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이른 아침 쑤저우(苏州)를 향해 집을 나섰다. 쑤저우역까지는 지척이라 상하이 홍차오역(虹桥站)에서 열차로 30여 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평원이나 다름없는 상하이와는 달리 쑤저우에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이름난 산들이 적지 않다.
그중 쑤저우 남서쪽 태호(太湖) 동편에 위치한 링옌산(灵岩山)을 찾아보기로 했다. 북서쪽으로 길이 2.3km, 너비 1.2km, 해발 182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하니 자못 기대가 된다.
그 이름처럼 링옌산은 그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링옌탑 앞에 자리한 영지석(灵芝石)을 비롯해서 산에는 돌북, 돌 거북, 돌 토끼, 돌 뱀, 원앙 돌 등 기암괴석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홍차오역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파로 역사 안이 빼곡하다. 열차에 올라 중년 부부의 요청으로 2호차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쑤저우역에 내려서 지하철 2호선과 5호선으로 갈아타며 링옌산역에 도착하니 여덟 반이 조금 지난 시각이다.
역 바깥으로 올라서니 햇볕이 쨍쨍 내려쬔다. 임시 건물처럼 낮은 지붕을 맞대고 길게 줄지어서 있는 산하촌 허름한 가게들에서는 향, 지팡이, 부채, 기념품, 먹거리 등 온갖 것들을 가게 안과 가판대 위에 올려놓고 있다.
영암산사(灵岩山寺) 패루/계려정(继庐亭)'
낙홍정(落红亭)
'영암산사(灵岩山寺)'라 적힌 패루로 접어드니 긴 계단이 맞이한다. 오른편 계단을 따라가야 나오는 고소대(姑苏台)는 내려오는 길에 둘러보기로 하고 산상으로 난 계단으로 직진한다.
인광법사가 이름 붙였다는 '계려정(继庐亭)'을 통과하여 산정으로 향하는 계단길은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계단길 왼편은 어른 발목 굵기의 대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었고 오른편엔 활엽수림이 무성하여 대조를 이룬다. 누군가 가마를 타고 이 계단길을 올랐는지 2인 1조 가마꾼 두어 무리가 빈 가마를 어깨에 걸치고 내려가고 있다.
고도계가 해발 104미터를 가리키는 지점에서 사각 정자 낙홍정(落红亭)이 계단길을 막아선다. 아담한 정자 안 돌 벤치와 그 앞 계단에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앉아 땀을 식히고 있다. 언제인가 싶게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몸도 땀이 흥건하다.
낙홍정 왼편 평탄한 길을 따라가면 관음동(观音洞)이 자리한다. 암벽의 얕게 패인 암굴에 물고기 등에 앉은 금빛 관음상 부조가 자리하고, 암벽에 기대어 지은 전각이 그 암굴을 품고 있다. 관음보살을 모시는 관음동은 월왕 구천(勾践,?-BC464)과 범려(范蠡, BC536-BC448)가 오왕 부차(夫差,?-BC473)에게 서시를 바쳤다고 하여 서시동(西施洞), 또는 구천과 범려를 구금하였던 곳이라 하여 구천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전각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향이 마당을 향연으로 그득 채우고 있는 관음동을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곧바로 산정으로 치고 올랐다. '광수무량(光壽無量)'이라 적힌 석조 전각 안에는 아미타불과 협시보살 등의 부조상이 자리한다. 그 부근에도 향연이 자욱하게 흩날리고 있다. 중국인들에겐 도처가 구복의 도량처럼 보인다.
관음동(观音洞)
광수무량(光壽無量) 전각의 부조
길 옆 '복수정(福壽亭)'이라는 작은 정자 앞 큰 바위에 '와우면상(卧牛眠象)'이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 있다. 아무리 살펴봐도 '누운 소'나 '잠자는 코끼리'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그만큼 큰 바위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길 좌측 가파른 능선 가장자리에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거쳐 형성된 거북 모양의 화강암석 '영암귀석(灵岩石龟)'이 쑤저우 시내와 그 너머 태호(太湖)를 내려다보고 있다.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들고 남쪽 태호를 바라보는 거북이처럼 생긴 이 암석이 영암일경(灵岩一景)인 '오구망태호(乌龟望太湖)'라고 한다.
'태호를 바라보는 거북', '부처를 바라보는 거북'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거북 모양 암석의 등에는 '망불래(望佛来)'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귀는 서천으로 불경을 취하러 가던 당나라 스님에게 제자 되기를 청했다가 스님의 "돌아오는 길에 받아주겠다"는 약속에 산 위에 올라 스님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말해 주고 있다.
경사가 느슨한 능선마루로 올라서자 영암선사(灵岩禅寺)가 자리한다. 이 사찰은 동진 때 창건되고 당, 송, 명나라 때 이름이 바뀌었다가 청나라 때는 강희제와 건륭제가 남방 순시를 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입장료 1위엔을 스마트 폰으로 결재하고 사천왕이 수호하는 천왕문을 지나서 경내로 들었다.
