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지엔성(福建省)으로의 출행 세 째 날이다. 네 시에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취안저우(泉州)에 도착 후 택시기사의 강권(?)으로 애초 취안저우 박물관을 찾아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였던 이곳의 역사를 살펴볼 기회를 미루고 그 옆에 자리한 민타이위엔(閔台緣) 박물관을 관람했었다. 그저께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연속해서 박물관을 둘러보려니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어제저녁을 든 식당에서 식당 가족들과 나눈 이러저러한 얘기들 중에 '취안저우 Must go place'에 대한 몇 가지 팁을 얻었었다.
그중에서 치과에서 일한다는 식당집 딸이 첫 번째로 꼽은 곳이 칭위엔산(淸源山)이었다. "이른 아침에 가면 일인당 70위안가량의 입장료를 낼 필요 없이 입장할 수 있다"는 식당 여주인의 말도 솔깃했지만, 내일 "최고 기온 35도"라는 날씨 예보가 새벽 산행 결심을 굳히게 했다. 한국으로 일시 귀국 후 혹여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우려로 거의 집에만 머물렀고, 중국으로 돌아와서도 10일간의 격리생활로 인한 운동 부족으로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택시 기사에게 10여 킬로미터 남짓 거리의 칭위엔산 입구로 가자고 부탁했다. 기사 양반은 어제저녁 여섯 시에 일을 시작해서 열두 시간을 꼬박 운전을 하고 이제 곧 퇴근할 것이라고 한다. 건설현장을 지키는 꽁런(工人)이나 택시기사 등 인민의 나라 중국의 인민들의 생활상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여유로운 시내를 질주하여 곧 칭위엔산으로 난 긴 가로수 길로 접어들더니 10여 분 만에 입구 도착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패루 위에 '칭위엔산(淸源山)'이라는 글씨가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녹색으로 쓰인 글씨에는 붉은색 글씨 일색의 중국 여느 명승지와는 달리 이 산의 품격이 배어 있는 듯 느껴진다.
천산(泉山), 제운산(齐云山), 북산(北山), 삼태산(三台山) 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취안저우 십팔경의 하나로 주봉은 해발 498미터이고 36 동천(洞天)과 노군암(老君岩), 천수암(千手岩), 미타암(弥陀岩), 벽하암(碧霄岩), 서상암(瑞象岩), 호유천(虎乳泉), 남태암(南台岩), 청원동(清源洞), 사은암(赐恩岩) 등 18 승경이 있다고 한다.
04:45경 매표소와 검표소를 유유히 스쳐 지나서 산자락으로 접어들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서 있는 뱅골 보리수가 사방으로 뻗은 가지와 머리 높이 줄기부분에서 굵은 수염처럼 생긴 기근을 땅바닥까지 늘어뜨린 모습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노자 출관'을 형상화한 조각상을 지나쳐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노군암(老君岩) 입구로 들어서니 산정의 부드러운 능선 푸르스름한 윤곽을 등지고 거대한 노자 석상이 형체를 드러낸다. 어린 학생들 한 무리가 나를 스쳐 계산을 따라 오른다. 재잘대는 소리가 금세 멀어져 간다. 초행에 어두운 산길 점찍어둔 몇몇 승경을 제대로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염려는 금세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어둠에 묻혀 속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긴 ‘원원동천(元元洞天)’이라는 동굴 부근에서 또 한 무리의 어린 여학생들과 젊은 어머니와 아들 등 많은 사람들이 헤드랜턴이나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서 앞질러 산정으로 난 계단을 올라간다. 웃통을 벗어젖힌 노인 한 분은 익숙한 듯 갈림길에서 사람들을 앞서가며 방향을 잡아준다. 입구에서 출발한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높아진 고도가 나뭇가지 사이로 낮은 소리로 웅웅대며 깨어날 채비를 하는 도시의 불빛을 눈 아래 펼쳐 보인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3시쯤 오색약수터에서 출발했던 설악산 야간산행의 고된 기억이 떠오른다.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나 야간산행이나 종주산행을 동경하고 한 번쯤 감행하기도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헤드랜턴에 의지한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파른 산길을 서너 시간 오르는 고통을 참는 강한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힘겨워하는 몸을 간간이 가파른 계단 길에 앉히고 물을 마시며 잠깐씩 휴식을 취했다. 젊은 때에 비해 나이가 들수록 땀을 조절하는 신체 기능도 점차 손을 놓게 되는지 이마에서는 땀이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앞서 방향을 잡아주던 할아버지처럼 웃통을 벗어젖히고 싶다.
좌측으로 칠부 능선쯤으로 보이는 산의 가슴팍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길로 접어들자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시가 밝은 불빛으로 형체를 드러낸다. 다시 산정 쪽으로 오르막 계단 길이 시작되기 전에 위치한 작은 정자에서 한동안 점점 불빛에 쌓인 취안저우 시내를 조망했다. 이처럼 도심 가까이에 자리한 산은 시민 누구나 조금만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을 떤다면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야경과 일출을 함께 감상하며 친구나 가족들과 유대를 탄탄히 하고 건강까지 챙기는 일석 삼사조의 혜택을 안겨 주는 고마운 존재다.
