등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시실 출구 양쪽 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금까지 발간된 루쉰의 단행본 책자 수백 권이 중국인들의 루쉰에 대한 자부와 사랑을 짐작케 해준다.
저장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난 루쉰(鲁迅, 1881-1936)은 1927년 10월 광저우로부터 상하이로 왔고 여러 차례 이 공원을 찾았다고 한다.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오래전에 애매한 제목 애매한 내용의 소설 <아Q정전(阿Q正傳)>과 씨름했던 어렴풋한 옛 기억에 비추어 보면 "루쉰의 소설은 재미없다."라고 한 루쉰 문학 번역 연구가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의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루쉰이 이처럼 중국인들로부터 위대한 문학가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그의 문학과 사상에는 모든 허위를 거부하는 정신과 언어의 공전(空轉)이 없고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라는 평가처럼, 패배와 좌절도 대책 없는 체념과 자기 합리화로 얼버무리는 '아 Q'라는 인물을 통해 과거 중국 하층민의 우매함과 무지함을 폭로하고 무기력한 중국인들의 자아를 여과 없이 들여다보게 한 루쉰의 업적은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는 단지 위대한 문학인일 뿐 아니라 또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라는 마오쩌둥의 말도 함께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싶다.
기념관을 나서니 다행히 빗방울은 그쳤고 앵화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경쾌하다. 사람들로 붐비는 매점 옆 회랑 아래에서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카드놀이에 빠져있고, 벤치 한편에서는 두 노인이 얼후(二胡)와 피리를 늘어놓고 앉아 있다. 노인에게 청하니 피리 한 곡조를 들려준다.
모여드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기니 '梅园 윤봉길 기념관'이라 한문과 한글 글귀로 적힌 이정표가 눈에 띄어 반갑기 그지없다. 여러 관광지에서 중문, 영어와 함께 일본어가 적힌 안내문은 많았지만 한글 안내문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매원으로 가는 도중에 '중일 청년세대 우호 中日青年世代友好'라 적힌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1984.9.1일 세운 기념비 앞뒷면의 벽시계가 각각 12시 40분과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맺힌 원한과 풀지 못한 갈등의 간극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연못 위에 놓인 아치형 돌다리를 건넜다. 매표소와 그 옆 입구에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이란 한글과 한자 세로글씨가 눈에 띈다. 매원(梅园)은 공원 안에 따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곳과 달리 15위엔의 입장료를 받는 것도 특이하다.
얕은 둔덕 위로 난 계단을 오르면 마당 한편에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의거 전후 행적을 기록한 안내판들이 나란히 서있다. 그 뒤에 '매헌(梅軒)'이라는 현판이 걸린 자그마한 홍적색 2층 건물이 기념관이다. 정면에 자리한 흉상 뒤 벽면에"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고 적힌 글귀가 그의 웅지와 확고한 의지를 웅변하고 있다. 흉상 앞에 주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와 상해 조선족 여성협회 리본이 달린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다.
기념관 뒤쪽에 난 계단으로 오르는 2층은 영상실로 윤 의사의 일생과 의거 등 전 생애를 한자 자막과 함께 10여 분 길이의 짧은 우리말 영상으로 들려준다. 젊은 중국인 어머니가 어린아이와 함께 나란히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영상을 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기고만장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오금을 저리게 한 또렷한 족적을 새기고 25세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강렬하게 살다 간 영웅의 삶 앞에 찔끔 눈물이 고인다.
산책로엔 진녹색 잎사귀 위로 얼굴을 내민 붉은 동백꽃은 새색씨처럼 곱고, 매원(梅园)의 연초록 화초, 노랑 순백 진홍 보랏빛 꽃들, 연못으로 가지를 드리운 벚나무에 만개한 벚꽃은 화사하고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맑고 경쾌하다. 매헌 뒤 온갖 꽃나무, 분재, 나비, 새들이 어우러진 작은 동산과 너른 정원은 울타리 바깥 인파로 북적이는 공원과는 딴 세상처럼 호젓하기 그지없다. 봄날 극치의 한 때를 이곳에 옮겨 놓은 듯하다.
분재원을 거니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내 주위를 맴돌다 날아간다. 회색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하게 화초 잎을 입으로 물어뜯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경운정(景云亭) 아래 연못가 산책로의 누런 빛깔 줄기에 푸른 잎 대나무가 이채롭다. 연못 위 다리를 건너면 울창한 수목 사이에 자리한 적막한 삼미서옥(三味书屋) 앞마당에서 백발의 노 화가가 건물 앞 돌사자 상을 캔버스 화폭에 옮겨 담고 있다.
매원 안 연못 가에 자리한 수리 중인 다관(茶馆)은 매표소를 세우고 입장료를 받는 공원 관리당국을 원망할지 모르겠만,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매헌이 이처럼 연못 정자 다리 다실 정원 분재원 등이 어우러진 넓고 고즈넉한 '공원 안의 공원'에 자리한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원에서 공원으로 나오니상춘객들로 북적이는 산책로, 벤치들을 채운 사람들, 배드민턴을 치거나 간이 체육시설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 빙 둘러서서 아코디언 북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합창을 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 등 각양각색 만개한 봄꽃처럼 다채롭지만 자연 스레 어우러진 모습이 오히려 이채롭게 느껴진다.
주치짠(朱屺瞻)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만 예술박물관 목조 예술전'의 대만 목공예가 오욱정(吳煜正)의 신기에 가까운 작품들을 둘러보고, 홍커우 축구장이 있는 공원 서편에 위치한 루쉰의 묘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묘는 서거 20주기 때인 1956년 만국공묘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저장성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지만 상하이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머물렀다는 루쉰이 이곳에서 영면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루쉰의 묘역은 소주 금산(金山)의 화강석을 사용해서 1600㎡ 규모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앞쪽 장방형 녹지 중앙에 루쉰 좌상이 자리하고, 그 뒤 허리 높이 너른 기단 위로 오르면 아름드리 광옥란(廣玉蘭, Magnolia grandiflora) 두 그루가 묘역 앞 좌우에 가지를 어깨 높이로 한껏 드리우고 서있다. 루쉰은 모택동이 썼다는 '鲁迅先生之墓'라는 담장 묘비명 아래 잠들어 있다.
이국 강남 땅에서 한국과 중국의 두 위대한 인물의 삶을 돌아보고, 더불어 봄날 붉은 동백과 연분홍 벚꽃이 이토록 눈부시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으며 공원의 남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