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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Dec 31. 2022

루즈(甪直) 구쩐

신령한 동물이 깃든 길지

2022 임인년 한 해가 다 저물어간다. 신묘한 동물 '녹단(甪端)'의 전설이 전해오는 루즈(甪直) 구쩐을 찾았다.


상하이에서 창저우(常州)를 잇는 후창(沪常)고속도로의 화신(华新) 톨게이트 인공통도(人工通道)에는 사람 대신에 로봇이 통행카드를 건네준다. 빠르고 정확하며 시시비비 말다툼을 벌일 일도 없겠지만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야금야금 잠식해 가고 있는 현실의 단면을 보는 듯하여 일면 씁쓸하다.


출발 한 시간 만에 상하이에서 50여 km 거리의 루즈 구쩐에 도착했다. 이 구쩐은 강남의 6대 수향 마을 가운데 하나로 2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남쪽의 후(澄湖) 등 다섯 개의 호수와 우쏭강(吴淞江) 등 여섯 개의 하천을 끼고 있는 마을 안 여러 갈래 수로 위에는 41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고 한다.


구쩐 서남쪽 네 돌기둥이 2층 기와지붕에 '루즈 구쩐(甪直古镇)'이라는 글씨가 적힌 서남문 패루 아래를 지나 가운데 차로와 양쪽으로 기와지붕 회랑의 인도를 가진 루즈교(甪直桥)를 건넜다.


너른 광장이 나타나며 그 한가운데 사진으로만 보았던 신수 녹단(甪端) 석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물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는데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금수원(禽獸園)을 두고 도처의 신기한 동물을 모았 다. 어느 날 진시황이 금수원(禽兽园) 관리들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야수를 구해 오라 명한다.

관원들이 그 짐승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고민 끝에 이종 교배를 단행했다. 몇 년 동안의 노력 중에 어느 날 커다란 들소 한 마리가 외뿔 괴수 한 쌍을 낳았는데, 그 모습이 코뿔소 뿔, 사자 몸통, 용 등, 곰 발톱, 물고기 비늘, 소 꼬리의 형상을 가졌다.

뿔이 하나여서 단정하다는 뜻으로 '각단(角端)'이라 이름을 짓고 보고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7획의 '각(角)'에서 뿔 하나를 떼어내고 6획의 '녹(甪)'으로 하여 녹단이 탄생했다.

신묘한 이 동물은 하루에 만 팔천 리를 갈 수 있고, 사방언어에 능통하며, 또한 현명한 왕만을 모시고 영명제왕(英明帝王)을 위해 서신을 전하고 호위한다고 한다. 그 후 '오로지 하나의 마음으로 불편부당하지 않게 통치한다'는 상징으로 역대 황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 형상을 가까이 두었다고 한다.

황제가 녹단의 번식을 명했지만 이종교배로 번식 능력이 없는 이 동물이 새끼를 낳지 못하자 황제는 번식을 담당했던 관원들을 차례로 죽인다.

관리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사실을 알게 된 녹단은 우리를 뚫고 남쪽으로 도망했는데, '보리(甫里)'라고 불리던 이곳의 교외에 있는 맑고 아득하며 향기롭고 수려하며 격랑도 없고 영기가 넘치는 청후(澄湖)에 숨었다고 한다.


주변 마을들이 타이후(太湖) 범람으로 여러 차례 엄청난 홍수로 초토화되었지만 이곳만은 단 한 번도 수해를 당하지 않았다니, 후로 숨어 깃든 이 신묘한 동물 녹단이 머물 곳을 지어 주고 음식을 나누어 준 주민들의 은혜에 보답한 때문은 아닐까.


초입 왼쪽의 서회상당가(西汇上塘街)와 나란히 난 4~5미터 폭의 좁은 수로를 따라 앙증맞은 아치형 돌다리 시후이교(西汇桥), 용닝교(永宁桥), 용안교(永安桥), 샹화교(香花桥), 진징교(金晶桥)가 차례로 놓여 있다.


