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행 마지막날 아침이다. 아침을 들고 호텔 옆 버스정류장에서 33번 버스를 타고 닝샤(宁夏) 박물관으로 향했다.닝샤박물관 앞 광장을 끼고 맞은편에 닝샤도서관, 안쪽에 닝샤대극원이 각각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 개관 시각 전이라 도서관을 둘러볼 요량으로 너른 계단을 올라 도서관 정문으로 들어섰다. 다른 공공시설과는 달리 이 도서관은 출입 시 신분 확인 등 절차 없이 프리패스다.
내부로 들어서니 족히 축구장 넓이와 맞먹는 큰 규모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채광이 되는 지붕 아래 홀을 가운데 두고 사방 열람실이 자리해 있다. 서가에는 각종 분야의 수많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너른 열람실에는 다양한 연령층 남녀들이 탐독하고 있다.
1층 한편에 '서부미술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공간이 자리하는데 웬만한 도서실 크기보다 더 커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 옆에 음료를 파는 카페가 있고 벽면에는 최근에 그린 작품들이 걸려 있다. 천천히 발을 옮기며 작품들을 한 점씩 찬찬히 감상했다.
닝샤도서관 내부
닝샤도서관 내 '서부미술관' 전시품
닝샤 대극원
짙은 무채색 계열 물감으로 나목을 그려 낸 <경관(景观)>, 거꾸로 선 사람과 손을 형상화한 <너 아직 괜찮니(你还好吗)>, 투박한 질감의 성곽 길 좁은 하늘 위를 나는 붉은색 가오리연을 그린 <발월 유근(发月留根)>, 깊고 험한 암곡 사이를 나는 백색 군조를 담아낸 <장행비가(长行飞歌)>, 포플러 숲 속에 양(羊) 세 마리가 든 <동행(同行)>, 고양이 정물화 <일세(一岁)>, 황량한 들판 <시월(十月)>, 넓은 초원의 야크 떼와 유목민, 바구니를 목에 걸고 사과를 수확하는 처녀를 담은 치우예(邱野) 작가의 <소녀(少女)>, 청록색이 가득한 까오카오훙(高凯宏) 작가의 <연꽃(荷花)>, 소나무와 매화, 소수민족 여인과 야크를 담은 <인물(人物)>, 말 두 마리를 심플하게 담아낸 작품,...
벽면에 일정 간격을 두고 걸려 있는 채색화는 대부분 2000년 이후에 그려진 작품들로 중국 서북 지역의 풍광을 잘 담아내고 있다.
널찍한 화랑 내부에도 열람실처럼 책상과 걸상이 놓여 있는데, 젊은 여성 한 사람이 책을 펴고 앉아 있어 그녀 등 뒤쪽 그림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공무원 시험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그녀는 다른 열람실에 비해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더란다. 미술관 열람실 옆에는 차나 커피숍이 구비된 열람실도 자리하는데 그 내부가 우리나라 웬만한 동네 도서실 크기와 맞먹는 규모다. 내부 몇몇 곳만 둘러보았을 뿐인데 들어선 지 한 시간이 훌쩍 흘러버린 도서관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닝샤박물관은 남북 출입문이 있는데 관람객들은 대극원 앞 광장을 사이에 두고 도서관과 마주 보는 북문 대신 남문을 통해서 출입할 수 있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고 극원 관람객들과 뒤섞이는 혼잡을 피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닝샤박물관
닝샤발물관 내부
닝샤 암각화 전시관 전시품
높이 1.3m, 길이 2.2m의 거대한 소 암각화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투명한 원형 유리창으로 장식된 높은 천장의 대형 중앙홀이 맞이한다. 1층에 자리하는 '닝샤 암각화 전시관(石刻史书)'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방대한 수의 각종 문양의 암각화와 탁본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 암각화들은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 허란현 허란산(贺兰山) 동쪽 기슭 27곳에 총 19,752점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대 인류의 방목, 사냥, 제사, 전쟁, 오락, 춤 등의 장면을 담고 있어 고대 인류 문화사와 원시 예술사를 연구하는 문화의 보고라고 평가된다.
사슴, 산양, 말, 멧돼지, 낙타, 호랑이, 물고기 등 각종 동물, 특정 부호나 문양, 태양, 얼굴, 춤을 추거나 싸우는 사람, 사냥 모습, 주술사(巫師), 제사 장면 등 그림의 주제가 매우 다양하다. 설명에 따르면 암각화 제작 시기가 어떤 학자는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000년쯤이라 하고 다른 학자는 기원전 2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출토된 암각화 덩어리와 힘께 탁본을 함께 전시하여 암각화 내용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암각화들은 대상의 특징을 콕 집어 내어 단순화하여 한눈에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어 옛사람의 솜씨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탁본을 해 놓은 암각화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성이 돋보여 현대 회화에도 결코 뒤지지 않아 보인다.
전시관 벽면을 자연 암벽처럼 조성하여 암각화 유적에 대한 설명을 벽면에 새긴 점이 전시실의 주제와 잘 매칭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곳에는 태양신, 손바닥, 사람 얼굴 등 문양이 한꺼번에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들 암각화에는 아래 태양신 문양에 대한 설명처럼 그럴듯한 해석을 덧붙여 놓은 것도 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세상에 범람하고 죽음이 산길을 뒤덮고... 그들은 태양의 영혼이 그들과 함께한다고 굳게 믿었고 더 이상 죽음과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높이 1.3m, 길이 2.2m의 거대한 소 암각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몸은 두 개의 칼 같은 뿔 치켜든 꼬리와 머리로 포효하며 불운과 악령을 물리치는 능력을 표현했다. 소의 전체 윤곽은 이중선, 등 부분은 3겹 선의 입체기법이 적용되어 소가 점점 더 크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한편 배 속에는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4마리의 송아지를 그린 것은 다산의 열망을 상징한다."
