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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시시포스 Apr 11. 2021

수향 우쩐(水鄕 烏鎭)

고대 강남의 수향 속으로

출발
항쟈후(杭嘉湖) 평원에 위치한 우쩐(烏鎭)은 A5급 국가 풍경구로 강남의 대표적인 수향(水)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상하이 전철 15호선 야오홍루(姚虹路) 역에서 난짠(南站) 역으로 향했다. 고속열차(高)를 이용했던 저번 쑤저우 출행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시외버스로 가 보기로 했다. 통샹(桐)에 딸린 우쩐은 통썅 기차역보다는 우쩐 버스터미널에서 더 가깝기 때문이다.

후쑤항(沪杭) 즉 상하이 소주 항주의 중심에 위치한 통썅(桐)은 저쟝성 쟈싱시(嘉市) 아래 현급 시(縣級市)로 징항 운하(京杭运河)가 지나고 양잠과 비단을 특산으로 하여 어미지향(鱼米之) 또는 사조지부(丝绸之府)로 불린다.

상하이에 와서 원거리 버스를 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새로운 것은 늘 부딪혀 배워야만 체득하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이다. 지하철 1,3,15호선이 교차하는 난짠 지하보도는 하나의 거대한 지하도시다. 인파로 넘치던 홍치아오(虹桥) 기치 역을 떠올리며 도착한 상하이 남부 버스터미널(长途客运南站)은 의외로 규모가 크지 않다.

터미널 홀로 들어서니 높은 유리 천정에 매표구와 무인 발권기가 각각 네댓 개씩 있고 크게 붐비지도 않아 마음이 푸근해지고 앞으로 자주 이용하고픈 마음도 든다. 짧은 줄 뒤에 서서 30여 분 후에 출발하는 우쩐(乌镇)행 차표를 55위엔에 끊었다. 상하이에서 우쩐이나 통샹까지 교통요금은 버스나 고속열차나 거기서 거기로 비슷했다. 느린 버스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빠른 고속철도가 각광받는 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차량 행렬 속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던 버스가 후쿤고속도로(沪昆高速)로 들어서자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 도로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저쟝(浙江), 쟝시(江西), 후난(湖南), 구이저우(贵州)를 거쳐 윈난(云南)의 쿤밍까지 이어진 2,730km의 G60번 고속도로다. 길이가 경부고속도로의 6.5배에 달하고 6개 성시(省市)를 횡단한다니 대륙의 고속도로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은 2018년 말 기준 고속도로 총연장 14만 km로 세계 1위라고 자부한다. 최고 최대 최장 최초 등 무엇이든 일등을 추구하는 중국인들, 2021년 공산당 창당 100주년과 1949년 건국 100주년을 기해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国梦)을 달성한다는 시 주석(习主席)의 '신시대 국가 특색 사회주의'가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우쩐 터미널에 닿기까지 차창 밖은 산은 말할 것도 없고 야트막한 구릉도 하나 없이 끝없는 평원만이 스쳐 지난다. 온통 연초록 빛을 띤 평원은 마을, 논밭, 저수지, 수로, 송전탑, 수목 등 목가적 풍경이 이어진다. 이런 곳에 단 며칠 간이라도 떨어트려진다면 무료함에 빠져 익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서 썬지아후(申嘉湖) 고속도로로 바꾸어 탄 버스가 한 시간 오십여 분 만에 우쩐으로 내려섰다. 도로변에 화분을 정리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길 가 버스 정거장마다 강남수향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무협영화에나 나올 법한 객잔(客栈)처럼 생긴 지붕을 가진 아담한 크기의 버스터미널이 이채롭고 고풍스럽다.


우쩐(乌镇) 동짜(东栅)

우쩐(乌镇) 수향은 운하가 동서남북 네 개의 짜(柵)로 구획 짓는데, 옛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동짜(东冊)와 시자(西栅)가 관광구로 지정된 곳이다. 위챗으로 동시짜 두 곳 모두 둘러볼 수 있는 190위엔 티켓을 끊고 동짜로 향했다. 수양버들이 가지를 멋들어지게 늘어뜨린 징항 운하(京杭运河) 지류 위 다리를 건너니 아담하고 정겨운 '마오뚠(茅盾) 광장'이 도로 옆에서 손짓한다. 잔디밭 수목 운동시설 산책로 등이 있는 '광장'은 '공원'이라 불러야 적당할 듯싶다.


