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 시(詩), 그리고 아리랑
거미줄처럼 얽힌 수도권 전철 노선을 해독(解读)하며 목적지로 향한다. 야탑에서 왕십리, 왕십리에서 망우, 망우에서 천마산까지 서로 얽히고설킨 전철과 철도가 만나는 환승역에서 분당선, 경의 중앙선, 경춘선으로 갈아탔다.
ITX청춘열차로도 불리는 경춘선, 끼리끼리 무리 지어 타고 내리는 승객들 절반 이상은 늙수그레한 젊은 노인들로 '백세시대'의 일상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객실 풍경은 콩나물시루 같이 혼잡한 객차 안에서 스마트폰에 빠져 침묵이 흐르는 시내의 전철과는 사뭇 다르다. 교외로 향하는 승객들은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설렘과 재잘거림으로 생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설렘과 재잘거림으로 생기가 넘치는 교외선 전철
용산을 출발해서 춘천으로 가는 98km 경춘선, 망우역에서 환승해서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친구 M과 합류했다. 신내 갈매 별내 퇴계원 사릉 금곡 평내호평을 지나면 천마산역이다.
사릉역과 금곡역 중간쯤에 위치한 사릉(思陵)은 비운의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릉이다. 왕위를 찬탈하고 지아비를 죽인 잔혹 무도한 원수 세조부터 중종까지 다섯 왕의 치세, 그녀는 18세 때 단종과 생이별 후 한 많은 삶을 살다가 82세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M이 들려주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생은 더 참담하고 애달펐다.
작지만 산뜻한 모습의 천마산역, 2013년 개통된 이 역 부근엔 빌라트와 마석 가구공단이 있지만 이용객 수는 수도권 전철역 가운데 최하위라고 한다.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 중 하나인 천마산의 들머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를 포함 등산객 네댓만을 내려놓고 전차는 멀어져 갔다.
산행 들머리는 남북으로 뻗은 천마산 남쪽 자락으로 역사에서 멀지 않은 빌라촌 뒤쪽이다. 벌목을 했는지 들머리 산자락 오른쪽 능선은 온통 칡넝쿨 산딸기 등 낮은 관목과 수풀로 뒤덮였다. 흙으로 덮인 바닥은 수분을 머금어 라텍스처럼 폭신하여 걷기가 편하다. 태풍이 지나고 난 파란 하늘 멀리 뭉게구름이 피었고 바람은 능선을 타고 오르며 산객의 땀을 씻어준다.
숲과 바람에 온전히 몸을 맡기다.
때로 비탈을 오르고 너덜길을 걷는 순간순간 쏟아지는 땀을 훔치며 언뜻언뜻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주워 담으려 했던 기억들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산행은 구차한 생각들은 다 물리치고 온전히 숲과 바람에 몸을 맡겨 보고 싶다.
등산로 옆 잘 익은 산딸기 몇 개를 따서 입에 넣으며 관목 숲이 끝나는 비탈을 오르면 능선 마루다. 뒤돌아 보니 화도읍 묵현리 마을이 산자락에 아늑히 안겨있고 오른쪽 산자락의 스키장 슬로프가 한눈에 들어온다.
걷기 좋은 긴 솔숲 능선이 이어지고 태양은 강렬하지만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체온을 빼앗아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해발 470미터 부근에서 정상으로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되면서 흙길이 끝나고 곳곳에 바위와 암벽이 막아서며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기암괴석과 노송이 어우러진 모습이 절경이다.
바위로 덮인 해발 812미터 천마산 정상에 섰다. 사방으로 뻗어 내린 줄기는 짙푸른 물감으로 두터운 필치로 그려낸 유화처럼 꿈틀댄다. 날이 맑아 남서쪽으로 한강 L사 빌딩 남산타워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서쪽으로 한눈에 보이는 북한산 불암산 수락산은 흰 암벽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성계가 "손이 석 자만 더 길었으면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는 '천마산(天摩山)'이라는 이름이 손색이 없지 싶다.
천마산은 정상 북쪽으로 능선을 길게 뻗어 철마산 자락과 만난다. 이쪽 능선은 올라온 쪽과 달리 중간중간 성곽 보루처럼 기암괴석이 턱턱 앞을 막아섰거나 능선 아래 텁석텁석 비껴 앉아 있다.
산(山)과 시(詩), 그리고 아리랑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인지 이정표도 일정 간격으로 놓여 어디쯤인지 얼마를 더 가야 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산행을 돕는다. 이정표와 함께 짧은 시를 새긴 목판을 걸어 놓아 산행의 피곤함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녁에, 김광섭>
... 흰구름 바다처럼 깔려 있는데 가을빛은 하늘에 충만하구나 천지사방은 둥글어 기울어짐 없건만 천년 세월은 넓고 멀어 아니 돌아오네... <백운대에 올라, 정약용>
산에 오르다
꽃 한 송이를 보았네
나를 보고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산에서 내려오다
다시 그 꽃을 보았네
하늘을 보고 피어있는 누님 닮은 꽃
<산에서 본 꽃, 오광수>
주금산 철마산 천마산과 서리산 축령산 운두산 사이를 흘러 북한강에 흘러드는 수동계곡 쪽에서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은 이마에 솟는 땀이 흘러내릴 틈을 주지 않고 매미들의 떼창은 귀를 시리게 한다.
돌핀샘 바위, 예로부터 험한 것으로 알려진 괘라리(掛蘿里)에서 수동면으로 넘는 괄아리고개, 보구니 바위 등 특이한 이름의 바위와 고개로 이어지는 해발 500미터가 넘는 긴 능선을 걷는다. 철마산 아래 오남저수지로 빠지는 쇠푸니 고개를 지나면 길이 가파르고 고도가 급하게 올라간다. 해발 711미터 철마산 정상은 사방으로 툭 트인 경관을 펼쳐 보인다.
정상 북쪽 능선은 8km여 거리의 주금산으로 내달리지만 지친 몸은 진접 쪽으로 발길을 이끈다. 하산길 중간 능선 마루 탑처럼 쌓아 올린 돌무더기 위에 '목표봉'이라는 나무 팻말이 서있다. 젊은 엄마가 어린 두 딸과 함께 해발 400여 미터 만만찮은 높이의 이곳까지 올라오고 있다. 산 아래 주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코스인 모양이다.
"...
그래 많이 힘들제?
여기 잠시 쉬었다 가거라
긴 숨 한 번 크게 들이켰다가
쭉 내뱉어 보거라
세상사 뭐 그리 부러운 님 없을 게다
그래도 어디 한 구석 짠 한 데가 있거든
여기 과라리 고갯마루에
무심한 돌 하나 던지거라
..."
<과라리 아리랑, 작자미상>
때로 정상을 지나고 걷는 하산길 능선이나 비탈은 힘들고 번거로운 잉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들머리의 설렘, 가파른 정상으로 치닫는 힘든 클라이맥스, 평탄한 능선과 내리막길 등 모든 여정은 기승전결처럼 긴 산행의 소중한 부분이다.
과라리봉 부근에서 만난 아리랑, 그 노랫말처럼 마음속 돌 하나를 고갯마루를 향해 무심히 던지고 철마산 자락 해참 공원으로 빠져나오며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