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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Jul 13. 2021

여산 진면목을 찾아서

이백과 펄벅의 발자취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는지 상하이 날씨는 열기와 습기로 연일 후끈하다. 일과 후 집에 들러 짐을 챙겨 들고 일상의 탈출구 상하이 남역으로 향했다. 저녁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상하이발 난창행 열차에 올라 잉워(硬卧) 침대칸에 배낭을 내렸다. 북경에서 제남으로 가는 첫 야간 침대열차 탑승 경험 후 십칠 년 만에 타는 야간 침대열차다. 난창에 도착하면 곧바로 지우쟝(九江)행 열차로 갈아탈 것이다.

동남쪽으로 흐르던 양자강이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변곡점에 위치한 도시 지우쟝(九江), 그 동남쪽에 포양후(鄱阳湖)를 우측에 끼고 루산(庐山)이 자리하고 있다. 루산은 지꽁산(鸡公山) 베이따이허(北戴河) 모깐산(莫干山)과 더불어 중국의 4대 피서지 중 하나라고 한다.

해발 1474미터 최고봉인 한양봉(汉阳峰)은 봉우리 171개를 거느리고 고개 26개, 골짜기 20개, 동굴 16개, 폭포 22곳, 계곡 18곳, 호수 연못 14곳 등을 품어 웅장하고 기이하며 험하고 수려하기로 이름이 난 산이다. 국가 5A급 풍경구, 세계문화유산, 세계 지질공원, 중국 10대 명산, 중국 4대 피서 승지 등의 타이틀만 보더라도 루산의 면목을 짐작할 수 있다.

루산을 찾게 된 계기는 다소 생뚱맞다.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침대열차 운행지역을 검색해 보니, 우한 카이펑 정쩌우 뤄양 창사 난창 등이 확인되었다. 악양루와 가까운 창사(长沙), 구조 고도(九朝古都) 양(洛阳), 칠조고도 카이펑(开封), 정쩌우(郑州) 등 마음이 끌리는 곳은 기차표가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쟝시성(江西省)의 성도인 난창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기차표가 남아 있고, 중국 3대 누각 중 하나인 등왕각(滕王阁)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상하이 남역 대합실
지우장 기차역

지인 중 한 분이 내 난창행 얘기에 "난창 루산도 좋습니다."라는 귀띔을 했다. 루산이 어디에 있고 어떤 산일까, 하는 궁금증에 검색을 해보니 '여산 진면목', '비류직하 삼천척'의 명시를 남긴 바로 그 여산이 아닌가? 그것도 난창에서는 불과 100km여 거리다. 그런 연유로 일정을 무박이일에서 일박삼일로, 주 목적지를 난창에서 루산으로 각각 변경하게 되었다.

열차는 정해진 시각에 출발했다. 창 측 접이식 간이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끼리끼리 얘기를 주고받는 승객들 모습이 전깃줄에 앉은 제비 떼 같다. 열 시 반경 소등이 되자 이내 취침 분위기로 바뀌었다. 열차는 3시 반경 상라오(上饶) 역에서 10여 분간 정차 후 아무런 일 없었던 듯 덜컹대며 다시 출발했지만 전전반측 뒤척이던 몸은 쉬이 잠들지 못한다.

머리를 둔 차창 밖 어둠 속으로 불빛과 들판과 나무들이 스쳐지나고, 침대에 뉘인 몸은 말 잔등에 올라탄 듯 철로 위를 구르는 열차 바퀴와 함께 울렁인다. 채 다섯 시도 되지 않아 날은 훤히 밝았다. 바지런한 사람들은 하나둘 좁은 침대를 벗어나 창가 간이의자에 앉아 어름거리는 잠을 쫓아내거나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병에 물을 담는 등 하루의 여정을 준비한다.

승무원이 예정 시각보다 10여분 연착이라고 한다. 지우장(九江)행 열차 출발시각까지의 여유 시간이 10분으로 줄어들어 마음이 다급해진다. 동선이 짧은 11호차 쪽으로 옮겨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뛰쳐 내려 환승통로를 거쳐 탑승 플랫폼으로 내쳐 달렸다. 지우장행 열차에 오르니 마음에는 안도감이 몸에서는 땀이 삐져나온다.

오전 8시경 차창  밖으로 루산이 미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열차가 이내 지우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호텔에 짐을 내리고 차를 불러 루산 북문 환승센터에 30여분 만에 닿았다. 입장료 160원 셔틀버스 탑승료 90원이다. 승객을 가득 채운 버스가 초입부터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들어 계곡 가장자리 비탈을 깎아서 낸 2차선 도로를 휘돌며 루산 속 깊은 곳으로 고도를 높여 갔다.