이곳 우쩐에서 태어난 소설가 마오뚠(茅盾, 1896-1981)은 노신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을 빛낸 작가로 신문학 운동과 공산당 혁명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중앙에 지팡이를 들고 선 그의 동상이 자리한 아담한 크기의 공원에는 엄마와 함께 놀러 나온 동네 아이들이 어울려 뛰놀며 호젓한 봄날을 즐기는 모습이 더없이 정겨워 보인다. 공원 곳곳에서 <상엽 홍사 이월화(霜葉紅似二月花)> 등 그의 소설 속 인물들 동상이 눈길을 끈다.


양쪽에 공동주택이 늘어선 길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회랑의 들보마다 하나씩 걸린 이 지역 출신 유명인들을 소개하는 패널이 우쩐이 단순히 아름다운 수향일 뿐 아니라 걸출한 인물도 많이 배출한 곳임을 알려준다.

한산하던 거리를 지나 동짜(东栅) 풍경구(景区) 입구로 들어서자 너른 주차장은 관광버스로 가득 찼고 매표소 앞 조형물은 물론이고 풍경구 안쪽도 관광객들로 빼곡하다. 동짜로 들어서니 하늘을 가린 대나무 숲과 운하가 입장객을 맞이한다. 운하 한가운데 높이 세운 대나무 장대 위에서 맨발 맨손으로 펼치는 묘기를 보기 위해 운하를 둘러싼 고풍스러운 건물들 회랑을 구름 같은 인파가 채우고 있다.

인파에 밀고 밀리며 회랑을 지나고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고 좌우로 갖가지 건물들과 상점이 연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따라간다. 운하에 접한 왼쪽은 음식점이나 공예품점 등 자그마한 가게가 많고, 우측으론 좁은 문 안쪽에 벽으로 구획 지어진 넓은 공간이 미로처럼 깊숙이 이어지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 온갖 종류의 침상을 전시해 놓은 '강남 백상관(江南百床馆)'과 높은 목조 건조대마다 염색한 천을 걸어 널였뜨려 놓은 염방(染坊)을 둘러보았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서책으로 가기 위해 동책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너른 공터 측면 '수진관 희대(修眞觀戲臺)'라는 현판이 걸린 높은 극단(劇壇) 위에서 두 명의 옌위엔(演员)이 느릿한 동작에 높고 가는 음정의 노래를 간드러지게 뽑아내고 있다. '演出节目: 柳毅传书'라고 극의 제목이 무대 한편 안내판에 쓰여있다.


관광객들은 지붕이 있는 회랑의 돌 벤치에 앉아 옌위엔이 공연하는 위에쥐(越剧)의 노래와 몸짓에 귀와 눈을 빼앗긴 채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 있다. 중국에서 경극과 함께 2대극(大剧), 또는 경극(京剧) 황매희(黄梅戏) 평극(评剧) 예극(豫剧)과 함께 5대 희극(戏剧)으로 불리는 위에쥐(越剧)를 우연찮게 여기서 만났다.

몸짓이 크고 빠른 경극(京剧)과는 달리 상하이 저쟝 장쑤 푸지엔 안후이 쟝시 등 화동지역에서 유행하는 위에쥐(越剧)는 느리고 여성스러운 몸동작에 서정적이고 전아한 노래가 강남 특유의 정취와 독특한 매력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맞은편 도교사원 수진관(修眞觀)으로 들어섰다. 전실에서 십이지신을 상징하는 인물상들에 둘러싸인 채 동악 대제(东岳大帝)와 벽하원군(碧霞元君)이 좌우에 나란히 앉아 객을 맞는다. 그 뒤 관음전에는 약병을 손에 든 관음보살이 중생의 마음을 헤아려 평안케 해준다.

수진관(修眞觀) 처마에는 현판 대신 커다란 주판이 걸려있다. "사람이 천 번을 헤아려도 하늘의 한 번에만 못 미친다(人有千算 天则一算)"는 의미를 곱씹으며 도교의 큰 가르침 하나를 마음에 새기고 시짜(西栅)로 발길을 옮긴다.

우쩐(乌镇) 시짜(西栅)
정오쯤에 시짜(西栅)로 들어섰다. 동짜보다 확연히 규모가 고 넓어 북적임이 적고 한결 한가로워 보이고 물속의 물고기들도 여유로워 보인다. 운하와 연결된 너른 연못을 사이에 두고 '무씬 미술관'과 규모가 남다른 대극원이 마주 보며 자리한다.

