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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Jun 30. 2021

대운하의 도시 양저우 볶음밥과 고운

@photo 百度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가로수와 도로가 촉촉이 젖어 있다. 지하철역 곳곳에 붉은 바탕에 노란색 글씨의 '경축 중국 공산당 100주년'이라는 선전 문구가 눈에 띈다. 샨시난루역(陕西南路站)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타고 상하이역에서 내렸다. 이번 출행의 목적지는 양저우(扬州)와 전쟝(镇江)이다.

양저우(扬州)는 수나라 양제 때 건설된 경항대운하의 주요 기착지이자, 강남 물자를 북송하는 수운의 요지로 발전한 도시다. 당송 시대에는 쑤저우와 항저우 등 인근 도시들에게 수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내주었지만, 명나라 이후에는 소금 등 주요 물산의 집결지로 상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한편, 창쟝(长江)을 사이에 두고, 양저우와 마주 보고 있는 전쟝(镇江)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 때 거쳐간 곳이자, 유비 손권 노숙 태사자 등 삼국지의 영웅들과 왕희지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자취가 어린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대 대운하

07:10발 기차 출발시각 한 시간 여를 앞두고 역에 도착하니, 마음이 여유롭다.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동행하기로 한 L로부터 "홍챠오 역으로 잘못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작년 오월 함께 이화령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는 원정 산행을 하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산행 당일 사당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놓쳐 혼자서 힘든 산행을 했던 기억이 스친다.

그때처럼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들었지만 얼른 걷어 치우고,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기차 출발시각까지 남은 시간, 홍차오역에서 상하이역까지 소요 시간, 출발시간 변경 등 여러 대안을 궁리했다. '08:48발 홍차오역-양저우 동역 열차'로 차표를 변경한 L과 양저우에서 합류키로 했다. 관리자 승진에 앞서 거쳤던 역량평가(Human assessment)의 복잡한 상황을 뒤섞어 놓은 인바스켓(In basket) 시험을 한바탕 치른 느낌이다.

열차가 상하이 시내를 벗어나 안팅 역(安亭站)을 거쳐 30여 분 만에 쑤저우 역(苏州站)에 정차하자, 헐렁하게 비었던 좌석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승객들로 채워졌다. 열차 좌우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녹색 평원의 파노라마가 한편 부럽기도 하고, 한편 밋밋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창저우 역(常州站)과 따강 남역(大港南站)을 지나 쩐쟝(镇江)으로 들어서자 제법 산다운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오봉산(五峰山)을 스쳐 보내고, 창쟝(长江) 위 철교를 건넌 열차가 양저우 동역으로 들어서서 정차했다. 긴 플랫폼에는 타고 내리는 승객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다.

양저우에서의 첫 행선지로 '중국 대운하 박물관'을 점찍어 두었었다. 마침 지난주 6.16일에 개관했다고 하는데, 관람 후기 등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어, 어떤 모습일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택시로 30분 만에 박물관에 도착하니 어느새 하늘은 맑게 개였고, 얼굴을 내민 태양이 눅눅한 공기를 화끈하게 데우고 있다. 광링취(广陵区) 카이파동루(开发东路)라는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박물관은 양주시 남쪽의 드넓은 평원의 신 개발구에 자리하고 있다.


대운하 박물관 전경


저장성 항저우에서 베이징까지 연결된 1747km 경항 대운하는, 낙양을 중심으로 북경과 항주까지 이어진 2700km 세계 최장인 수당 대운하, 항저우-샤오싱-닝보를 잇는 239km 절동(折东) 대운하와 함께, 2014년 중국의 46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위에 별다른 건물 하나 없 홀로 거대한 성채처럼 우뚝 서있는 박물관, 그 앞에는 입장을 하려는 관람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다른 대부분의 박물관처럼 이곳도 입장료는 없지만, 입장인원 통제 등을 위해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예약을 하려 하니, 오전 오후 모두 매진이다.

