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우 셔우 시후(瘦西湖) 남문으로 나서서 택시를 불러 전쟝(镇江)으로 출발했다. 오후 7:40경에 예약을 해두었던 쩐쟝의 IBI*호텔에 도착했다. 창쟝(长江) 건너 전쟝까지는 30km여 남짓으로 비용 면이나기차역까지 이동하는 번거로움 등을 고려하여 택시로 이동키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동행인 L과 함께 자화자찬을 했다.
예전에 다른 도시에서 겪은 것처럼 호텔은 외국인을 받지 않거나 체크인에 몇십 분씩 잡아먹지도 않았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리셉션너로부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 방 키를 건네받았고, 그리 넓지 않지만 군더더기 없이 콤팩트하고 깔끔한 방도 마음에 쏙 든다.
땀을 씻고 호텔 옆 식당가 중 한 곳을 골라 샹라롱샤(香辣龙虾), 치에즈(茄子) 볶음, 양쩌우 차오판(扬州炒饭) 등 음식을 시켰다. 땀을 훔쳐가며 입맛을 당기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창쟝(长江) 강변도로를 휘돌아 호텔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평소 습관대로 또 시간을 절약하자는 차원에서 물을 끓여 배낭에 챙겨 온 누룽지와 커피로 아침을 대신했다. 앞서 말했듯이 전쟝(镇江)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 때 거쳐간 곳이자, 유비 손권 노숙 태사자 등 삼국지의 영웅들과 왕희지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자취가 어린 곳이기도 하다.베이구샨(北固山) 지아오샨(焦山) 진샨(金山)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터 등을 염두에 두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창쟝 위의 섬산 지아오산(焦山) 들머리를 향해 택시에 올랐다.
지아오샨(焦山)은 베이구샨(北固山) 진샨(金山)과 함께 전쟝 삼산(镇江三山)의 하나로 국가 5A급 풍경구로 지정된 곳이다. 50위엔 하는 입장권을 구입해서 섬으로 들어가는 선착장으로 가니 일찍하게 관람객 스무여 명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솔솔 부는 시원한 강바람이 땀이 배인 몸의 열기를 덜어준다.
9시경 플랫폼으로 들어온 배에 올라 10분 남짓만에 진산 섬에 오르니 호수와 운하를 낀 정혜사(定慧寺) 산문이 맞이한다. 사찰은 되돌아 나오는 길에 둘러보기로 하고 그 우측으로 돌아 비림(碑林)으로 들어섰다.
지아오샨(焦山) 비림은 시안(西安) 비림과 함께 중국 양대 비림이자 강남 제일의 비림으로 알려져 있다. 북송 때인 1048년 조성되기 시작하여 명청 때에 확장되었으나 훼손되었던 것을 전쟝 시청이 1960-2002년 사이 각석을 두루 수집하여 부지면적 7천 여 m² 규모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비각 발전사 진열관, 묘지명 진열관, 보묵헌(宝墨轩), 란정(兰亭), 예학명(瘗鶴銘)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이곳을 자주 찾았다는 건륭제가 5번째로 방문했던 1780년에 세운 어비(御碑)의 옆 가장자리와 기단에 새겨진 아홉 마리 용과 물결무늬 장식 돌조각은 감탄을 자아낼 뿐 말을 잃게 만든다.
초산 기슭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 회랑의 벽면에 크기와 서체가 각기 다른 글자들이 빼곡히 적힌 비석들이 부조처럼 늘어서 있다. 이렇게 많은 비석들을 누가 무슨 연유로 만들었으며 어떻게 지금껏 잘 보전되었을까 실로 경이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자그마한 란정(兰亭)은 무성히 자란 대나무 숲이 하늘을 가린 아담한 정원을 내려다보며 자리한다. 왕희지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이곳과 멀지 않은 샤오싱(绍兴) 출신으로 서성(书圣)으로 칭송되고 있으니 비림(碑林)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난정 옆 '예학명(瘗鶴銘)'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시관이 자리한다. 예학명은 지아오샨의 서쪽 절벽에 새겨져 있던 석각인데, 벼락을 맞아 강물 속으로 떨어져 나간 것을 남송과 청나라 때 그 일부를 인양했더란다. 웅장하고 힘 있는 필체의 예학명 석각은 아름다움과 질박함을 모두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역대 서예가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비림을 나서니 산정으로 가는 길에 청나라 포대 진지가 있는데, 아편 전쟁 시기인 1842년 창쟝을 거슬러 남경으로 향하는 영국 군함 70여 척을 저지하려던 군민 1500여 명이 전원 장렬히 전사한 곳이라고 한다.
