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2주일여를 남겨두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장거리 출행을 계획했다. 지금껏 발을 디뎌보지 못한 중국 남쪽 광시성의 구이린(桂林)과 류저우(柳州)를 둘러볼 참이다. 푸동공항에서 항공편으로 광시성의 구이린으로 가서 일박 후 그곳의 산수를 둘러보고, 기차 편으로 류저우로 이동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류저우에서는 유종원(柳宗元)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난닝(南宁)에서 나를 보기 위해 류저우로 오기로 한 옛 친구도 만날 예정이다.
오후 세 시경 호텔을 나섰다. 자전거로 지하철 2호선 러우산꽌(娄山关) 역으로 가서 푸동공항으로 향했다. 2호선은 푸동공항이 종점이지만 광란루(广兰路) 역에서 다른 전철로 갈아타야 한다. 호텔을 나선 지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려 푸동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의 항공권 자동발권기가 대여섯 대가 있지만 무슨 일인지 인공발권대의 줄만 길게 늘어서 있다. 탑승홀로 들어서서 C92번 탑승구까지 족히 20여 분을 걸어서 이동했다. 공항의 규모가 만만찮음을 알 수 있다.
길상항공 에어버스 321 Neo ACF기 HO1147편은 예정된 시각보다 40여 분 늦은 18:50경 푸동공항을 이륙했다. 대한항공도 이 기종을 도입하여 2022년 12월 1일 제주-김포 구간 첫 운항을 했다고 한다. 어느 블로거는 동 항공편 탑승 후기에서 경쟁 기종인 보잉 737 MAX와 비교하여 압승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비상탈출구 쪽 좌석을 배정받아 이륙 후 한참 동안 승무원과 마주 보며 앉아 있자니 서로 어색하다. 눈을 감고 있자니 승무원이 기대하지 않았던 기내식을 탑승객들에게 나눠준다. 기내식 내용은 닭고기 조림과 호박 볶음에 쌀밥이 든 작은 도시락과 샌드 케이크, 카레맛 과자, 앙증맞은 크기의 종이병에 든 주스 등이 든 종이상자 하나씩이다. 조금 후 음료를 제공하는데 커피 한 잔을 청해서 천천히 마시니 달달한 라테 맛이 그만이다.
에어버스는 쟝시성과 후난성의 성도인 난창(南昌)과 창사(长沙)의 상공을 거쳐 쉬지 않고 남서쪽으로 비행한다. 낮 비행기였다면 상공에서 삼강 풍경구와 구이린의 수려한 산수를 볼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마음에 인다. 구이린의 북서쪽에 위치한 삼강동족자치현(三江侗族自治县) 영역으로 진입한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21:10경 량쟝(两江) 공항에 착륙했다. 일일 투어를 예약해 둔 여행사로부터 내일 06:05에 호텔로 픽업을 하러 온다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각 출발이다.
2.
량쟝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의 리강(漓江; 리쟝) 부근에 있는 호텔에 10시경 도착하여 짐을 내렸다. 빈강로(滨江路; 빈쟝루)를 따라 리강 강변을 걷자니 거리의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밤 열 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리강은 구이린시 북서쪽 계강(桂江; 꾸이쟝)의 발원인 용강진을 기점으로 구이린시를 지나 양삭(阳朔; 양수어) 현의 북쪽 삼강구(三江口)까지의 수역을 이른다. 그 길이는 164km로 강바닥이 토사가 적은 자갈이라 수질이 깨끗하고 양안은 카르스트 산지 지형으로 강과 산이 어우러진 특유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리강은 계림시에서 지류인 도화강(桃花江), 소동강(小东江) 등 지류와 삼호(杉湖), 용호(榕湖) 등 여러 호수, 그리고 많은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져 한바탕 풍광의 잔치판을 펼치고 하류로 유유히 흘러간다. '갑천하산수(甲天下山水)'로 알려진 이 풍광을 감상하러 수많은 인파가 이곳으로 몰려들고 그 매력에 취해 밤이 깊은 것도 잊는 것이다.