박물관 내 안내 창구로 가서 젊은 여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스마트폰을 건네받더니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안심시키며, 검지로 예약신청 사이트의 '바로 예약(立卽預約)' 버튼을 연신 두드린다. 어느 순간 누군가 취소했을지도 모를 '예약' 리스트의 빈 틈을 비집고 들어갔는지, 예약이 되고 입장용 QR코드가 발급되었다. 어떤 복잡한 시스템이든 운영 방식과 로직을 알고 있으면, 저런 요령도 찾아서 활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여직원에게 엄지를 한 번 치켜세워주었다.

박물관 내부 거대한 규모의 복도와 전시관 입구부터 관람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개관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주말,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와 아이들 구분 없이, 마치 도시 전체의 축제에 참가하듯 이곳으로 달려왔을지도 모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산을 자랑하는 마당인 박물관이 개관했으니, 양저우 시민들은 자기 고장 문화에 대한 자부심에 얼마나 뿌듯할까.

대지 13천여 m², 전시면적 18천m²의 박물관은 대운하 연안의 전통생활, 세계 각지 운하도시, 자금성과 대운하, 대운하 예술사, 수양제와 대운하, 운하와 자연, 운하와 선박, 옛 거리 재현 등 11개 테마로 대운하 전 유역, 전 구간, 전 시대에 걸친 방대한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운하 건설은 춘추 시기 초나라 손숙오에서 비롯되어, BC 613년에 장강-한수를 연결한 징한(荊汉) 운하와 BC 578년 장강-회수를 이은 차오페이(巢肥) 운하가 최초로 건설되었다고 전한다. 이후로 전국시대 위나라, 진나라, 서한, 삼국시대 등에 걸쳐 운하 건설이 지속되었고, 수나라를 거쳐 원나라 때까지 공사가 진행되어, 저장성 항저우에서 시작하여 장쑤 산동 허베이와 천진을 거쳐, 베이징까지 연결된 전체 길이 1747km에 이르는 경항대운하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대운하박물관 내부

대운하는 물자 수송 등 조운의 역할뿐 아니라, 대외교류의 창구로서의 기능도 담당하여, 마르코폴로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을 역사에 등장시키고 있다. 그중에 신라의 최치원과 조선의 최부에 관한 기록도 전시관 벽면 한편을 차지하고서, 한참 동안 내 발길을 붙잡는다.

대운하 주요 거점 구쩐(古镇)들을 그린 극도로 섬세하고 사실적인 두루마리 그림들이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벨기에 왕립박물관 등에서 접했던 브뤼겔(P. Bruegel, 1525-1569)의 인상적인 풍속를 대했을 때의 경이로움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배낭을 짊어진 채, 1층 주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나자 다리가 뻐근하고 피로감이 몰려온다. 1층처럼 디귿(ㄷ) 자 복도를 따라 칸칸이 들어서 있는 테마별 전시관을 수박 겉핥듯 빠른 걸음으로 둘러보았다. 3층 야외 정원에서 연결된 높이 100여 미터 당나라 풍의 대운탑(大运塔)은 아직 개방을 하지 않고 있어, 지친 몸이 오히려 안도한다.

양저우는 운하도시로서의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중국 전 국가주석 강택민이 태어난 곳, 국제무역 거점으로 신라방이 설치되고 최치원(857-미상)이 유학했던 곳, <동방견문록>을 지은 마르코폴로(1254-1324)가 관직을 맡았던 곳, 이슬람과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등 다채로운 면을 가졌다. 자신과 다른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융화함으로써,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양주의 대운하 박물관이 말해주고 있다.

