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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Mar 10. 2024

봄 오는 길목의 국수봉

곤지암에서 넓고개까지


심술굿던 날씨가 물러나고 꽃샘추위도 한풀 꺾였다. 주초에 경칩이 지났으니 이제 봄도 멀지 않았다. 경강선 이매역에서 전철을 타고 H와 만나 곤지암역에서 내려 M과 합류했다. 2016년 개통된 경강선 전철은 판교에서 여주까지 10개의 역을 이어주는 총연장 57km의 전철로 주말 이른 아침인데도 빈좌석이 없을 정도로 승객이 적지 않다.


미리 친구들과 곤지암도서관 뒤에서 시작하여 앵자지맥(鶯子枝脈)이 지나는 국수봉을 경유해서 광주시와 이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넓고개까지 12km여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하이킹 같은 가벼운 산행을 하기로 했었다.


곤지암역 역사 밖으로 나서니 햇살이 따사롭다. 고개를 하늘로 쳐드니 푸른 대양을 항해하는 요트처럼 백로 한 쌍이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곤지암천 위에 걸린 인도교를 건너서 들머리인 곤지암초교 부근 곤지암 바위를 둘러보았다. 곤지암 바위 한가운데를 뚫고 4~5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향나무가 특이하다.



곤지암 지명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 이 바위와 신립(1546-1592) 장군의 묘는 곤지암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곤지암초교 옆과 윗장고개산 줄기에 각각 자리한다. 곤지암 지명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투신하여 전사하자 이곳 광주 신대리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부터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 바위 앞으로 지나려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말에서 내려서 걸어 다녀야 했다.


어느 선비가 신립 장군의 묘를 찾아가서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하고 핀잔을 주자 벼락이 그 바위를 내리쳐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옆에 연못이 생겼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마을 뒷산 끝자락 연못이 있는 곳의 바위"라는 의미로 이 부근을 '곤지암(崑池岩)'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한자표기는 '곤지암(昆池岩)'이다.


신립은 여진족 토벌에 용맹을 떨쳐 당대 최고의 용장이자 맹장으로 알려졌지만 한편으로 잔포(殘暴)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신립은 왜노들을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는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나 "조령과 같은 천혜의 험지를 지키지 않다니 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할 만하다."라는 이여송의 말처럼 그는 자신의 용맹만을 믿고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없이 무모하게 배수진(背水陣)을 쳤으니 패전은 그 자신만 몰랐을 뿐 예견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곤지암도서관 옆 들머리 계단으로 올라서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산비둘기 한 쌍이 머리 위로 날아가며 산객에게 환영인사를 보내고 뒤이어 까마귀도 '가악까악' 호응한다.


산행은 사태봉산, 탑봉, 불당골산, 깊은목산, 국수봉, 인배산, 적산을 차례로 지나 넓고개로 내려서는 코스로 이어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표가 감투봉과 불당골산으로 갈림길을 내놓지만 우리는 곤지암천 쪽으로 500여 미터 나앉은 감투봉을 버리고 불당골산 쪽으로 직진했다.


좌우로 트인 산책길처럼 평탄한 능선길을 걷는 기분이 호젓하니 좋다. 오른편 오곡천 너머 멀리 정광산 기슭에는 곤지암스키장 슬로프가 여전히 흰 눈으로 덮여 있고, 좌측엔 골프 코스가 능선에 아늑히 안겨 있다. 좀 더 전진하니 벌목하여 속살을 훤히 드러낸 측 능선기슭 너머 툭 트인 조망이 장쾌하다.


지난주 M과 함께 했던 눈 덮인 용화산에서의 악전고투, 내장 황악 구병 미암 도솔 주왕 등 다음 산행 후보지, 월출 유달 주작 천관 등 호남의 명산들과 산악인의 영원한 로망 지리산 종주산행,... 고도 220여 미터 평온한 능선길은 동행과 함께 지난 산행 이야기며 앞으로 찾아볼 전국 여러 명산들에 대한 기대와 설렘 등을 끊이지 않고 이어가기에 더없이 좋다.


배낭도 메지 않은 하이커 3명이 동네 뒷산으로 산책 나온 듯 스쳐 지난다. 아직 겨울이 온전히 물러나지 않아 얼었던 땅이 다 풀리지 않아 발밑이  질척대는 번거로움이 없어 다행이다.


평탄한 능선이 가팔라지며 해발 310미터 태봉산 정상을 내놓는다. 태봉은 이내 내리막 비탈길을 내놓고 내리막이 다하면서 다시 탑봉으로 오르막이 이어진다. 해발 345미터 탑봉에는 잔돌로 정성스레 쌓아 올린 약 2미터 높이 원만한 원뿔 모양의 돌탑이 자리한다.



내리막을 지나고 불당골산으로 오르는 능선은 경사가 더 급해서 발등이 발목에 붙을 듯 접힐 지경이다. 이정표 기둥에 적힌 표식으로 해발 405미터 불당골산을 확인했다. 이어서 참나무 낙엽이 두텁게 깔린 가파른 오르막 비탈을 두 번 올라서서 기린 목처럼 긴 능선을 지나면 해발 395미터 깊은목산이 맞이한다. 깊은목산은 참나무 둥치에 어느 산악회에서 붙여놓은 표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올라온 만큼 다시 내리막 비탈을 내려와서 안부에 자리한 무덤 옆을 지나 숨을 한 순 돌리기도 전에 곧바로 거대한 릉처럼 보이는 국수봉의 가파른 비탈길이 앞을 막아선다.