연못 위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대웅전이 마주하고 있다. 족히 5~6미터 크기의 본존불 좌우 벽면엔 16 존자가 시립해 있고 뒤쪽엔 본존불과 등을 맞대고 아름다운 가사를 걸친 관음보살입상이 자리한다. 본존불 뒤쪽 좌우로는 각기 코끼리와 사자 등에 반가부좌 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자리한다.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벌 한 마리가 보현보살상 앞에 놓인 꽃병의 꽃에서 꿀을 쫓고 있다.
대웅전 좌측 가람전은 갖가지 아름다운 불상과 불구용품을 판매하고 복전을 바치고 구복을 할 수 있는 장소다.
돌거북/영암선사 대웅전
영암선사 후원의 완화지(玩花池, 왼쪽)
'오중승경(吴中勝景)'이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문을 지나니 괴석, 연못, 가산(假山), 옛 우물, 차관(茶馆) 등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후원이 나온다.
원래 링옌선사(灵岩禅寺)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부차가 서시를 위해 지은 별궁인 '관애궁(馆娃宫)'이 있던 곳이라 한다. 사찰 서편 원림은 옛 관왜궁 건설 때 함께 조성된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 이유이다.
그래서인지 원림에는 서시가 연꽃 놀이를 했다는 완화지(玩花池), 달놀이를 했다는 완월지(玩月池), 화장을 고쳤다는 소장대(梳妝台), 향랑(响廊), 서시동(西時洞),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는 우물 오왕정(吴王井) 등이 남아 있다.
영암선사 뒤쪽 후원을 빠져나와 인광대사(印光大师,1862-1940년)를 모신 링옌탑원을 좌측으로 휘돌아 비포장 흙길을 따라 금대(琴台)가 있는 산정으로 향한다. 인광대사는 정토 수행자의 길잡이로 '소장경(小藏經)'으로 알려진 전후 3편 총 100만 자가 넘는 <인광법사문초(印光法师文钞)>를 남긴 분으로 정토종의 13번째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오전 열 시경 고도계가 해발 180여 미터라고 알리는 '오중승적(吴中勝積)'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 암봉 위 영암산 정상에 올라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위에서 사방으로 트인 경관을 조망하고 있다. 하늘은 드높고 푸른데 햇살은 따갑기 그지없다. 서시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는 금대(琴台)에 대해서는 아무런 표지도 없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다.
산정을 뒤로하고 영암선사 후원을 거쳐 영암선사의 약사전, 다보불탑, 지적전 등을 둘러보고, 영암선사 아래쪽에 자리한 인공지탑(印公之塔)의 인광대사 전신 사리탑을 참배했다.
영암산 정상
고소대의 부조/낙서 가득한 기둥/ 잡초 무성한 지붕
내려올 때 둘러볼 요량으로 남겨두었던 링옌산 아래 동남쪽 얕은 언덕에 자리한 고소대(姑蘇臺)로 올랐다. 고소대는 오왕 합려가 초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BC 505년에 세웠는데, 그의 아들 부차는 이곳에서 서시와 연회를 베풀며 향락에 빠졌다고 한다.
나 혼자 뿐 찾는 이가 하나도 없는 고소대는 적막하고 쓸쓸해 보인다. 지붕의 기와와 기둥은 오래도록 돌보지 않아 폐허처럼 방치된 듯 보였다. 지붕 위에는 잡초가 군데군데 자리 잡았고, 이층 너른 누대 위 3층을 받치고 있는 수십 개 기둥마다 빼곡히 빈틈없이 낙서가 난무하다. 그중 한 기둥에 적힌 "공공기물 보호는 모든 이의 책임(爱护公物人人有责)"이라는 구호가 뻘쭘해 보인다.
서시의 요청으로 부차는 링옌산 남쪽 향산(香山) 쪽으로 수로 '젠징허(箭泾河)'를 건설하는데, 월나라 구천은 이 수로를 따라 진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당시 오나라 영역에 속했던 지금의 이곳 사람들은 오나라를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무대가 된 이곳을 일부러 찾지 않고 누대 기둥에 저렇듯 조롱하듯 낙서를 남긴 것일까?
이백, 백거이, 구양형 등 후대의 많은 시인묵객들이 고소대를 찾아 감회를 읊은 것은 역사 속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한 장면이 펼쳐진 누각 위에 올라선 감회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연꽃과 물 향기를 불러일으키고 고소대에서는 오왕(吴王)이 연회를 여누나.
风动荷花水殿香 姑苏台上宴吴王
_이백의 <口号吴王美人半醉>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는 영암선사 산문 쪽으로 나섰다. 시각은 아직도 채 정오가 되지 않아 기차표 예매 어플에서 돌아가는 열차 시각을 두어 시간 앞당겼다.
수시로 이마를 훔치던 손수건은 땀에 젖어 이미 물걸레처럼 축축하다. 반나절 짧은 동안이었지만 '소주팔경(蘇州八景)'으로 알려진 곳들 가운데 관왜궁(영암선사), 고소대, 서시동(관음동), 완화지 등을 둘러본 터라 마음도 젖은 손수건처럼 감흥에 흠뻑 젖어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