상비산(象鼻山) 풍경구 입구를 스쳐지나 길 건너 삼호(杉湖) 가장자리에 자리한 지음대(知音台)로 다가서니 호수 건너편에 조명을 받아 휘황한 일월쌍탑(日月双塔)이 호수 수면에 제 모습을 비추고 있다.
상산띠런(象山滴人) 유람선 선착장에는 여러 코스의 야간투어 유람선이 출발한다. 그중 10:55 출발하는 40여 석의 작은 유람선에 리강과 그 지류에 둘러싸인 '양강사호(两江四湖; 량쟝쓰후)'를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양강사호는 이강(漓江), 도화강(桃花), 목룡호(木龙湖), 계호(桂湖), 용호(榕湖), 삼호(杉湖)를 이르는데 수계 길이는 7.33km로 북송 연간(960-1127)에 최초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리강의 유람선 선착장을 출발해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니 조명으로 치장한 강변의 산, 교량, 건물, 오가는 유람선 등이 강물 위에 화려한 유화처럼 저마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푸른빛 붉은빛 등으로 수시로 조명 화장을 바꾸는 해방교(解放桥; 지에팡교) 밑에서는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며 더러는 수영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좌측으로 스쳐 지나는 작은 암산을 스크린 삼아 레이저 쇼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명월봉(明月峰; 밍위에펑)은 층층 조명 띠를 두른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듯 아열대 바닷속 다채로운 원색의 산호초를 보는 듯 신비롭다. 유람선은 그 앞에서 한참 동안 꼼짝 않고 머물며 황홀경에 푹 빠져들게 한다.
목룡호(木龙湖; 무롱후) 건너편에 자리한 목룡탑(木龙塔)은 상하이 용화사의 롱화탑(龙华塔)을 닮았다고 한다. 목룡교(木龙桥) 밑을 지나 계후(桂湖; 꾸이후)로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노인산(老人山)이 스쳐 지나고, 여택교(丽泽桥; 리쩌교) 등 미려한 다리들도 색색 조명을 받으며 저마다의 자태를 뽐낸다.
유람선은 호수 속 작은 섬 호심도(湖心岛)를 거쳐 양교(阳桥) 다리 밑을 지나 일월탑이 자리한 삼호(杉湖) 선착장으로 들어서며 자정쯤 유람선 투어가 끝을 맺었다.
3.
도로에 접한 호텔 5층 방은 밤새 차량 소음 등으로 시끄러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일일투어는 예정보다 두어 시간 빠른 6시경 픽업을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두어 시간 당겨 오후 네 시경 구이린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이다.
50인승 버스가 투어 참가자들을 태우러 투숙한 호텔을 찾아 거리를 훑으며 지나자 어젯밤에 조명을 받아 풍경들이 어둠의 이불을 걷어내고 제 본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강변도로를 따라 걷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 자전거나 전동차를 타는 사람들, 일찍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작은 가게들,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을 깨우고 있다. 호텔들 부근에는 삼삼오오 모여 투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시내 중심부는 거대한 여행 기지처럼 보인다. 우리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은 가족 단위 투어객이 대부분이다.
구이린은 광시좡족자치(广西壮族自治区) 지급 시(地级市)로 2022년 말 현재 인구는 약 496만 명이라고 한다. 구이린의 지명은 진시황이 이 지역에 구이린(桂林), 샹(象), 난하이(南海) 등 3개의 군을 두면서 기원했는데, 구이린 군은 옥(玉)과 계피(桂皮) 생산량이 풍부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버스가 시 중심부를 조금 벗어나자 상어 이빨처럼 끝이 뾰족한 삼각추 모양의 야트막한 산들이 줄지어 서 있는 이 지역 특유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는 시내 중심부를 훌쩍 벗어난 서쪽 외곽에 자리한 국가삼림공원 황촌(黄村) 부근에서 구이린에서 출발하는 투어객을 모두 태운 후 남쪽의 '리장 갑천하산수풍광(甲天下的山水风光)' 경구로 향했다.
