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맞춰둔 알람이 5시 반경 잠을 깨웠다. 향령두(响岭头; 샹링터우) 마을 객잔 앞을 휘둘러 선 암산을 올라 능선을 따라 한 바퀴 휘돌아 영봉(灵峰; 링펑) 풍경구 입구 쪽으로 내려설 요량이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객잔을 나서니 대여섯 명 러너들이 객잔 앞 도로를 달리며 나보다 훨씬 이르게 하루를 시작했다.
깎아지른 듯 솟은 옥인봉(玉印峰)과 대상암(大象岩) 절벽 아래 안긴 마을을 지나 암봉 위 어디쯤엔가 있을 조양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선형 도로를 지나 계단으로 들어선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도교 사원 조양원(朝阳院)이 자리하는데 막다른 길이라 아래쪽으로 되돌아와 길을 바로 잡았다.
이른 아침이라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검표소를 지나 계단을 오르자 조양동(朝阳洞; 차오양동) 동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실눈 같은 폭포수가 하늘을 반쯤 가리며 안으로 깎여 들어간 절벽 천정에서 아래쪽 연못으로 떨어져 내린다. 조양(朝阳)의 남쪽에 위치하며 입구가 동쪽을 향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동굴이라기보다는 움푹 들어간 절벽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 듯 한 형상이다.
조양동 좌측으로 난 계단길을 따라 조천문 쪽으로 향한다. 바람에 실비가 섞여 흩뿌리는가 싶더니 이내 멈춘다.
반듯한 대리석 계단이 끝나며 암벽을 깎아 만든 계단이 나타난다. 급경사에 미끄러워 보이는 계단길은 위험해 보이지만 튼튼한 난간이 있어 다행이다. 지팡이를 하나씩 들고 계단길을 내려오는 두 명의 장년 남성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 조심하라는 말을 건네며 길을 비켜갔다.
폭포 위쪽 천애절벽 난간에 의지하여 아래쪽 동편을 마주하니 눈 아래 산줄기들 틈에 안긴 객잔촌과 그 너머 멀리 평원과 어우러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하객이 "천하기수 해상명산(天下奇秀 海上名山)”이라고 찬사를 보낸 이유를 알만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이지만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온몸도 땀으로 흥건하다. 다시 돌아서니 까마득한 절벽 위 산정 쪽은 아득해 보이지만 길을 다잡고 발길을 재촉한다.
얼마지 않아 이정표가 오른편 산허리로 난 길을 가리킨다.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선 암벽 조양장(朝阳嶂)을 좌측에 끼고돌아 허리 높이 돌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성 유적지(寨城遗址)로 올라섰다. 큰 돌들로 험한 암산 요지 쌓은 얕은 성인데 어느 누가 누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점점 더 가팔라지는 계단길과 함께 고도가 높아지면서 안개비를 인 산군 사이로 바다가 더 가까이 더 넓게 다가온다.
오랫동안 사용 흔적이 없어 보이는 공공화장실 아래 이정표가 산정 쪽 200미터 지점 오로전(五者巅)과 조천문으로 길을 갈라놓는다. 경사진 산길 200미터는 결코 만만찮은 거리이지만 자칭 산행 애호가로서 정상을 외면하기 어렵다.
가을바람처럼 서늘한 미풍, 산새들의 유쾌한 지저귐, 풀벌레들의 합창을 친구 삼아 발길을 옮긴다. 힘겹게 올라선 해발 약 400미터 능선마루에는 아무런 표지석도 없어 좌측에 송곳처럼 뾰족하게 곧추 솟은 봉우리가 금구봉(金龟峰)이 아닐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우리나라 산의 이정표와는 달리 중국 유명 산들의 이정표에는 등산로를 현 위치의 고도나 정상까지의 방향과 거리 등에 대한 내용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국립공원들은 가급적 인공시설을 더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대로 보존하고자 한데 비해, 중국의 국가급 풍경구들은 출입구를 제외한 사방을 틀어막아 놓고 입장료를 받고 출입을 허용하며, 케이블카, 버스, 엘리베이터 등 각종 이동수단을 이용해서 주요 볼거리를 둘러보도록 해놓았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산을 찾는 이유가 '산행(山行)'인데 비해 중국에서 산을 찾는다는 것은 필시 산의 경관을 둘러보러 가는 것, 즉 '관산(觀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명 관광지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구 대국 중국에서 우리나라 국립공원과 같은 시스템을 적용한다면 산 전체가 통제불능 상태에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다.
능선 너머 비 온 뒤 무성히 자란 죽순처럼 솟아있는 암봉들의 숲을 한동안 조만한 후 갈림길로 되돌아 내려와서 조천문(朝天门) 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조천문은 인공으로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곧추 선 암봉들이 하늘을 가릴 듯 둘러서 있는 지점으로 객잔이 있는 마을로 내려가는 환산(環山) 등산로와 영봉 경구(灵峰景区) 입구 쪽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그 가운데 동쪽을 향해 돌출한 암릉길로 들어서니 "기가 막힌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진경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누구나 이곳에 한 번 올라본다면 서하객이 옌탕산은 표현하기 어렵다고 고백하듯 기술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명산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그중 이곳 경관은 기록하기 어렵구나."