금방이라도 산정에 다다를 듯 보이던 산은 암반 골격 드러내며 계단 길이 더 가팔라지며 이리저리 방향을 비틀며 산행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치마 차림에 구두를 신고 한 손에 손가방을 든 젊은 엄마는 첫 비행을 준비 중인 어린 독수리의 어미처럼 아래쪽 어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어서 올라오라고 독려한다.
경로와 고도를 제대로 잡아내지 내지 못하는 우리나라 산악용 산행 어플이 해발 410미터라고 알린다. 젊은 엄마는 “곧 도착한다.”며 아들을 재촉한다. 산행의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산정을 지척에 둔 지점으로 이 산도 예외는 아니다. 머리를 곧추 쳐든 긴 목의 도도한 여인이랄까. 마지막 고비를 넘기니 너른 남태암 아래 능선 마루가 모습을 드러내고 날도 훤히 밝아와 어제 방문했던 시후(西湖)와 박물관을 비롯해서 취안저우 시내를 한눈에 펼쳐 보인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과 학생들이 봉우리의 너른 전망대 안전 난간에 다가서거나 그 뒤 너럭바위 위에 모여 앉아 도시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필시 일출을 고대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오늘 취안저우의 일출 시각을 찾아보니 05:58이라고 하니 해는 벌써 솟아올랐지만 구름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이 틀림없으련만 사람들은 좀체 자리를 뜨려 하질 않는다. 저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개방 시간 전에 정문을 통해서 들어왔을 터이니, 굳이 낮 시간에 입장료를 내고 오르는 사람은 필시 이 고장 사람이 아니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우봉(右峰) 봉우리 정상부에 나란히 자리한 도교사원 삼청보전(三请宝殿)과 불교사원 남대암(南臺岩) 앞뜰에서는 남녀 수도승 둘이 각기 사원 화강석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다. 목탁 소리는 들리지 않고 알 수 없는 산새들만 제각기 맑고 높은 소리로 재잘대며 이른 아침 산정의 아침에 활기를 돋운다.
남대암으로 들어서서 대웅전을 둘러보는데 뜨락을 쓸던 할머니 비구니가 뒤따라 들어오며 분향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 분향은 "광명 평안 자유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말에 복전을 치르고 병뚜껑 생김새 용기에 담긴 일곱 개 초가 놓인 연꽃받침 모양새 접시를 건네받아 불을 붙여 뜨락 아래쪽 향로에 올렸다. 향을 피우고 촛불을 밝혀 몸을 낮추며 분향하는 짧은 순간에 왠지 자기 자신의 내면이 좀 더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대웅보전 좌우의 옥 불전과 지장전, 그리고 대웅보전 뒤쪽의 천연 암벽을 깎아서 조성한 대형 와불(臥佛)을 둘러보고 널찍한 후원을 한 바퀴 휘돌아서 느슨한 내리막 경사의 산길을 따라 미타암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올라올 때의 반듯하게 깎은 돌로 가지런히 놓은 계단과 달리 자연석을 촘촘하게 깐 좁은 돌길은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적어 고즈넉하다. 등산화가 아닌 일반 운동화를 신은 발이 내리막 산길을 불편해한다. 가파른 경사 길에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니 오르고 내려가는 코스를 잘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채색 구름이 태양을 가두어 치솟아 오르려는 기온을 붙잡아 두어 그다지 무덥지 않아 다행이다. 30여 분을 내려오니 텃밭이 딸린 매점 두어 개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 해발 약 220미터 축구장 반절 넓이의 인공 저수지 비취호(翡翠湖)는 비취색 물빛에 산 그림자를 담고 있다. 잦아지는 이정표는 이제는 눈에 익은 이름의 명소들을 보여주었다가 감추었다 하고 아래위로 갈림길을 내놓지만 갈라진 길은 아래쪽에서 다시 만나곤 한다.
미타암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경사에 돌출하고 절벽에 박혀 있는 큰 바위들 틈새로 굴곡져 있다. 급강하 돌길을 족히 3~400여 미터 내려서면 거짓말처럼 반듯한 화강석이 바닥이 깔린 마당이 딸린 미타암(彌陀岩) 석굴이 나타난다. 암벽에 기대어 선 화강석 지붕과 외벽을 갖춘 인공 석굴 안에 족히 높이가 4미터쯤 되는 동제 아미타불 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미타불은 2.5미터 높이 아치형 입구를 통해 석굴 밖 툭 트인 전방의 취안저우 시내를 한눈에 굽어보고 있다. 1364년 조성했다는 이 석굴은 마치 석굴암의 축소판을 지척에서 보는 듯 감흥이 무궁하다. 한참 동안 석굴 안 아미타불과 아래쪽 시내를 번갈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나서 발길을 돌린다.