다양한 세계 각지 문화를 수용하여 큰 용광로에서 더욱 찬란하고 새롭게 빚어낸 양저우, 여러 가지 재료를 조화롭게 잘 섞어서 볶아 낸 맛 나기로 유명한 볶음밥이 양저우의 대표 음식으로 이름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 싶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 허기가 밀려온다. 택시 기사가 추천하는 '추차단판(粗茶淡饭)' 등 거리에 먹거리가 즐비할 동관지에(东关街)로 향한다.


동관지에 볶음밥
동관지에(东关街)는 광릉구(广陵区) 고운하(古运河)에서 궈칭루(国庆路)에서 까지, 좌우로 빽빽한 주택가를 거느리고 동서로 곧게 뻗어 있다.

동문 쪽 공원 입구에서 말을 탄 마르코 폴로(1254-1324)가 맞이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 그는 1274년 두 번째로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고, 17년간 원나라의 관직을 지내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했다고 한다.

성루처럼 웅장한 누각 아래 문을 통해 동관지에 거리로 들어섰다. 청나라 때 관리들의 주택가 동꽌지에(东关街)는 여느 구쩐(古镇)처럼 단층 건물들에 온갖 상점과 식당, 공방, 개인 주택, 도교사원 등이 늘어서 있는, 좁고 고풍스러운 거리가 1.1km여 이어진다.


동관지에 초입 마르코폴로 동상(좌)


이곳엔 사미장원(四美酱园, 1817년), 사복춘향분점(谢馥春香粉店, 1830년), 반광화오금점(潘广和五金店, 1862년) 등을 비롯해서 1900년대 초에 개업한 상점들도 여전히 전통을 이어가고 있단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허기를 달래려고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골목 벽면에 붙은 자그마한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곁가지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가게 앞 통로 위에 그늘막을 치고 간이 식탁과 의자를 놓은 '재씨소도면(載氏小刀面)'이라는 허름한 식당이 나온다. 종류가 다른 국수 두 그릇과 볶음밥(炒饭) 한 그릇을 주문했다. 국수도 괜찮았지만, 작은 그릇에 담겨 나온 볶음밥은 내 미각에 양저우를 각인시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일품이다.

전국 개인정원 20곳 중 하나로 2005년 국가 4A급 관광 경구로 지정된 꺼위엔(个园) 대문으로 들어섰다. 꺼위엔은 양주 소금 상인의 사택 원림이었다. 격막식으로 구획된 주택을 비롯하여, 희귀한 돌을 쌓아 만든 춘하추동 네 개의 산과 연못 수목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드넓은 정원이 번영했던 양주의 옛 모습의 일면을 보여준다. 알게 모르게 온몸에 땀이 배이게 하는 한낮의 열기에도 관람객들은 끝없이 몰려들고, 끝이 없을 듯 이어지던 동관지에 서편 궈칭루(国庆路) 쪽으로 빠져나왔다.


고운 최치원 기념관
다음 행선지는 최치원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아름답기로 이름난 셔우시후(瘦西湖) 북변 언덕배기처럼 야트막한 관음산에 의지한 당나라 성곽박물관(唐城遺址博物馆) 안에 번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조금 외진 곳이라 그런지 입장권 매표소와 성곽으로 들어가는 검표소의 직원만 한 사람씩 눈에 띌 뿐, 너른 성곽 안은 적막하다.

기단 위에 한자로 '신라 최치원 선생 기념비'라 적힌 장방형 석비가 있는 비각과 그 옆 2007년에 세운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 비각을 둘러보았다. 마당으로 내려서서 열린 문 안쪽으로 보이는 고운 선생 동상을 마주하며 기념관으로 걸어가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진다.

당성 박물관 안 연건평 1956m² 규모의  당대 양식으로 지은 최치원 기념관은 중국 최초의 외국인 기념관으로, 2007년 10월 15일 개관했다고 한다. 2층짜리 기념관 안쪽 데스크에 앉아 있던 안내원이 인기척에 짐짓 자세를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킨다. 고운 선생의 당나라와 귀국 후 신라에서의 행적과 저술 등을 소개하는 사료와 함께, 장보고 정몽주 박제가 김정희 등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던 인사들에 대한 내용도 진열되어 있다.