四海名山皆过目,就中此景难图录
_서하객 <옌탕산 유기(雁荡山游记)>
태산이나 황산처럼 산수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들과는 달리, 마그마의 작용과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의 분출, 그 위에 수천수만 년 침식의 시간이 더해 빚어낸 추상화처럼 기기묘묘한 이 산을 몇 마디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바람에 휩쓸릴까 두려운 마음에 난간을 부여잡는다.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의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영봉 경구 입구 쪽으로 내려간다.
협곡을 옹위하고 솟은 암봉 중 오른편 암봉 하나는 창문처럼 몸통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데 이름하여 '천창(天窗)'이다. 두 암봉 어깨에 걸려 있는 둥근 큰 바윗돌 아래를 지나 영봉 경구 입구로 내려서니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반이 지났다.
영봉 경구(灵峰景区) 진면목
여전히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문 영봉징취 입구로 들어섰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관광해설사에게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고 계곡 위쪽으로 걸어가며 어젯밤에 수박 겉핥듯 둘러보았던 경관들을 밝은 하늘 아래서 재차 살펴보았다.
계곡 앞 쪽에 우뚝 선 쌍순봉을 쳐다보며 과합교 앞을 지나 오른편으로 난 계단길을 따라 석굴 통로를 지나 영봉고동(靈峯古洞) 입구로 올라섰다. 영봉 고동은 원래 사찰이 있던 곳으로 600년경 산이 붕괴되면서 일곱 개의 동굴이 서로 연결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연못처럼 물이 고인 운무동(雲霧洞), 불상을 모신 호운동(好運洞) 등을 거쳐 동굴 속 계단을 따라 오르면 암봉 허리에 자리한 조망처 동요대(东瑤台)와 서요대(西瑤台)가 나온다.
동요대에 올라서서 계곡 건너편 암봉 중턱에 자리한 사찰에서 흘러나오는 불경 소리를 들으며 시원히 불어오는 바람에 한동안 몸을 맡겨 본다.
고동(古洞)을 통해 아래쪽 계곡으로 내려섰다. 어젯밤 그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던 관음동이 두 암봉이 합장하듯 마주하고 솟은 합장봉(合掌峰) 품속에 안겨 있다. 높이 270여 미터 합장봉은 희끄레한 어둠 녘에 보면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다고 한다.
올려다보면 한 쌍의 통통한 젖가슴과 닮아 '쌍유봉(双乳峰)'이라 불리기도 하고, 달리 보면 치파오(旗袍)를 입은 날씬한 소녀로 변해 '상사녀(相思女)'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합장봉은 그 가운데 높이 113미터 바닥 폭 14미터 깊이 76미터의 움푹 들어간 반동굴을 품고 있는데, 그 안에는 9층으로 이루어진 사원이 들어서 있다.
끝이 없을 듯 높고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을 올라 동굴 정점에 다다르니 한가운데 관음보살상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금빛 불상들이 암벽 곳곳에서 자리한 작은 불국토가 나타난다. 마음이 동하여 아래쪽 입구에서 준비했던 향에 불을 사르고 합장을 했다. 암벽 위에서 떨어지는 암반수를 받아 둔 음용대에서 물 한 모금 들이키고 관음동에서 되돌아 내려왔다.
풍경구 출구 부근에는 본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관람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
객잔촌으로 돌아와서 숙소 부근 식당에서 볶은밥에 가지 볶음을 시켜 달게 늦은 아침을 들고 객잔으로 돌아왔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오전까지 쏟은 땀이 가히 몇 되박은 될 듯하다. 몸도 많이 지친 탓에 객잔에서 땀을 씻고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 경구(景区) 한 곳 정도만 더 둘러보기로 마음을 정했다.마음이 이처럼 느긋한 것은 하루를 일찍이 시작했기 때문일 터이다.
팡동 경구(方洞景区)
정오경 객잔에서 퇴실하고 나서 셔틀버스에 올라 링옌(灵岩)에서 내린 후 작은 버스로 갈아타고 링옌(灵岩) 풍경구 서편에 자리하는 팡동(方洞) 풍경구로 향했다. 버스는 가파른 암봉의 비탈진 기슭으로 난 길을 타고 올라 암봉의 중턱쯤에 자리한 해발 400여 미터 남짓 팡동 풍경구 주차장에 내려준다.
징취(景区) 검표소로 가는 계단으로 접어드니 높이 300여 미터의 '금대장(金带嶂)'이 띠와 같은 암층을 가로로 꿰질러 차고 아래위로 암벽을 이루고 있다. 암장(巖漿)이 흐르면서 형성된 유문암층으로 지표에 용결된 응회암 화산쇄설과 공중에서 떨어진 화산재가 쌓이면서 그 접점에 띠가 형성된 것이라 한다.
