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의 툰시(屯溪) 공항으로 십 년 넘게 운항하던 국내 항공사의 직항 노선이 2017년 10월에 끊겼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19로 인해 한-중 간 항공편은 주 20회로 크게 줄어들었고, 도착 후 2주간의 격리 등으로 사실상 관광 목적 여행객은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다.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팬데믹으로 높아진 국경의 장벽을 넘고 격리의 강을 건너는 일은 고역이다. 금년 2월 말 그 힘겨운 고역을 겪은 것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황산을 찾아볼 기회가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일찍이 명나라 여행가 서하객(徐霞客)이 천하제일이라고 찬탄했던 황산, 드넓은 중국 땅에서 제일이라는 명성을 가졌으니 가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일생일대 꼭 가보아야 할 산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천하에 안휘의 황산만 한 산이 없고 황산에 한 번 오르면 천하에 볼만한 산이 없다. 薄海内外之名山, 无如徽之黄山. 登黄山, 天下无山, 观止矣!" - 서하객 -
황산시는 상하이에서 차량으로 5시간 남짓 소요된다. 황산에서 40여 km 떨어진 곳에는 남송(南宋) 때 왕옌제(汪彦濟)가 뇌강산(雷剛山) 일대에 자리 잡으며 형성된 홍춘(宏村)이 있다. '그림 속 향촌(画里乡村)'이라 불리는 홍춘에는 명청 때의 주택 140여 채가 보존되어 있는데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홍춘과 더불어 A5급 국가 풍경구로 지정된 황산은 세계문화유산, 세계 자연유산, 세계 지질공원이라는 세 개의 타이틀을 가졌으며, 중국 10대 명산의 하나요 천하제일 기산(天下第一奇山)이라 칭송을 받고 있다. 원래 바위 봉우리들이 검푸른 빛을 띠어 이산(黟山)으로 불리던 황산은 헌원 황제가 이곳에서 연단했다는 전설이 있어 황산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황산의 대표적 경관으로 5절(기송, 괴석, 운해, 온천, 동설)과 3폭(人字瀑, 百丈泉, 九龙瀑), 즉 '오절삼폭'이 유명하고, 72봉 가운데 최고봉인 연화봉은 해발 1864m로 광명정, 천도봉과 함께 3대 주봉이다.
등산과 관산(觀山)
이현(黟县) 특유의 음식이 식탁에 오른 오찬을 마치고 우리 일행을 태운 차량이 14:40경 황산 풍경구 입구로 들어섰다. 어른 팔뚝보다 굵은 대나무 등 수목이 울창한 황산 남동쪽 가장자리 기슭을 타고 2차선 아스팔트 길을 지그재그로 달려 고도를 높여 갔다.
태산 화산 등 중국에서 이름 난 산에는 대체로 정상 지척까지 케이블카나 모노레일 등이 설치되어 있고, 산 밑에서 정상부까지 반듯하고 넓은 계단이 놓여 있다. 힘들이지 않고 산정 부근까지 올라와서 경관을 조망하며 즐기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라 등산이나 산행 대신에 '관산(觀山)'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황산에는 운곡(云谷) 옥병(玉屏) 태평(太平) 등 세 개의 케이블카가 운행하고 서해 대협곡에는 모노레일도 놓여 있다. 운곡사(云谷寺)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기암 괴봉 계곡 폭포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황산을 내려다보며 10분 남짓만에 바이어링잔(白鹅岭站)에 도착했다.
암봉 어깨춤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잔도 위를 걸으며 하프 타는 소나무(竖琴松), 석순강(石笋矼), 남해를 향한 십팔나한(十八罗汉朝南海)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름이 붙은 소나무들과 암봉들을 조망했다. 시신봉(始信峰)을 휘돌며 관음 바위와 '바다를 탐험하는 소나무(探海松)'도 한참 바라보았다. 바위에서 하프, 석순, 십팔나한 등 그 모양새에 걸맞은 그럴듯한 이름을 끌어낸 발상이 기발하다.
