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자 크리스마스 이브다. 중국이 뒤늦게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통제를 갑자기 해제한 지 두 주일쯤이 지나자 주위에 확진자가 속출하고 있다. 나도 그 물살에 휩쓸렸다가 어느 정도 회복된 몸을 일으켜 일주일 만에 출근을 했는데, 확진으로 출근을 못하는 동료들이 많아 공관은 한적한 기운마저 돈다.
작년 이맘때쯤 수향(水乡) 저우좡(周庄)을 찾았던 기억이 좋게 남아 있다. 그래서 금년이 가기 전에 상하이에서 약 80km 거리에 통리호(同里湖)를 우측에 끼고 자리한 쑤저우의 통리(同里) 구쩐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번 출행은 동료 P님과 함께 했다.
아침 7시쯤에 상하이를 출발해서 후위(沪渝) 고속도로에 올랐다. 예전에 차를 몰고 상하이 바깥으로 출행을 할 때 화물차와 승용차로 붐비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고속도로를 통행하는 차량이 많지 않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행과 이러저러한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통리에 도착했다. 출발 시각부터 약 한 시간이 지났다. 차에서 내리니 에어샤워를 하듯 얼굴에 확 와닿는 청량한 공기가 상쾌하다.
북경 소재 세계관세기구 아태지역연락사무소에 근무할 때인 십팔 년 전 이맘때 이곳을 처음 방문했었다. 쑤저우 해관 훈련소에서 개최된 세미나의 부대행사로 마련한 기회였었다.
당시에는 북경과 그 부근 등 북방지역 몇몇 곳만 둘러본 경험 밖에 없었던 터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 교차하는 작은 운하와 그 위에 놓인 아치형 돌다리, 다양한 먹거리를 파는 즐비한 식당들, 화려하고 정치하게 꾸민 여러 원림(园林) 등 강남 지역 전형적인 옛 수향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루즈(甪直), 저우좡(周庄), 난쉰(南浔), 시탕(西塘), 우쩐(乌镇)과 더불어 강남 6대 구쩐(古镇) 중 하나로 송나라 때부터 통리(同里)'로 불리기 시작한 천여 년 역사를 가진 전형적인 강남 수향(水鄕) 마을이다. 그물처럼 얽힌 15개 수로가 7개로 나눈 마을을 49개의 다리가 연결하고 있는 총면적 33헥타르의 통리는 '동양의 작은 베니스'로도 불린다고 한다.
구쩐 북문 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행자센터에서 입장권을 100위안에 끊었다. 매표원이 경락당(耕乐堂), 숭본당(崇本堂), 퇴사원(退思园), 진주탑경원(珍珠塔景园) 등 여러 볼거리 가운데 송석오원(松石悟园)은 관람을 할 수 없다고 뀌뜸을 해준다.
구쩐을 소개하는 안내지에 이곳은 종횡 수로에 의지해서 명청 시대 저택 30여 채, 고유 풍모의 돌다리 49좌 등이 남아 있으며, 만청(晩淸) 시기 정원 건축의 경전으로 불리는 퇴사원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스캔하고 입구로 들어서서 운하 위에 놓인 영안교(永安桥)를 건너고 운하와 나란히 난 푸관가(富观街)를 따라 걸었다. 구쩐 북문 쪽에서 출발해서 시곗바늘 역방향으로 돌며 구쩐을 한 바퀴 샅샅이 둘러볼 요량이다.
오른쪽으로 수로에 접한 좁은 길 왼쪽으로 높다란 담장이 이어지더니 위풍당당한 패루가 나타났다. 나중에 확인하니 진주탑원의 패루다. 진가패루는 저택, 화원, 사당과 함께 진어사부, 즉 현재의 진주탑 경원의 한 부분으로 명나라 신종 때 남경 감찰어사를 지낸 진왕도(陈王道, 1526~1576) 사후인 만력 8년(1580년)에 그의 청렴함과 뛰어난 치적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세웠다고 한다.