용닝교(永宁桥)를 건너 옛 주택가 골목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허물어가는 주택 담벼락 그림이 눈길을 잡아 끈다. 옛 강남의 전통 복식 차림의 아녀자들이 머리를 감거나 서로 담소하는 모습이다. 작자를 알 수 없지만 우아하면서도 평화스러운 옛 구쩐 여인네들의 모습을 잘 포착해 낸 그림이 얼굴 없는 화가 뱅거시의 작품을 만난 듯 반갑다.


수로 옆 거리로 들어서면 간식을 파는 가게, 옷가게, 전통복장 기념 사진관  등 몇몇 상점은 문을 열사지만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니면 코로나19 감염자 확산 때문인지 관광객 모습은 뜸하다. 수로 건너편 각종 장류(酱类)와 장조림 등을 파는 가게 안에는 남녀 점원 세 명이 썰렁한 매장을 지키고 있다.


전통 복장을 빌려주는 사진관 가게 안후이 출신 여주인은 지금은 코로나19로 여행객이 없지만 앞으로 좋아질 거라며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현지 주민들만 순찰하듯 텅 빈 수로변 거리를 한둘씩 오가고 휘파람 소리처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냉랭한 공기로 가득 찬 빈 공간을 가른다.


수로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보니 건너편 기와집 이층 창문에서 노파가 허드렛물을 수로로 쏟아붓고 있다. 구쩐 남쪽 끝 난창교(南昌桥) 부근 나루터에 나란히 떠 있는 보리(甫里) 37호와 22호 오봉선(乌篷船)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빈 배를 지키고 앉아 있는 늙은 여뱃사공의 모습이 안쓰럽다.


명나라 때인 1465-1487년경 축조되었다는 흥륭교(兴隆桥) 옆 만성미행(万盛米行)은 민국 초기 이 지역 두 상인이 운영하던 점포로 이 부근 10여 개의 쌀 집산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정원교(正源桥)를 지나서 강남문화원으로 들어서서 돌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수향부녀복식박물관'이 자리하는데 역시나 문이 잠겨 있다. 그 오른쪽 연못을 낀 큰 정원이 나오는데 사람은 없고 신명 난 듯 지저귀는 새소리만 가득하다.


공원처럼 너른 문화원 경내의 회랑, 정자, 고희대(古戏台) 등을 둘러보며 넓은 연못 주변 곳곳에 자리한 각종 조각상들을 찬찬히 감상했다. 장성(张省) 예술관과 루즈역사문물관도 모구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연못 위 루즈교 건너편 웅장한 고희대도 역할을 잃어 배우와 관객 없는 텅 빈 무대가 더욱 썰렁해 보인다.


중시가(中市街)의 수예탕(舒咽糖) 가게의 젊은 여주인에게서 '가래를 거치게 하는 비방(祕方止咳)'이라는 라오창탕(老强糖) 한 봉지를 사들었다. 코로나19 확진 후유증으로 아직도 그치지 않는 잔기침과 가래를 그치게 해 주면 좋겠다.


소택(苏宅), 조택(赵宅) 등 옛 부호의 저택들의 대문도 굳게 닫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양 어깨가 양쪽 벽에 닿을 듯 좁은 심가농(沈家弄)의 심택(沈宅)은 무슨 영문인지 폐가처럼 보이는데 보수 공사를 앞둔 듯하다.


동시상당가(东市上塘街)에 자리한 '아이터 예술(艾特艺术)'이라는 현판이 붙은 화랑은 문이 잠겨 있어 벨을 눌러보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중한예술가쌍인전(中韩艺术家双人展)'이라는 팸플릿 글귀가 궁금증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중년의 여성이 문을 열어주며 코로나19 양성 확진 후 5일째 문을 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양해를 구하고 자그마한 넓이 1, 2층 화랑을 둘러보았다. 한국 이은희 화가가 운영한다는 화랑으로 지금은 젊은 여성 화가 웨이양양(魏阳阳)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밝고 화사한 원색 톤으로 채색한 말이나 호랑이 등 동물과 수묵화풍 그림들이 세련되고 모던하다.


웨이양양, 썬수빈(申树斌), 자오멍거(赵梦歌), 인차오위(尹朝宇), 난치(南溪), 위춘(虞村) 등 이곳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들의 화보집을 종이 백에 담아주는 화랑의 사 씨(史氏) 여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화랑을 나섰다.