최치원 박물관의 최치원 상
당성박물관

정몽주 동상이 자리한 정원을 지나 연화각을 둘러보고 기념관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며 둑 터진 봇물처럼 주룩주룩 내린다. 고운 선생께서 오랜만에 찾아온 고국 관람객의 뒷모습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일까.

12세 어린 나이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그의 부친은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학 7년 만인 874년 18세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니, 먼 타국 땅에서 홀로 외로움과 싸우며 쏟아부었을 각고의 노력과 정진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고교시절 자취방에서의 고적했던 나날들, 대학 때 기숙사 생활 등 초라하고 적요했던 젊은 시절, 처량하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읊곤 했던 시가 고운 선생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가을바람에 홀로 외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없구나
밤은 깊어 창 밖엔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 내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 최치원, <秋夜雨中>-

기념관을 나서기 전에 '唐'이라는 글자가 쓰인 황적색 깃발이 세워져 있는 성곽 위 누각에 올랐다. 여전히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성곽 안팎은 변방의 버려진 요새처럼 적막하기만 하다.


작은 시후(西湖) 셔우시후(瘦西湖)
다리의 피로가 얼마쯤 풀리빗방울도 가늘게 잦아들며, 객에게 다음 행선지인  셔우시후(瘦西湖)로 발길을 이끈다.

수 당 오대 송 원 명 원 청 등 다른 시기에 조성된 인공호를 연결하여, 청나라 (康乾) 시기에 형태를 갖춘, 총면적 133만m² 수상 면적 47만m²의 셔우시후는 청나라 때 시후(西湖)로 유명한 항저우의 시인 왕항모(汪沆慕)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천하제일의 울창한 원림(园林之盛,甲于天下)'이라 칭송받으며 2010년 5A급 국가 풍경구,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각각 지정된 셔우시후에는 14대 주요 명소가 있다고 한다.


셔우시후와 바이타

그 북문으로 들어서서 안내도를 살펴보니 규모가 생각보다 광대하다. 시간과 피로에 맞서 고군분투 싸워야 할 판인데, 반가운 유람차가 눈에 띄어 얼른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호수와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원림 곳곳에 능소화가 만발했고, 호수에는 연꽃이 만발했다.

원군인 유람차의 도움을 받아가며 오정교(五亭桥), 24교(桥), 바이타(白塔) 등 몇몇 곳만 둘러보기로 했다. 유람차가 원림 속으로 난 길을 미끄러지듯 달리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맺힌 땀을 씻겨준다.
 
양주(揚州)의 총관(總管)을 역임했던 수 양제(569-618)가 24명의 미인과 연회를 즐겼다는 24교(二十四桥) 부근에서 유람차에서 내렸다. 아치형의 이 다리는 난간과 계단이 각각 24개이고, 길이와 넓이가 각각 24미터, 2.4미터라고 한다. 양제는 대운하를 완성하는 등 업적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토목공사와 과도한 세금 등으로 38년 짧은 왕업을 접어야만 했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호수 한가운데 금빛 지붕의 우팅교(五亭桥)가 물위에 떠있는 궁전처럼 우아한 모습을 드러낸다. 청 건륭제가 자주 찾아와서 머물곤 했다니, 바쁜 국사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산수와 풍류를 찾아 수 천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옛 황제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같은 필부(匹夫)들도 때때로 배낭을 둘러매고 훌쩍 낮선 곳을 찾아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챙겨볼 수 있으니 좋은 시대다.

북경 베이하이(北海)의 바이타(白塔)를 모방하여 청나라 건륭 49년(1784)에 세운 바이타(白塔)를 둘러보고 남문으로 빠져나왔다. 날은 저물어 가고 마음은 장강 너머 쩐지앙(镇江)으로 달려가고 있다.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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