계단을 따라 산정으로 오르니 원나라 때인 1307년에 건립되었다가 훼손되어 1999년 재건했다는 7층 8각 회안사 만불탑이 우뚝 솓아 창쟝을 굽어 보고 있다. 기단 전후 벽면에 각각 '해불양파(海不扬波)', '중류지주(中流砥柱)'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전자는 주나라 주공(周公) 때처럼 태평성대가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것이요, 후자는 난세나 역경에도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는 의연함을 격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황하의 지주산에 빗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말 충신 야은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는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가 그의 고향인 구미에 남아 있다.
내려가는 길 동쪽을 향한 일출관(日出观)이나 창쟝(长江)을 향한 장관정(壯观亭) 모두 무성히 자란 나뭇가지에 가려 조망이 없어 그 이름이 무색하다.
동한(东汉) 때 초광(焦光)이라는 은사가 세 차례에 걸친 헌제(献帝)의 부름에도 부패한 조정과 함께 썩어가는 것을 꺼려 불응하고 은거했다는 삼소동(三沼洞) 앞 돌계단에 앉았다. 더위를 식히면서 역사의 강물 따라 흘러간 인물들을 생각하고 소리 없이 유유히 흐르는 창쟝을 굽어보니 절로 시심이 꿈틀댄다.
古今寻来人络绎不绝多 山上石阶磨损滑滑溜溜 焦山兰亭园唯竹林茂盛 心中客愁似长江不息流
예나 지금이나 찾는 이 발길 끊이지 않고 산 위로 난 돌계단은 닳아서 반질거리네 초산 난정 정원엔 대나무 숲만 무성하고 나그네 객수는 장강처럼 그치지 않네 - <焦山游>, 장인산 -
해발 70미터로 야트막한 지아오샨(焦山)에서 내려와서 정혜사 쪽 기슭 바위 절벽에는 육조(六朝) 시대부터 민국(民国) 시대까지 이곳을 다녀간 유명 인사들의 석각 글씨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눈에 잘 띄는 곳 바위벽에 새겨진 "엄금각화 애호비각(严禁刻画 爱护碑刻)"이라 새긴 글귀가 웃음을 자아낸다.
정혜사 경내로 들어서서 화엄전 대웅보전 등을 둘러보고 산문을 나서서 선착장으로 몰려가는 관람객들 뒤를 따라 배에 올랐다.
삼국지 영웅들(II) 호텔 부근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들고 체크아웃 후 짐을 맡기고 지척 거리의 베이구샨(北固山)으로 향했다. 지아오샨(焦山)을 둘러본 감회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소설 <삼국지> 속 영웅들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해발 55미터 북고산(北固山)은 지아오샨(焦山)과 진샨(金山)의 중간에 위치하는데창쟝과 마주하는 북쪽은 가파른 절벽이다. 입구로 들어서서 동오 고도를 따라가다 보면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명나라 때 쌓았다는 성벽이 산비탈에 의지해 견고한 모습으로 자리하여 웅위를 자랑하고 있다.
북고루가 자리한 산정 아래 너른 터에 오르니 서북쪽 낮은 담장 너머에 절벽처럼 험준한 산비탈을 이르는 '루마간(溜马涧)'이라는 표지석이 손권과 유비 두 영웅이 말을 달리며 자신들의 명운을 점쳤다는 곳임을 알려준다.