동행한 현지인 Y가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 멀리 암릉이 뚝 끊기며 절벽을 이룬 곳을 가리키며, '바다를 바라보는 원숭이(石猴观海)'라고 알려준다. 너무 멀어서 하나의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바위에 저런 이름을 붙인 것은 황산에 '짧은 꼬리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탄한 등로 옆에서 인사하는 흑호송(黑虎松)과 연리지 소나무, 기둥처럼 가늘고 높이 솟은 바위 끝에 소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붓 끝에 핀 꽃에 비유한 몽필생화(梦笔生花)와 그 옆 붓꽂이 봉(笔架峰), 단결송(团结松)도 조망했다. 누가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허공으로 놓인 잔도와 암릉을 깎아서 만든 반듯한 계단을 따라 걸으며, 기기묘묘한 수석을 눈 앞에 두고 감상하듯, 황산이 빚어 놓은 절경에 연신 감탄을 쏟아 낸다.
해발 1200미터 이상 고산에 자생하는 황산 두견화가 제 철을 만나 진녹색 잎사귀 사이사이 연분홍 꽃을 수줍게 내밀었다. 그 자태가 가히 안휘성 성화(省花)와 황산시 시화(市花)로 사랑받을 만하다 싶다.
베이하이 빈관(北海宾馆)을 지나고, 계곡 위에 놓인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고, 시하이 반점(西海饭店)을 가로질러 하룻밤 묵을 파이윈 반점(排云饭店)에 도착했다. 순식간에 황산의 품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그 아찔한 비경에 취해서 정신이 온전히 빼앗길 지경이다.
개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해발 1600미터에 위치한 이 호텔의 지배인이 우리 일행을 현관에서 반갑게 맞이한다. 그의 요청에 따라 우리 일행은 호텔 직원들과 함께 파이윈러우(排云楼)라는 현판이 걸린 호텔 건물 앞에서 단체사진 한 컷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음에 다시 이 호텔을 찾아오면 그 사진이 호텔 로비 어디쯤에 걸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 묵었던 황산 시내 호텔 백경국제대주점(栢景国际大酒店)은 성문처럼 어리어리한 정문은 물론이고 객실도 휑하니 넓었었다. 그에 비해 이 호텔은 5~6평 정도로 좁지만 콤팩트하여 무엇이건 큰 것을 추구하는 중국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해발 1600미터 산정 부근에 위치하다 보니 공간의 제약 때문일 것이다.
여장을 풀고 1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일몰 명소로 서해 대협곡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1935년에 지은 석조 정자 파이윈팅(排云亭)으로 가서 목을 길게 빼고 일몰을 고대했으나 여의치 못하고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오늘이 곡우(穀雨)인데 비가 두둑 두둑 간간이 흩뿌리니 강남땅에서나마 마음속으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해 본다. Y 주관 호텔 식당에서의 만찬은 반주가 몇 순배 돌자 노랫가락과 젓가락 장단까지 더해지며 흥겨움이 고조되어 9시 반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호텔 방 샤워기는 수압이 좋고 온수도 잘 나와 예상 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아래쪽 서해 저수지(西海水库)가 용수를 공급할 터이고, 양쪽 끝에 커다란 짐을 하나씩 매단 막대 지게를 어깨에 지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던 짐꾼들이 호텔의 식자재와 세탁물 등을 운반했을 터이다.
일출 장관 다음날 일출 시간이 05:35분이라니 늦어도 5시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일행 중 몇몇은 마신 술이 모자라는지 자리를 옮겨 가며 해맞이는 사양하겠다고 한다. 성공 확률 1/5,000 인천 상륙작전도 감행했는데, 강우 확률이 50%에도 못 미치는데 황산 정상 턱밑까지 와서 해맞이를 포기하는 것은 천하제일 명산 황산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보였다.
아침 04:40경 잠에서 깨어 객실에 비치된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랜턴을 들고 05시경 호텔을 출발하여 해맞이 장소인 단샤봉(丹霞峰)으로 향했다. 같은 호텔에서 묵은 젊은 남녀는 푸지엔(福建) 첸저우(泉州)에서 왔다고 한다.