화풍교(华丰桥) 바로 옆에 '태행애백(太行崖柏)'이라는 가게의 문이 열려 있어 '삐~익'하고 소리를 내는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섰다.


붉은 점퍼 차람의 젊은 여성이 탁자 위 컵에 뜨거운 차를 따르며 자리를 권한다. 꾸이저우성(贵州省)의 시골 출신이라는 그녀는 마스크를 들추며 차를 마실 때마다 얼핏 얼핏 드러나는 얼굴이 앳되지만 곧 불혹이 된다고 한다.


가게의 벽장과 탁자에는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갖가지 주제의 작은 나무조각 작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가게 주인이라는 여인은 묵주, 목걸이, 불상, 동물이나 인물상 등 크고 작은 작품들은 모두 태행산맥의 천애절벽에서 수백 년 내지 천여 년 동안 자연풍화를 거친 화석처럼 단단한 측백 나무(崖柏)를 채취해서 만든 작품들이라고 소개하며 한 점 한 점 설명을 곁들인다.


중국 북방 태행산맥에서 나는 애백(崖柏)은 다른 지역의 것보다 재료의 밀도가 더 높고 질감도 더 섬세하는 등 품질이 훨씬 뛰어나다고 한다.


방금 따라 준 차에도 애박이 들어갔다고 한다. 병 속에서 집어서 건네주는 애박 조각 하나를 코에 갖다 대니 향나무 냄새와 흡사한 진한 향기가 마음속까지 스며들 듯 콧속으로 번져 들어온다.


메이(梅) 성씨의 이 여인은 묵주, 목걸이, 불상, 동물이나 인물상 등 크고 작은 작품들은 모두 태행산맥의 천애절벽에서 수백 년 내지 천여 년 동안 자연풍화를 거친 화석처럼 단단한 측백 나무(崖柏)를 채취해서 만든 작품들이라고 소개하며 한 점 한 점 설명을 곁들인다.


지난주 통리 구쩐에서 보았던 뿌리조각 작품들에 얘기가 닿자, 애박(崖柏) 작품 하나하나에는 각기 정령(精灵)이 깃들어 있고 연분이 있어야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근육과 힘줄처럼 결이 진 단단하고 매끄러워 보이는 작품 하나하나 마다 령이 깃들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하다.


일층을 둘러본 후 그녀의 안내로 좁은 나무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랐다. 여러 작품들과는 별도로 공간 한편에  주불(主佛)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아홉 위씩 미려한 십팔 나한상이 자리하고 있다. 제각기 다른 모양새의 애박(崖柏)에 각기 다른 독특한 표정과 몸짓의 나한상을 표출해낸 작가의 솜씨가 가히 신기에 가깝다. 1,2층에 진열된 작품들을 둘러보고 차를 들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40여 분이 훌쩍 지났다.


양나라 때인 503년 창건되어 한 때 5000여 칸 규모에 스님이 천 여 명에 달했던 1500여 년 역사의 보성사(保圣寺)도 구쩐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혼자 근무 중이라는 직원이 사찰 내 대부분의 건물이 문을 열지 않았으며 십여 일 후에나 정상 관람이 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서 안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수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며 서남문 광장으로 돌아와서 신령스러운 동물 녹단(甪端) 석상을 한 번 더 찬찬히 둘러보았다. 광장 오른쪽 가장자리에 세워 놓은 '루즈 구전 번화도' 부조상은 번성했던 이곳의 옛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 구쩐이 옛 영화를 되찾긴 쉽지 않겠지만 위드 코로나가 익숙해지고 평온한 일상이 되돌아오면 예전처럼 거리와 수로 위 오봉선들이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좋은 시절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상서로운 녹단이 아직도 덩후(澄湖)에 깃들어 있다면 그날이 더 빨리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구쩐을 나서서 차를 세워둔 길 건너편 상가로 돌아왔다. 근처 식당에서 계란 두부 콩나물 목이 토마토 청경채 등이 들어간 뜨끈한 판지아탕면(番茄汤面) 한 그릇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며 언 몸을 녹였다. 호사로운 세모 한 나절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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