냉랭하고 청정한 겨울 아침의 공기에 쌓인 구쩐 거리엔 관광객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몇몇 마을 촌로들만 수로에서 채소를 씻거나, 양팔 넓이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거나, 수로 위에 걸친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거나, 집 앞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햇살을 쬐는 등 한 폭 그림 같은 옛 수향 속을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흰 벽에 잿빛 기와를 얹은 높은 담장 등은 우관중 등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던 강남 수향 전통 건축양식 그대로다.
구쩐 북서쪽 모서리에서 남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현재 관람을 할 수 없다는 송석오원(松石悟园) 옆에 옛 태호 수리동지서(太湖水利同知暑) 건물이 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달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중국 내 세 번째로 큰 담수호인 태호(太湖)의 수자원 관리를 위해 청 옹정 8년인 1730년에 세운 시설로 강남 태호 유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리서 관아 건물이라고 한다. 타이후 동쪽 20여 km 떨어진 이곳에 수리 관리 사무소를 설치한 연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전시관은 작은 마당 두 개를 가운데 두고 각 마당의 사방으로 복층의 목조건물을 앉힌 북방 지역의 쓰허위엔(四合院) 양식을 닮았다. 내부에는 태호의 지리적 의의와 개발의 역사, 항저우에서 쑤저우를 거쳐 쩐장까지 이어진 강남운하, 옛 농기구, 주변의 구쩐들 등에 관한 사진과 사료 등 오목조목 전시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전시관을 나서서 좁은 거리를 따라가니 이내 청정한 물빛의 수로가 나온다. 어른 허리 깊이 물속은 투명하여 무성한 수초가 선명히 들여다 보이고 수로 옆 줄지어 선 가로수 그림자가 수면 위에 어른거린다. 선착장(码头) 옆에는 분주히 관광객들을 태우고 다녔을 작은 나룻배들이 두꺼운 천을 덮어쓴 채 묶여 있다.
유람선 선착장 맞은편에 경락당(耕乐堂)이 자리한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 명나라 때 처사 주상(朱祥)이 지은 것으로 전통적인 전택후원(前宅后园) 양식의 2층 건물로 네 개의 문루, 접객 홀과 다실, 주방, 누각, 화원과 회랑, 돌로 쌓은 가산(假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뿌리 조각관으로 꾸며져 있는 건물 안에는 항저우 출신의 나무뿌리 조각가로 '고급 근예(根艺) 미술사' 지위에 오른 장쩡(张正, 1958~)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숭이들이 정교하게 조각된 작품 '화과산(花果山)'
먼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높이 2.7m 넓이 3.4m의 거대한 나무뿌리를 광배 삼아 좌정한 미타(弥陀) 조각을 시작으로 각종 목불, 맹수와 맹조 등 동물, 식탁과 의자, 인물상 등 백 수십 여 작품이 일층과 이층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복잡하고 울퉁불퉁 굴곡진 나무뿌리에 보일 듯 말 듯 한 크고 작은 원숭이 여러 마리가 서로 어우러져 과일을 따는 모습을 표출해 낸 '화과산(花果山)'이라는 작품 앞에서는 연신 스마트폰 셔트를 누를 수밖에 없다.
벽면에 걸린 수묵화와 강남 풍경을 담은 채색화 등과 어우러져 전시되어 있는 정교하고 오묘하며 때론 기괴하기조차 한 뿌리 조각품 작품 하나하나에 저절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런 작품들이야말로 '천하제일'이라는 수식이 결코 과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락당을 뒤로하고 세 돌다리가 모여 있는 '삼교징취(三桥景区)'라는 지점의 오금교(乌金桥) 위에 서니 수로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 가지 사이로 내리치는 아침 햇살이 진초록 수면에 닿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습이 이채롭다.