산행 시작 두 시간 반 만에 가파른 경사를 거슬러 젊은 소나무들이 성기게 서있는 해발 423.8미터 국수봉(國守峯) 위로 올라서는 순간이 이번 산행의 클라이맥스라 해도 무방하지 싶다.


촘촘히 세워놓은 이정표와는 달리 산(山)이나 봉(峰)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나온 봉우리들은 하나같이 표지석이 없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국수봉 정상에도 이정표 기둥에 '국수봉'이란 표식이 붙어 있을 뿐 정상 표지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산행지를 물색하던 중 국수봉(國守峯)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이 부근에서 6개나 검색되어 연유가 궁금했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멀지 않은 광주시 쌍령동 부근은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의 현장이었다.


쌍령은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서 동쪽으로 16㎞ 거리에 있는 크고 작은 두 개의 고개를 가리킨다. 쌍령전투는 임진왜란 때의 칠천량전투, 6.25 때의 현리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상 3대 패전으로 알려져 있다.


1636년 병자년 청태종은 만주족, 몽골족, 한족으로 구성된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진격했다. 청군은 그해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9일 압록강을 넘어 전봉장(前鋒將) 마부태 부대는 의주 백마산성, 영변 철옹성, 안주성, 황주 정방산성 등을 우회해서 10여 일 만에 한양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다. 최근 KBS2의 역사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 장수 소손녕이 국경의 방어거점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빠르게 진격하는 전략과도 닮아 있어 흥미롭다.


강화도로의 몽진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청군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이에 여러 도(道)의 감사나 병사들은 군사를 이끌고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栐)이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1637년 1월 28일 쌍령 일대에서 3천여 청군과 맞부딪쳐 싸웠으나 4만(실제는 약 8천 명으로 추정)의 아군이 전멸하다시피 크게 패하고 말았다.


국수봉(國守峯)이라는 이름에는 당시 경상도 등 남쪽에서 달려온 근위병들이 청군에게 포위되어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출하여 나라를 보존하고자 했던 간절한 염원과 전투에서 패한 원통함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수봉에서 송전탑까지 해발 320여 미터 평탄한 긴 능선길 또한 더없이 호젓하다. 여러 봉우리에서 신촌천과 나란히 뻗은 경충대로 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들 사이 골짜기마다 안겨 있는 수양리 등 작은 마을들이 아기자기하고 정겨워 보인다.


앙상한 가지에 가시를 드러낸 아카시아 군락에 둘러싸인 송전탑 부근의 두릅나무들은 아직은 줄기 끝에 싹을 틔우지 않았다. 저 멀리 동원대 캠퍼스를 품은 정개산에서 원적산으로 이어지는 늠름한 앵자지맥이 한눈에 들어오며 길게 이어지던 능선 산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정오쯤에 인배산을 지나간다. 일면식도 없지만 전국 수많은 산마다 리본으로 이정표를 남겨 산객들에게 도움을 주는 '준희', '비실이부부' 등 산우(山有)들이 남긴 표식으로 '해발 319미터 인배산'을 확인하고 걸음을 옮긴다.


지도 앱은 감투봉을 비롯해서 지나온 능선과 봉우리 주위에 황지봉산, 된지양산, 가장골산, 풍목골산, 아라골산, 뒷산 등 독특한 이름의 수많은 산들이 있다고 알려준다. 해발 2~3백 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과 봉을 오르내리고 산과 봉 사이 산책로처럼 평탄한 능선을 걷는 즐거움이 일품이다.


인배산을 지나 적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능선 일부분이 무슨 연유인지 숲 대신에 황톳빛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궁금증이 발동해서 능선 위에서 엔진을 멈춘 채 서있는 포클레인 운전석의 기사에게 물어보니 도로공사 중이라고 한다. 앞서가던 '시사 백과사전' M을 따라잡아 물어보니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를 뚫기 위한 공사라고 정확히 알려준다.


경제와 산업의 인프라이자 물류와 교통의 동맥인 도로를 뚫고 철로를 개설하는 일은 국가나 지자체들이 당연히 힘써야 할 부분이지만,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민족의 정기를 품은 백두대간, 정맥, 지맥 등 전국 많은 산줄기들이 훼손되고 있음도 엄연한 사실이다.

수도권과 가깝고 산지가 많은 이곳 광주시에서도 난개발의 현장을 곳곳에서 목도할 수 있다.



인배산에서 2.3km여 거리 적산은 넓고개를 만나며 고개 건너편 정개산 줄기에 손을 내밀며 멈추어 선다. 산행 중 만난 이정표에는 넓고개(廣峴: 넉고개)가 신립 장군의 설화와 얽혀 '넋고개'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 곳이 많았었다.


경충대로를 건너고 동원대학 정문 앞을 지나서 넓고개를 넘어서면 이천 땅이다. 이천 쪽 고갯마루 정개산 기슭에 '이천의병전적비'가 자리한다. 이 전적비는 1896년 1월 17일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의병들이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을 거의 전멸시킨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이천시 원로들 주도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고개 아래로 느긋하게 펼쳐진 이천 땅을 내려다보며 신둔도예촌역으로 향한다. 넓고개 아래 자리한 '이행균 조각연구소' 마당에 전시된 조각가의 수려한 작품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덤으로 만끽하며 산행을 갈무리한다. 칠 년 전 자목련과 진달래가 한창 꽃잔치를 벌이던 사월 어느날 M, H와 함께 올랐던 정개산이 우리들 뒤에서 잘 가라는 인사를 보낸다.

Laojang 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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