우쩐 동짜(東栅)에서 태어난 무씬(木心, 1927-2011)은 문화 대혁명 기간 중 투옥, 가택연금, 뉴욕으로 도미(渡美), 2005년 귀향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화가이자 작가이다. 한정된 시간을 가늠하며 미술관에 딸린 기념품점에 들러 무씬의 자취를 잠시 느껴본다. 옛 수향 마을에 문화공간을 조성하여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등을 고루 갖추어 놓은 발상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짜에는 소명 서원(昭明书院), 염색방(草木本色染坊), 띵셩까오(定胜糕), 오장군묘(乌将军庙), 징항 대운하(京杭大运河), 백련사(白莲寺) 등 무수한 볼거리를 비롯하여 수상 누각, 무대, 돌다리, 객잔, 민숙(民宿), 식당, 찻집, 기념품점 등이 좁은 골목을 따라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염색방, 결혼 예식관, 문방사우 가게, 소명 서원 등을 수박 겉핥듯이 훑으며 골목길을 따라갔다. 서원 높은 담장 벽면에는 소원을 기원하는 표찰이 주렁주렁 빼곡히 걸려 있다. 영웅으로 칭송받는 남송시대 악비(岳飞) 장군과 얽힌 얘기가 전하는 '띵셩까오(定胜糕)'를 파는 가게 앞에는 관광객 줄이 길다.

엽서와 기념품을 파는 작은 서점(书屋)에 들러 "来过不曾离开"라는 문구가 적힌 우표 모양 마그네트 한 개를 추억의 정표(情票) 하나로 챙겼다. 대만 출신 배우이자 가수인 유약영(刘若英, Rene Liu)이 "乌镇, 来过便不曾离开"라고 강남 수향 우쩐에 대한 감상을 표현한 이 말은 마음속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감흥을 일게 하는 이곳의 정취를 잘 함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의 말처럼 이곳에 한 번 와 보면 느긋하게 며칠을 머무르며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로 일지 않을까.


수많은 민숙 중 하나인 '진역객잔(津驛客栈)'으로 들어가서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운하 쪽으로 난 여닫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객잔의 식탁 앞에 앉아 음식을 주문을 했다. 툭 트인 창 밖 좁은 수로 위를 관광객을 실은 거룻배가 하나 둘 떠가고, 노란색과 파란색 복장의 노꾼들이 젓는 배도 두어 척 차례로 요란한 징소리를 울리며 지나간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매운 냄새가 코끝에서 맵게 진동하고, 잠시 동안 도마에 내리치는 칼 소리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려진 채소 볶이는 소리 등이 요란스레 들렸다. 큰 쟁반에 담겨 나온 닭볶음, 칭차이(青菜), 새우 계란 지짐 등은 남다른 비주얼처럼 맛도 특별하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의 번잡함은 온데간데없고 마음에 느긋함마저 조용히 깃드는 듯하다.

시쨔 서쪽 끝 징항 운하에 접한 곳에 '국태민안(国泰民安)'이란 글귀가 층층 난간에 걸린 백련사(白莲寺)의 거대한 7층 탑을 고개를 젖히고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난간 너머 넓은 운하에는 화물선 서너 척이 유유히 운항하고 있다.

정오쯤에 씨자 동쪽 정문으로 들어서서 서쪽 끝 지점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훑으며 왔는데도 벌써 세 시 반경이 된 시계가 호기심을 누르며 발길을 채근한다. 운하 위 돌다리를 건너서 오던 방향과 반대쪽 출구로 향했다. 어느새 더 늘어난 인파로 북적이는 좁은 회랑과 운하 갓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시짜를 뒤로하고 입구 옆 출구로 빠져나왔다. 출구 통로 벽면을 채우고 있는 홍루몽(红楼梦), 명문각(名文却), 내랑(奶娘), 미려원성(美丽元声), 무지개를 잡은 남자(抓住彩虹的男人) 등 이곳에서 촬영된 드라마 포스터들 속 인물들이 우쩐을 잊지 말라는 듯 우아하고 화사한 모습 정감 어린 눈빛을 던진다.

우쩐발 상하이행 39인승 버스는 승객이 채 10명 남짓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자가용이나 고속열차를 이용하는 듯 보인다. 빠름을 추구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아날로그 방식의 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느긋함을 즐기는 여행객에겐 결코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조금 느리다는 불편을 감수하면 인파에 치이는 번잡함을 피할 수 있고 차창 밖으로 천천히 스쳐 지나는 풍경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시나브로 어둠이 찾아오고 상하이 외곽으로 들어서서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는 주춤주춤 속도를 내지 못하며 간간이 거친 엔진음을 토해 놓는다. 터미널이 가까워 지자 피로와 안도감이 밀려온다. 꿈속에서 강남 수향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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