한기에 곱은 어린아이 손처럼 앙증맞은 잎사귀를 달고 있는 한그루 애기단풍나무가 맞는 숭본당(崇本堂) 입구 벽면에는 '강남수향혼속관(江南水乡婚俗馆)'이라는 이름이 같이 붙어 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입장권 뒷면의 큐알 코드로 스캔을 하고 입구로 들어섰다.
이 건물은 민국 원년인 1912년 통리 출신의 첸여우친(钱幼琴)이 사들여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문루 벽면 등을 장식하고 있는 용, 잉어, 향초, 꽃, 산수화 등 각종 상스러운 조각, 그림, 글씨가 건축물에 고상함과 품격을 한껏 높여 주고 있다. 경락당과는 건축 양식이 유사하고 규모는 다소 작아 콤팩트하지만 우아하고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내부에 전시된 남녀 및 아동 의복, 전족 신발, 화로, 혼례 예단 목록, 혼례복과 장식품, 사주첩, 결혼 증서, 결혼사진, 다기, 간장이나 밥 등을 담던 목제 용기, 휴대용 만화 교재, 완구, 신혼부부용 침대 등 중화민국 시기 혼례 관련 용품 등을 둘러보았다.
숭본당(崇本堂) 관람 후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진주탑원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출입구 위 벽면에 '시어고방(侍御古坊)'이라는 글자가 적힌 문루를 지나 진주탑원 경내로 들어서니 연분홍색 발랄한 처녀 같은 동백꽃이 맞아준다. 부산 중앙동 세관 화단에 화사하게 피어 출근길 마다 객수를 달래주던 그 동백을 닮았다.
진주탑원(珍珠塔园)은 27 무(亩), 즉 약 18만m² 축구장 2.5배 넓이로 진어사(御史) 저택, 정원, 옛 사당, 진씨패루(牌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남경 감찰어사 진왕도의 딸과 방경의 러브스토리 <진주탑>이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탄생했다고 한다.
그 이름을 보고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실 '진주탑(珍珠塔)'은 건축물이 아니라 중국 청나라 때 나온 작자 미상의 탄사(弹词)였던 것이다. '탄사(弹词)'는 송과 원명을 거쳐 청대(请代)에 크게 번성한 사설(说), 해학(噱), 연주(弹), 노래(唱) 등으로 이루어지는 비파 반주에 랩 형식의 곡예(曲艺)이다. 우리의 판소리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강남지역 민간에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 <진주탑>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건륭제 때 주수사(周殊士)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 통리에 전해져 내려오던 젊은 남녀의 사랑과 역경, 입신양명,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그 주된 내용으로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방경(方卿)은 집안이 몰락하여 상양(襄阳)에 가서 고모에게 돈을 꾸려하다가 모욕을 당한다. 사촌누이 진취아(陈翠娥)가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매우 값진 보물인 진주탑을 몰래 방경에게 준다.
방경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둑을 만나 진주탑을 빼앗기게 되고, 지나가던 관리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후에 관리의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고, 모진 고난을 겪은 어머니와도 재회하게 된다. 성공한 방경은 고모를 찾아가 옛날 자신을 홀대한 것을 용서하고 취아와 혼인을 하며 대단원의 결말을 맺는다.//
저택의 현관 격인 의문(儀門), 손님을 맞이하는 차청(茶厅), 관혼상제 등 대사를 거행하던 송학도가 걸린 굉략당(宏略堂), 주인 가족이 거주하는 내택인 란운당(兰云堂)과 가속들이 거주하던 당루(堂楼), '보춘도(報春图)' 제하의 매화 한 폭이 걸린 옥란당(玉兰堂)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굉략당 후문 양쪽에 그 유명한 '청명상하도(清明上河图)'의 몇 장면이 그려진 어른 키 높이의 대형 도자기 병이 양쪽에 서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중국 국보급 문화재로 북경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명상하도'는 북송(北宋) 때의 화가인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너비 24.8cm, 길이 528.7cm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청명절(淸明節) 날 인파로 흥청거리는 수향의 모습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쯤 상하이 중화예술궁 특별 전시실에 파노라마 영상으로 재현해 놓은 '청명하상도'를 접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도 전형적인 강남 원림답게 깊숙한 안쪽에 아담한 연못과 돌로 쌓은 작은 가산(假山)을 빼놓지 않고 조성해 놓았다. 연못 속엔 붉은 잉어 무리가 유유히 유영하고 연못 가엔 배 모양 정자를 앉혔다. 가산의 소나무 가지마다 복, 행운, 건강, 부귀, 좋은 인연, 성공 등을 기원하는 패가 빼곡히 걸려 있다.