양삭의 경계로 들어서지 특유의 원뿔꼴의 산들이 병풍 속 그림처럼 줄지어 차창을 스쳐 지난다. 낙타의 등, 공룡의 등비늘, 아가리를 벌린 채 하늘로 솟구치는 물고기, 둥그스름한 머리 위로 한 끗 높이 틀어 올린 상투, 곧추 솟은 죽순, 호기로운 고릴라, 바이킹족의 투구, 산과 강을 품은 수석, 외뿔 코뿔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각양각색 백여 미터 남짓 수천수만 개의 봉우리들은 닮은 듯 서로 다르고 다른 듯 서로 닮았다. 봉우리 군락은 맑은 하늘 아래 큰 바다에 이는 파랑처럼 겹겹이 공간을 메우며 멀리까지 끝없이 펼쳐져 나간다.
우리가 쓰는 단어가 저마다 태어난 고향이 있다면 '산수(山水)'라는 단어는 필시 이곳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 속에 하늘의 별 하나씩을 간직하고 산다면 꾸이린 사람들은 저마다 저처럼 사랑스런 산 하나씩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
양삭에서 마지막 투어객 네 명을 태운 버스는 8시 조금 지난 시각 위롱허(遇龙河) 풍경구에 도착했다. 위롱허 풍경구는 월량산(月亮山; 위에량산) 북단을 끼고 흐르던 금보하(金宝河; 진빠오허)가 십리화랑(十里画廊) 풍경구에서 리강(离江)으로 합류하는 곳에 자리한다.
대나무 뗏목 주파(竹筏) 선착장에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투어버스 유람객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고, 이동 중 가이드가 장황하게 설명하던 내용도 알 길이 없어 갑자기 인파 속에서 미아가 된 듯한 느낌이다. 뗏목 타기는 애초에 마음을 접고 강변으로 다가가서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둘러보기로 했다.
기묘한 산들을 배경으로 길게 펼쳐진 위롱허 강물 위에 저마다 구명조끼를 껴입은 유람객들을 태우고 떠 있는 뗏목들이 한 폭 채색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다. 투어버스 일행들도 강물 위에 떠있는 몇몇 뗏목들에 올라 산수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터이다. 강 가장자리에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감상하다가 따가운 햇볕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다.
간간이 투어객을 실은 소형 헬기가 굉음을 내며 머리 위를 지나고 멀리 강 하류 쪽 하늘에는 패러글라이드 몇몇이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유유자적 떠다닌다.
풍경구에 도착한 지 세 시간이 지난 11:10 전후 흩어졌던 투어객들이 버스로 하나둘 돌아왔다. 중국인들끼리도 소통이 잘 안되었는지 버스로 돌아온 투어객 중 일부가 가이드와 한바탕 언쟁을 벌이다 그친다.
씽핑구쩐(兴坪古镇)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든 후 버스에 올라 양삭대교(阳朔大桥)를 건너 싱핑허(兴坪河)와 푸웬허(福源河)가 서로 만나 리강(丽江)으로 흘러드는 곳에 자리한 씽핑 선착장(兴坪码头)으로 이동했다.
싱핑 선착장 유람선 승선 매표소도 다른 곳과 매 한 가지로 인산인해다. 2층 경관대로 오르니 인민폐 20위안짜리 배경 그림이 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사진을 찍어주고 즉석 인화까지 해주는 장사치가 차지하고 있는 목 좋은 난간 옆에서 많은 사람들이 20위안 지폐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론 스마터 폰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가이드는 매표소의 긴 줄 뒤에서 차례를 기다려 20여 분만에 투어객들의 표를 샀지만, 탑승까지는 다시 한 시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언질이다. 인파 속에 묻혀 같은 버스를 타고 온 탑승객들이나 가이드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가이드에게 메시지를 넣자 한참만에 "173번 그룹을 호명했고, 우리는 207 그룹이다(喊到173号了,我们207号)"라는 답신이 왔다. 족히 두어 시간을 더 무더위 속에서 대책 없이 배회하면서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시간을 조정하고 일정을 바꿀 수 있는 자유여행과는 달리 계획된 장소만 고집하다가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여행의 감흥을 앗아가는 것이 패키지 투어의 허점이자 맹점인 것이다.