해발 1164미터 구링쩐(牯岭镇)


가파른 비탈 멀리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봉우리들이 숲 사이로 언뜻언뜻 수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감추었다 한다. 40여 분 만에 해발 1164미터 구링쩐(牯岭镇) 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공기가 서늘하여 쿨링(cooling)이라고도 불린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이덕립(李德立, 1864-1939)이 처음 이곳에 별장을 지은 후 16개국 사람들이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일본 프랑스 핀란드 등 상이한 풍격의 별장 636채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 상주인구가 2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 중에 이처럼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뿐이다.

사실 루산은 일찌기 <사기>를 편찬한 사마천이 오른 뒤로 도연명 이백 백거이 소동파 왕안석 육유 주희 등 역대에 걸쳐 1,500여 명의 명인들이 올라 4,000여 수의 시를 남겼다니 예부터 유명세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근현대에 접어들어서는 항일 투쟁기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이 회의를 개최하고,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등이 머문 별장이 산재하는 등 20세기 중반 중국 정치사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다.

루산의 주요 명소는 구링전의 버스 정류장을 중심으로  동선(东线)과 서선(西线)으로 나누어 있다. 동선(东线)과 서선(西线)을 따라 셔틀버스가 끊이지 않고 분주히 수많은 관람객을 실어 나르고 있다.

북문 환승센터에서 타고 온 버스의 등받이에 적혀 있던 "산띠에촨에 가지 않으면 루산에 왔다고 할 수 없다(不到三叠泉 不算庐山客)"는 문구도 있었지만, '여산 제일경'을 제일 먼저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미루 별장, 공산당 회의 구지, 오로봉 입구 등을 거쳐 싼디에촨(三叠泉)으로 향하는 동쪽 노선버스에 올랐다.

싼디에촨 정류장에서 내려서 계곡 사이로 난 레일 차로 10여 분을 내려간 후, 좁은 계곡 수 천 개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싼디에촨(三叠泉) 폭포로 내려갔다. 남녀노소 관람객들이 땀과 습기에 젖은 채 힘겨워하며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고, 군데군데 가마꾼들은 배를 드러낸 채 편한 자세로 드러눕거나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인다.

계곡 굴곡진 비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 아래 저 멀리서 폭포수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폭포가 상단 3층 부분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폭포 아래쪽으로 온전히 내려서니 폭포가 제 본모습을 펼쳐 보인다. 호수에 갇힌 물처럼 구름이 짙게 드리운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 물줄기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지경이다.

공산당 회의 구지(旧址)와 펄벅 흉상

이백이 <망여산 폭포>에서 높이 155미터 이 폭포보다 낮은 폭포를 보며 '비류직하삼천척(飞流直下三千尺)'이라고 한 것은 과장이었겠지만, '은하수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하구나(疑是银河落九天).'라는 싯구는 싼디에촨 폭포에 딱 걸맞다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조금 더 과장을 보태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싼디에촨 폭포를 뒤로하고 내려왔던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약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셔틀버스를 타고  구링쩐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걸어 내려오며 메이루(美庐) 별장과, 공산당 회의 구지(旧址), 이곳서 <대지>를 집필한 펄벅을 비롯한 문인들의 흉상 등을 서둘러 훑어보았다.

점심을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서선(西线) 쪽의 금수곡(錦繡谷) 입구로 들어서서 1.5km여 계곡을 조망하며 산허리 둘레로 놓인 관산로(观山路)를 따라 선인동으로 휘돌아 나왔다.

소동파가 '여산 진면목'이라는 싯구를 남긴 서림사(西林寺), 백거이의 친필이 있다는 화경정(花径亭)',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현장 강왕곡(康王谷), 주희의 백록동 서원, 함파구(含鄱口), 오로봉(五老峰) 등 지척에 있는 숱한 명승지를 둘러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루산의 절경과 이곳을 다녀간 명인들의 자취를 더듬을 보면서 인생은 실로 순간처럼 짧고 예술은 조금 더 길고 자연은 영원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인간군상들이 한없이 초라하다고 느껴졌다. 또 한편으론 산마루 구석구석까지 아스팔트가 깔리고 셔틀버스와 차량들이 오가고 수많은 관람객들로 북적이는 천하 명산 루산이 왠지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버스는 굽이도는 내리막 산길을 롤러코스트처럼 빠르게 질주하고 머리에는 어지럼증이 인다. 천둥 벼락처럼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듯 분주하고 덧없이 지나간 인생처럼 다양하고 아름다운 루산의 풍광을 벼락치기 하듯 한 번 훑고 뒤로하기가 못내 아쉽다. 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기엔 하루가 턱없이 짧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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