진주탑원 출구 옆에 '취강남(醉江南)'이라는 주류 상점 하나가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섰다. 열 평 남짓 넓이의 상점 안에는 양메이주(杨梅酒), 꾸이화주(桂花酒), 오디주(桑葚酒) 등 다양한 종류의 과실주들이 500ml쯤 크기의 도자병에 담긴 채 벽 장식장처럼 생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인장은 헤이룽장 출신으로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시음용 컵에 두어 가지 술은 따라 주며 시음을 권하는데, 입술을 타고 부드럽게 혀 끝에 닿는 향기롭고 독특한 풍미에 금세라도 매료될 듯하다.
알코올 도수는 8~52도로 다양한데 장식장의 수집품처럼 벽면에 진열된 것들은 모두 12도 정도라고 한다. 뒷자리를 툭 끊어 내고 70위엔에 계화주 한 병을 사서 손에 들었다. 기실 맛도 맛이지만 꽃병으로 쓰면 제격이지 싶은 술을 담은 예쁘장한 도자병이 마음에 쏙 들었다.
'사해승평(四海昇平)'이라는 편액이 걸린 고희대(古戏台) 동네 노인들 두세 분이 석축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따스하게 내려쬐는 햇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듯 미동도 않는다. 무대 누각 앞 광장처럼 넓게 뻗은 대리석 거리의 끄트머리쯤에 '중국 통리 영화 드라마 제작 기지(影视攝制基地)'라는 기념비가 자리한다.
기념비 주변 바닥에는 드라마나 영화의 제목, 촬영 연도, 방영 방송사명 등이 적힌 돌판이 빼곡히 깔려 있다. 그중에는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또는 <춘향전>늘 떠올리게 하는 고전 러브 스토리 <진주탑>를 그려낸 작품들도 많이 눈에 띈다. 옛 구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은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기에 최적의 장소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퇴사원(退思园) 경내를 둘러보았다. 퇴사원은 청나라 관리 임란생(任兰生)이 파직되어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청광서 연간인 1885-1887년 사이에 건조했다고 한다.
좌전(左傳)의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임금에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임금의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한다(進思盡忠 退思補過)"는 구절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퇴사원은 부지 5,674m², 건면적 2,622m²로 현관, 차청(茶厅), 정청, 거주 공간 등으로 구성된 주택과 회랑으로 둘러싸인 접객 공간인 정원(庭院), 그리고 화원 등 만청 시기 강남 사가원림(私家园林)의 경전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법도 했을 것이다.
맨 안쪽에 곡교(曲桥)를 품고 가산, 회랑, 담장 등에 둘러싸인 연못을 앞에 두고 정남향으로 '퇴사초당(退思草堂)'이 자리한다. 번듯한 기와지붕 건물이 '초당'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듯 하지만, 더하거나 빼야할 군더더기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원림은 '고풍스럽고 소박하며 우아함(古朴素雅)'이라는 설계 컨셉과 명실이 상부해 보인다.
빛나던 청춘에 함께 관문에 들어왔던 친구들의 퇴임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세모다.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사의 순리이다. 그 물러나는 길이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는 퇴사초당 정원처럼 평온하길 바랄 뿐이다.
통리 구쩐을 빠져나와 부근 식당에서 쟈오즈(饺子)로 배를 달래고 상하이로의 귀로에 올랐다. 해는 아직도 중천이라 마음은 느긋하다.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