미타암 석굴 아래 계단 옆 바위에 ‘복(福)’이라 새긴 각자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석굴 아래 소담한 규모의 미타암 불전에는 아미타불이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협시를 받으며 자리하고 있다. 기원 패가 빼곡하게 걸린 암자 앞마당의 기복대에는 어제 이곳을 찾은 자오(趙) 모씨의 "모두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길 희망한다(希望所有人身體好學習好)"는 패도 눈에 띈다. 저 많은 패(牌) 하나하나 마다 이른 새벽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독려하며 500미터에 가까운 높이의 산을 포기하지 않고 오르던 젊은 엄마들과 젊은 학생들의 소망이 담겨 있을 것이다.
미타암 아래쪽 널찍한 터에 홍일 대사(弘一大師, 1880-1942)의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음악과 그림 교사로 재직하고 음악가, 미술 교육가, 서예가이자 중국 연극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가 삭발하고 승려가 된 연유가 궁금하다. 사리탑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 주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염불 소리 대신에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A. Dvorak, 1841-1904)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 2악장 <꿈속의 고향>의 은은한 선율이 중국어 버전 노랫말과 함께 흘러나와 귀를 쫑긋하게 한다.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아
지금은 사라진 친구들 모여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반딧불 쫓아서 즐거웠건만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들릴 듯 말 듯한 선율이 돌아서는 발길을 따라오며 산안개처럼 숲과 내 마음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그 아래쪽 큰 바윗돌 위에 어른 키 높이보다 더 높은 '제일산(第一山)'이라 쓰인 표지석이 있어 사진 한 장을 담았다. 아무런 수식 없이 ‘제일 산(第一山)’이라고 쓰인 글씨에서 이 지역 사람들의 이 산에 대한 담담한 자부심과 솔직함이 담겨 있어 보인다.
제일 산 표지석 옆에 자리한 작은 절집 천수암(千手岩)을 둘러보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다 작은 능선 너머 구양 서원(歐陽書院)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원 옆문 붉은색 담벼락으로 푸른빛 긴 줄기를 늘어뜨리고 그 끝에 연보랏빛 서양 란을 닮은 꽃을 서너 송이씩 피운 모습이 눈 속으로 들어오며 문득 소담한 깨달음을 얻은 듯 마음이 미쁘다. 이 서원은 천산(泉山), 소산(小山), 석정(石井) 등 서원과 함께 송원명(宋元明) 시기 취안저우의 4대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2021년에 복원한 서원 건물 내부에는 책, 기념품, 음료 등을 판매하는데, 초등학교 교실처럼 탁자와 의자가 예닐곱 조 놓인 작은 교실도 한편에 자리한다.
어느덧 산자락까지 내려왔다. 주차장 쪽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가며 산정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니 틈틈이 나팔꽃이 얼굴을 내민 무성한 산림 속에서 여치, 매미, 귀뚜라미 등 곤충들의 합창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다. 주차장으로 내려서니 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킨다. 노군암(老君岩)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니 노군암 조각상 주변과 그 앞 벤치에는 마치 노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몰려든 제자들처럼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다. 그 아래쪽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묻다"라는 제하의 조상(造像) 앞에 잠시 섰다가 청원산 매표소 정문을 빠져나왔다.
입구의 칭위엔산 안내도를 들여다보니 노군암, 남대암, 미타암, 홍일 법사 사리탑, 천수암, ‘제일산’ 표지석, 구양서원 등 제법 많은 곳을 훑어보며 원점 산행을 한 셈인데 이 산의 서른여섯 동천(洞天)과 열여덟 승경 중 더 많은 곳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 아쉬움은 취안저우 시민들과 예상치도 못한 새벽 산행을 함께 하면서 부지런함, 끈기, 목표에 대한 열망, 가족애 등 이곳 사람들의 내면을 가까이서 좀 더 깊이 들여다본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으로 충분히 벌충하고도 남지 싶다.
기실 지금껏 다녀왔던 거의 모든 여행에서 무언가 조금 모자라고 아쉬움이 남고 과한 욕심에 사로잡혀 노심초사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여행은 주어진 시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여 그 속에서 스스로 깨우침을 얻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그러고 보면 100% 만족을 안겨주지 못하는 점이 일면 여행의 묘미일 수도 있겠다.
호텔에 09:30경 도착하여 식당으로 가니 어제 체크인할 때 무료로 아침을 07~10:00 사이에 먹을 수 있다는 직원의 말대로 흰죽 삶은 계란 애호박 졸임 등 뷔페식으로 아침 허기를 채우기에 흡족했다. 이른 아침 호텔을 나서서 A5급 국가풍경구로 지정된 명산을 훌쩍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와서 호텔에서 준비한 아침까지 먹게 되니 술잔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 가져온 관우처럼 자못 으쓱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론 산행 복장이나 둘러볼 코스 체크 등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네 시간여 산행을 서둘러 마치고 돌아왔으니 심신의 피로도 만만찮다.청원산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 택시 기사의 개원사나 소림사가 볼만하다는 말이 귓전에 맴돌기도 했지만, 피곤한 몸이 상하이로 복귀하는 비행편 시간을 당기면 좋겠다고 채근한다. 뜻하지 않게 이른 새벽부터 타국의 명산을 한바탕 꿈처럼 둘러본 개천절 날이다. 22-10-03L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