단샤봉(丹霞峰)을 향해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온전히 다 물러나지 않은 어둠 속에서 맑은 새 울음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온다. 이른 새벽 오색을 출발해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를 때 휘휘 바람 소리처럼 들려오던 휘파람새 소리가 떠오른다. 호텔에서 출발한 지 20여 분만에 해맞이 장소인 단샤봉에 올라섰다.
동쪽을 마주하고 서니 북한산 원효봉처럼 원만하고 의연한 암봉 뒤로 공룡 등처럼 삐쭉삐쭉 튀어 오른 암봉들이 검은빛 수석처럼 솟아 있다. 하나 둘 모여든 일출객들이 20여 명으로 늘어났고 동쪽 난간 쪽에 모여 일출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일출 시각이 다가오자 하늘을 뒤덮은 먹물 같은 잿빛 구름과 암봉 사이에 수평으로 길게 난 틈새를 아침노을이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잉태된 태양을 토해내려 하고 있다. 잠시 후 암봉 위 구름을 뚫고 레이저 광선처럼 강렬한 빛을 사방으로 펼치며 태양이 솟아올랐다.
점차 날이 밝아오자 검은 암봉들이 소나무와 어우러진 속살을 드러내 보이고, 암봉들 너머로 산너울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멀어져 간다. 잠시 후 운해 속으로 모습을 감추려는 태양이 암봉과 잿빛 구름 사이 빈 공간에 주홍빛 바다를 펼친다. 가히 일생일대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이다.
맞은편 암봉 위에서 일출을 지켜본 주홍빛 외투 차림 일단의 무리는 광동에서 왔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는 나이 든 동료의 손을 잡아 주며 암벽 계단을 내려서는 모습이 일출 모습처럼 아름답다. 짧지만 황홀한 일출에 만족하라는 듯 황산이 빗방울을 하나 둘 떨구기 시작한다.
양손에 스틱을 짚으며 좁고 가파른 바위 계단을 내려가던 노신사 뒤돌아보며 길을 비켜줄까 묻는다. 하와이 출신으로 베이징에서 12년째 근무 중이라고 한다.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하와이를 찾았었고 북경에서 두 해를 보냈다. 시간이 달라도 같은 공간에 머물렀거나 공간은 달라도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도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서로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 공유와 공감이 아름다운 기억이길 바랄 뿐이지만..
호텔로 향한 일행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단샤봉 동쪽과 서쪽을 한동안 조망하고 호텔 갈림길에서 100미터 남짓 거리에 있는 파이윈팅(排云亭)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정자를 홀로 독차지하고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서해 대협곡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저절로 벅차오른다.
호텔 식당으로 들어서서 홀로 앉아 아침을 들고 있은 K양과 합석했다. 통역을 담당했던 그녀는 길림성 출신 동포로 일본 유학 후 황산시에 입사한 지 갓 일 년이 되었다고 한다. 식사를 마쳤는데도 시각은 7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다.
서해 대협곡으로 일행과 함께 오전 9시경 서해(西海) 대협곡을 향해 파이윈러우 빈관을 나섰다. 운해를 황산오절 중 하나로 꼽았으니 서쪽의 협곡을 서해 대협곡이라 부를 만도 하지 싶다. 일행 중 한 분은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협곡 탐험을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간다고 한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눈앞에 있는 일생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 얼마나 애석할까. 몸이 불편한 어떤 여성 한 분이 두 명의 가마꾼에 의지해 호텔로 올라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깍아지른 바위 절벽 사이로 난 좁은 통로와 암벽 터널을 지나고, 아찔한 절벽에 놓인 잔도를 휘돌며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계곡 속으로 이어진 돌계단을 내려간다. 일행 중 누군가 황산에는 모두 4만 개의 계단이 있다고 귀뜸한다.