암벽의 흉부쯤 높이에 자리한 검표소 주변에는 편의점, 아래쪽까지 연결된 케이블카 탑승장, 화장실 등이 자리한다. 검표소로 들어서서 경사가 느슨한 절벽을 깎아서 낸 길을 얼마간 지나고 나면 천길 수직 절벽 허공 위에 놓인 수 백여 미터 잔도가 굴곡진 암벽을 따라 이어진다.
아래위 천애절벽에 놓인 잔도는 관음봉(观音峰), 금귀영객(金龟迎客) 등 여러 봉우리와 각종 형상에 빗대어 이름을 붙인 암봉들을 하나씩 보여 주며 발아래로 산군에 안긴 마을들을 그림같이 펼쳐 보인다.
잔도의 절벽 안쪽으로 '팡동(方洞)'이라는 사묘(寺庙)를 조성해 놓았는데, 입구로 들어서서 계단을 올라 전각 안으로 들어서니 '호공대제(胡公大帝)' 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저장성 융캉현(永康县) 출신의 북송 전기 걸출한 정치가로 청렴하고 근면한 행정으로 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호측(胡则, 963-1039)을 천년이 지나도록 '대제'로 추앙하여 기리고 있는 것이다.
잔도 위 100여 미터 종처럼 움푹 파인 '금종조(金钟罩)'와 관우가 청룡언월도로 절벽을 단칼에 갈라놓은 듯 발아래 천길 절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관도동(关刀洞)'을 지날 때는 절로 오금이 저려온다.
절벽 안쪽으로 둥그렇게 움푹 파 들어간 제법 너른 반동굴의 쉼터 겸 매점이 자리한다. 그 앞 난간에 기대어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마치 26년 전 찾았던 스위스의 작은 마을 뮈렌에서 산 아래 계곡의 마을을 굽어보던 기억이 오버랩되며 떠오른다.
공작 바위(倒側孔雀), 인면상신(人面象身), 바다사자(海獅), 졸고 있는 원숭이(睡猴), 철권봉(铁拳峰), 관음좌 연대(觀音坐蓮台) 등을 알리는 이정표를 스쳐 지지나 뚝 끊어진 절벽 양쪽을 잇는 출렁다리가 천길 높이에 걸쳐져 있다.
이 철색교(铁索桥) 출렁다리는 한 번에 100명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는 안내문처럼 튼튼해 보이지만 족히 백여 미터가 넘어 보이는 다리를 건너자니 쭈볏쭈볏 머리칼이 곤두선다. 이럴 때 '인디아나 존스' 등 어드벤처 영화에서 꼭 등장하는 출렁다리 하판 낡은 나무가 부스러지는 장면이 떠오르곤 하니 난감하다.
철색교를 건너니 절벽 벽면을 타고 찔끔찔끔 물이 내려오는 진주폭(珍珠瀑) 아래 물웅덩이에는 거북 등 위에 삼장법사와 손오공 삼 형제가 서역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이 한동안 눈길을 잡는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경천호(景天湖) 쪽으로는 사람들 발길이 뜸하다. 마을 풍경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는 지점인 경관대(观景台)에 한 전 올랐다가 팡동 경구 검표소 쪽으로 발길을 돌려 옌탕산 탐방 일정을 맺기로 했다.
검표소를 빠져나오면서 전자 계수기를 보니 "62,650人"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궁금증이 일어 검표원에게 그 숫자가 언제부터 입장한 관람객 숫자인지 물어 보니, 그녀도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오후 13:50경 팡동 경구 승강장을 출발한 미니버스가 산기슭으로 난 길을 굽이돌며 달려서 금세 링옌 경구 정류장에 도착했다. 큰 버스로 환승 후 여행자 안내센터에서 내려 다시 셔틀버스로 옌탕산역으로 이동했다.
중국 삼산오악(三山五岳)의 하나요 십대 명산 중 하나로 서하객이 "빼어남이 천하 으뜸(天下奇秀)”이라고 칭송했던 옌탕산을 짧게 둘러보았지만, 실로 '관산(觀山)'과 '산행(山行)'을 겸하기에 적격인 숨어 있는 보물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가 물러나고 한국과 중국 간을 운행하는 항공노선이 속속 복원되는 가운데, 지난 6월에는 한국 인천공항과 원저우(温州) 간 직항 항공노선도 복원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조금 덜 날려진 산이지만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산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차표를 세 시간 정도 앞당겼지만 여전히 출발 시각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았다. 기차역 화장실에서 땀을 씻고 셔츠를 갈아 입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정차하는 열차가 많지 않은 탓인지 대합실 안은 한산하다가 열차 시각이 가까워지자 비었던 좌석이 빈틈 없이 가득 찼다.
차비를 더 지불하고 시각을 앞당기면서 좌석이 없는 '무좌(无座)'로 바뀌었다. 예닐곱 곳 정차하는 곳마다 자리를 옮겨다니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할 형편이다. 항저우 남역부터 빈좌석이 없어 상하이 홍차오역까지 지친 몸을 객실 연결 칸 벽면에 의지할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옌탕산 탐방의 감흥은 말로 표현하기 난해하여 미려한 추상화처럼 오래도록 곰곰 곱씹어야 할듯 싶다.Laoj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