허란산 암각화를 접하니 우리나라의 반구대(盤龜臺) 암각화가 떠올랐다. 1971년 울주군반구대에서 발견된 암각화에는 7종 75점에 달하는 고래를 비롯해서 호랑이, 사슴, 산양, 멧돼지, 늑대 등 동물 22종을 포함하여 총 353점의 그림이 등장한다고 한다.
러시아의 암각화 학자 니콜라이 보코벤코는 반구대 암각화를 두고 "삼성 브랜드와도 맞먹는 가치가 있다. <2018.1.9일 자 부산일보 4면 인용>"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허란산 기슭 광대한 암벽에서 발견된 2만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이 암각화들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가늠할 수 조차 없을 듯싶다.
기획전시실에는 '우시(无锡) 근현대 명인전'이 개최되고 있다. 장쑤성에 소재한 우시의 작품들이 중국 서북의 변방인 닝샤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은 중국 내 지역 간 문화교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 '호산호수 입아수(好山好水入我手)' 주제의 전시관에서는 청나라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시기의 산수화, 화조도 등 족자와 부채 그림 등 전통 수묵화와 채색화들을 감상했다.
혁명의 깃발 등 강렬한 붉은색이 두드러진 공장도, 식수도, 추경 돌격대, 여성 청소부 등 정치 선전화와 함께 어약도(魚躍圖), 매화도, 인장, 서예 작품, 죽공예품 등 전시품도 구색을 맞추고 있다.
박물관 2층으로 올라 '공산당 혁명관'을 건너뛰고 '닝샤 통사 진열관'만 둘러볼 작정인데 어디가 관람 시작점인지 알 수가 없다. 흰색 제복에 모자를 쓴 안내원에게 묻자 그녀는 복도를 따라 족히 100미터를 함께 걸어서 반대 방향 진열관 입구까지 안내해 준다.
닝샤통사진열관은 '삭색장청(朔色长天)'이라는 표제 아래 마가요(马家窑), 앙소(仰韶), 제가(齐家), 채원(菜园) 등 기원전 4만 년경부터 시작된 선사시대 여러 문화의 유적지와 유물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주요 유물에는 채색 도기, 각종 옥 제품, 묘장품 토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계속해서 기원전 11-8세기 융족과 서주의 대립(戎周争雄) 시기 때의 갑옷, 무기, 전차, 장신구 등 유물이 발굴된 야오허위엔(姚河塬) 유적지, 진한 시기 이 지역 만리장성 축조, 흉노족의 천거, 당대의 비단길, 위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130개의 수미산 석굴, 둔황 막고굴, 당나라 시기 무덤 출토 인물상 등의 역사와 유물 소개가 이어진다.
서하(西夏) 왕국 전시실에는 서하 왕조 연표를 시작으로 서하의 고유 문자, 목조 인쇄판, 서책 제본 기술, 석각품, 도자기 등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1977년 서하릉 지구에서 발굴된 길이 120cm, 폭 38cm, 높이 45cm의 청동 소는 균형 잡힌 비율, 매끄러운 선, 사실적인 형상 등이 서하의 높은 주조 기술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팔괘 동종, 불경 목활자본 등 유물은 서하에도 불교뿐 아니라 도교 등 다양한 신앙 활동이 성행했고 인쇄 사업도 활발했음을 짐작케 한다.
'천하황하 부닝샤(天下黄河 富宁夏)' 표제 아래 민속 복장, 주거지, 지역별 인구 분포, 농경과 목축, 가재도구, 거리 모습, 양피 배, 고유 음식, 절기별 풍속, 예절 풍속, 농민화 등 민속회화, 건축과 조각 등을 소개하는 3층 '닝샤 민속진열관'을 끝으로 닝샤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닝샤를 비롯한 중국 서북지역은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오랜 시간 서로 세력을 다투고 문물을 교류하며 각축을 벌이던 지역이다. 그러니 만큼 닝샤박물관은 중국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 융성하고 스러져간 다양한 민족 여러 왕조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 유적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
오후 한 시경에 호텔로 돌아와서 짐을 프런트에 맡긴 후 출출한 배를 달래기로 했다. 뜨겁고 건조한 날씨는 입 안을 바짝 마르게 하고 호기심과 의욕을 짓눌러 꺾는다. 호텔 맞은편 편의점에서 로컬 맥주('西夏啤酒') 캔 하나를 사들고 그 옆 '컨더지(肯德基, KFC)'에서 치킨을 안주삼아 5박 6일 여정을 갈무리해 본다.
택시를 타고 시 중심부 동쪽 황허 건너편에 자리한 인촨 허동(银川河东) 공항으로 향했다. 여느 지방 공항처럼 허동 공항에서 상하이로 가는 남방항공 비행기도 출발 시각 보다 한 시간여 늦게 이륙했다.
몸은 고단하고 '별들의 고향' 닝샤의 밤하늘 별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중국 '서북의 강남'에서 남쪽 상하이로의 귀로는 밤하늘 은하수(銀河水)를 따라가는 길이니 자못 낭만스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