협곡 맞은편 암봉은 황산을 비롯한 이 지방에서 자라는 대죽(大竹)의 굵은 죽순 묶음을 세워 놓은 듯 뾰쪽한 첨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원숭이 모양 기둥 난간 계단은 절벽을 끼고 가파르게 내리 닺는다. 돌계단 옆 해발 1000미터 바윗돌 표지석이 협곡 위쪽과 아래쪽 입구까지 각각 1km라고 알려 준다.
암벽 모퉁이를 도니 협곡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암봉이 나타난다. 절경 속에 또 다른 특출한 모양새로 눈길을 사로잡는 이 암봉은 낙타봉이라고 한다. 사람도 한두 번 만나고 부딪혀 보면 속 모습과 성격이 하나 둘 드러나듯 황산도 속으로 더 깊숙이 들수록 감추어 놓은 비경들을 시시각각 하나씩 내놓았다. 대협곡 아래쪽에서 지팡이를 하나씩 든 산객 두세 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좁은 돌계단길을 올라온다. 모노레일 탑승장에서 30여 분을 걸어서 올라왔더란다. 이들이야말로 관산(觀山)이 아니라 등산(登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숨고 숨기는 숨바꼭질을 하듯 암봉들의 숲 속을 헤짚으며 협곡의 밑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대협곡을 내려가는 길에도 예외 없이 연갈색 깃털, 까만 얼굴, 하얀 복부의 우아한 새들이 산객 주변을 맴돌며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나중에 찾아보니 주니아오(竹鸟)로도 불리는 쫑짜오메이(棕噪鹛; Buffy laughingthrush)라는 중국 화동과 쓰촨 지역에 서식하는 새다. 그 새 울음소리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어 동행 중 한 분이 "중국은 새들도 성조(聲調)가 있나 보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황산에 흠뻑 젖다
가늘게 내리던 비가 조금 더 굵어지며 걸음을 재촉할 무렵 대협곡 아래쪽 입구인 모노레일 탑승장 파이윈시짠(排云溪站)에 닿았다. 해발 1206미터 탑승장에서 석상봉(石床峰) 가장자리 텐하이짠(天海站)까지 8분이 소요되는 이 모노레일은 길이 893m, 높이 497m로 시간당 800명을 운송할 수 있다고 한다. 파노라마 입체 영상처럼 좌우로 스쳐 지나는 서해 대협곡의 절경이 유리창에 맺히는 굵은 빗방울에 어른거려 더욱 환상적이다.
바이윈 빈관(白云宾馆)을 거쳐 도착한 기상대가 자리한 황산의 제2봉 광밍딩(光明顶)은 관람객들로 붐빈다. 변화무쌍한 황산 날씨에 대비라도 한 듯 광밍딩 부근 많은 관람들은 모두 비옷을 챙겨 입었다. 멀리 우뚝 솟아 있는 황산 제1봉 연화봉과 제3봉 천도봉이 또렷이 보인다.
'황산환잉닌(黄山欢迎您)'이란 글자가 적힌 조끼 차림의 짐꾼은 무거운 짐을 어깨에 둘러 맨 채 비를 맞으며 관람객들로 붐비는 돌계단을 오르내린다. 금세라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듯 아찔하게 서 있는 비래석(飞来石)을 지나 세 시간 여만에 다시 파이윈 호텔로 돌아왔다. 더욱 굵어진 빗줄기에 흠뻑 젖은 몸처럼 마음도 황산 비경에 푹 빠져 버렸다.
호텔에서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점심을 든 후 단샤잔(丹霞站)으로 이동해서 타이핑(太平) 케이블카에 올랐다. 케이블카는 비행기처럼 허공 높이 매달려 황산 북쪽의 송구잔(松谷站)까지 미끄러지듯 천천히 내려간다. 거대한 몸을 운해에 감춘 황산 산군들이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마지막으로 장관을 선사한다.
골짜기를 채운 운해 속으로 빠져드는 케이블카에서 문득 오절삼폭을 비롯 그 어떠한 수사로도 웅혼한 황산을 규정짓고 그 비경을 다 표현해 내기에는 버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산에 한 번 오르면 천하에 볼만한 산이 없다."라고 했으니 이제 어느 산을 찾아가야 할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