이곳의 산수가 '천하 으뜸(甲天下)'이라는 데는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하겠지만, 무더위와 번잡함에 지친 관람객들 얼굴과 마음에 어린 불쾌지수 또한 '갑천하'라 해도 부인하지 못할 듯싶다. 동네 부근에 있는 평범하지만 조용한 공원을 찾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처럼 대책 없이 인파가 몰려들어 통제불능 상태에 가까운 관광지를 왜 예약제로 운영하지 않는지 의아할 뿐이다.
세 시간여를 기다려 15:30경 유람선에 탑승한 후 인민폐 20위안짜리 지폐의 그림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리강 하류로 내려갔다가 선착장으로 되돌아오며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선상투어는 약 한 시간 반 만에 끝을 맺었다.
선착장에 접한 싱핑구쩐(兴坪古镇) 부근에서 가이드를 놓쳐 메시지를 주고받는 등 시행착오 끝에 구쩐을 가로질러 투어버스 정차장으로 가서 투어버스 '桂C5558' 차량에 올랐다. 여성 가이드는 40대로 보이는 작은 키에 평범한 모습으로 투어 내내 눈을 한 번 떼면 어디로 갔는지 모습을 감추어 투어객들의 애를 태우곤 했다. 가이드는 투어가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어디서 났는지 깃발을 손에 들고 정차장에 서있는 모습에 기가 차서 말이 막혔다.
밀물처럼 몰려든 여행객들과 복잡한 교통 때문에 구이린으로의 복귀 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아침에 "오후 네 시쯤 구이린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라던 가이드의 말이 무색하다. 정확한 도착 시간을 알 수 없어 버스 안에서 마음을 졸이면서 류저우행 열차 시각을 두어 시간 늦춘 21:20으로 변경했다.
시시각각 열차 시각은 다가오고 가이드에게 급한 사정을 얘기해 두긴 했으나, 투어객들을 차례로 아침에 태웠던 호텔에 내려주어야 할터이고, 하루 동안 가이드와 버스기사의 태도와 행동으로 보아 나를 배려하여 기차역으로 직행할 리도 만무해 보였다.
시내로 진입 후 첫 번째 투어객이 하차하는 지점에서 나도 함께 내려 택시를 불러(打车) 가능한 한 빨리 구이린역으로 달리자고 채근을 했다. 구이린 시내도 양수어(阳朔)처럼 도로가 막히기는 마찬가지다.
천신만고 끝에 5분 여를 남기고 기차역에 도착한 택시 문을 박차고 역사 쪽으로 내달렸다. 여권을 꺼내어 예매 내역을 확인하고 역사 안으로 진입한 후 엑스레이 검색기 벨트에서 나오는 배낭을 나꿔 채었다. 여권을 제시하여 재차 검표 절차를 마치고 허겁지겁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그 후 채 1분도 되지 않아 광저우를 시발역으로 하여 이곳 구이린을 거쳐 류저우까지 가는 D2957호 열차가 긴 몸뚱이를 이끌고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열차에 올라 선반에 배낭을 얹고 좌석에 털썩 앉으니 안도와 함께 피로가 온몸을 무겁게 짓눌러 온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긴 하지만 소리 없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만큼 무서운 존재도 없음을 새삼 실감한다. 하루동안 천하 으뜸(甲天下)이라는 계림의 산수에 묻혔다가 빠져나왔으니 아무려면 어떠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