다경루(多景楼) 아래 축대 벽면에는 감로사의 역사적 의의를 상기시키듯 '감로유방(甘露流芳)'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다. 계단을 따라 산정 쪽으로 오르면 다경루(多景楼)가 나오는데, 가파른 비탈에 의지해 무성히 자란 수목에 가려져서 별다른 조망이 없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처마에 걸린 '천하강산제일루(天下江山第一楼)'라는 편액이 유명무실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경루 옆 마당에는 '헌스(狠石)' 또는 '스양(石羊)'이라 불리는 양처럼 생긴 자그마한 석상이 자리하는데, 손권이 그 등에 앉아 유비와 함께 조조를 무찌를 계책을 논의하여 적벽대전의 묘책을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다경루를 지나 산정에 위치한 북고루에 올라 2층 난간으로 나서니 1층 처마에 걸려 있던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는 편액이 과장이 아님을 항변하듯 창쟝과 산이 어우러진 장쾌한 파노라마를 눈앞에 펼쳐 보인다. 전쟝의 옛 이름이 '징커우(京口)'인 연유로 세 산을 통칭하여 징커우 삼산(京口三山)'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00m가 넘지 않는 밋밋한 산이지만 창쟝(長江) 하류 평원에서는 여전히 높고 훤칠하다.
'천하제일'이라는 수식어에 과장과 허장성세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천하를 삼분하여 나누어 가진 세 영웅 중 두 영웅의 발자취가 어린 곳이라 생각하니 수긍이 되기도 한다. 넓고 넓은 땅 높고 수려한 강과 산이 즐비한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제일강산'이란 이름을 가졌으니 얼마나 명예로울까.
북고루 남측에 있는 감로사는 <삼국지> 속 유비와 손권의 이복 누이동생 손상향(孫尙香)의 정략결혼 얘기가 펼쳐진 현장이다. 원래 작은 사찰이었던 감로사는 당나라 때의 명신 이덕유(李德裕)가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감로사 뒤 창쟝 변 제강정(祭江亭)은 유비가 죽었다는 거짓 소식을 접한 손상향이 유비에게 제사를 지낸 후 창쟝에 투신했다는 애잔한 얘기를 들려준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의 딸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209년 유비와 정략결혼을 하는 손상향은 오우림(吴宇森) 감독의 영화 <赤壁>에서 배우 쟈오웨이(赵薇)가 당당한 여장부로 그려내고 있다.
유비의 형주 점령과 손-유 동맹 파기, 관우의 죽음과 촉-오 이릉대전, 유비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과 손상향의 장강 투신 등 <삼국지>의 극적인 장면들 중 몇몇이 장강(长江) 옆 언덕배기처럼 야트막한 이 산에서 펼쳐졌다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감로사 경내에 모셔져 있다는 유비와 손상향의 소상을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감로사로 드는 벽문 위에 '금초재망(金焦在望)'이라 쓰인 글귀는 맑은 날이면 경내에서 금산과 초산을 조망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감로사를 나서면 능선을 따라 회랑처럼 기와지붕을 인 돌계단이 놓였는데, 그 옆 평평한 능선 마루에 당나라 때 이덕유가 처음 건립하고 그 후 수차례 중수한 철탑이 천여 년 세월을 이고 굳건히 서있다.
경사진 능선이 다하면 북고산의 전·중·후봉을 잇는 감로령(甘露岭)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고개 양쪽이 모두 망망한 강물이라 용경(龍埂)이라 불리 었고 형세가 천태산에 견줄 만큼 험하여 천하삼험(三险)의 하나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능선을 따라 출구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산밑 가장자리 부근에 오나라 장수 노숙(172-217)과 태사자(166-206)의 묘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궁술의 명수로 유요 손책 손권의 휘하로 옮겨 다녔던 장수 태사자, 그리고 208년 남정을 나선 조조가 형주를 탈취하고 강동을 위협하자 주유 유비 연합군과 함께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대파한 노숙의 무덤과 부조상을 이곳에서 마주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출구를 나서니 긴 칼을 들고 마주 선 유비와 손권의 석상 앞에 이들이 자신들의 명운을 점쳤다는 시검석(试剑石) 바위 서너 개가 칼에 베여 갈라진채 연못 속에서 영웅들의 호기로운 기개를 전해준다.
대운하의 역사를 일람하고, 고운 선생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항저우 시후(西湖)에 버금가는 셔우시후(瘦西湖)의 풍치에 빠져 보고, 비각의 숲을 거닐고, 삼국지 영웅들의 숨결을 느껴 보고, 양저우와 전쟝의 별미도 맛보았으니 부족함이 없이 넘치는 일박이일 여정이었다.
전쟝 삼산(镇江三山) 가운데 하나인 진샨(金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진열관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기차표를 두어 시간 앞으로 당기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족한 줄 알고 욕심을 내려놓으면 두루 편해지는 것이 만사의 이치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