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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pr 08. 2024

비슬산 참꽃 필 무렵

주중 내린 비로 목련꽃이 모두 떨어지고 벚꽃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 허전함이 덜하다. 이른 아침 포항에서 대구로 향했다. 진달래 군락으로 이름난 비슬산(琵瑟山) 산행을 할 요량이다. 세종시에서 손수 차를 운전하여 온 친구 M이 대구 지하철 1호선 종점인 설화명곡 역으로 픽업을 왔다.


비슬산은 1995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의 유가면 등 3개 면과 경북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 있는 유려한 산군이다. 달성군 화원읍과 옥포읍을 지나 소쿠리 형태의 거대한 비슬산 산군에 둘러싸인 유가읍으로 진입했다.  


첩첩 봉우리와 산줄기들이 만든 깊은 골을 따라 난 왕복 이차선 도로로 고도를 높여 갔다. 산기슭 곳곳에 만개한 벚꽃의 자태에 연신 감탄을 하며 현풍천과 쌍계천변 도로를 거슬러 올라서 유가사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불과 수십 분만에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심산유곡 무릉도원 산수화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주차장에서 스틱을 펴고 배낭을 메고 아스팔트길을 500여 미터 오르니 유가사 앞 사면에 서로 어우러져 있는 하늘 높이 솟은 노송 군락과 월뿔형 돌탑 군이 산객을 맞이한다. 사찰 뒤 멀리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비슬산의 자태는 웅장하기 그지없고 오른편 계곡에서 들리는 청량한 물 흐르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돌계단을 따라 차례로 자리한 사천왕문과 범종루 문을 지나고 시방루 앞마당에서 부도탑과 수도암이 자리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산행 들머리로 향했다.


계단 올라 수도암 경내로 들어서니 너른 잔디 마당 저편의 극락전 지붕이 멀리 비슬산 봉우리를 머리에 이고 있다. 가지마다 벚꽃을 팝콘처럼 새하얗게 만개한 채 경내 한편에 서있는 아름드리 벚나무는 한복차림의 단아한 규수집 여인네를 닮았다.


수도암 돌담장을 좌측에 끼고 비슬산 능선 등로로 이어진 아스팔트길을 오른다. 이내 길은 도성암과 비슬산 등로 양 방향을 나뉘는데, 구불구불 포장도로가 놓인 도성암 쪽 길을 버리고 산정 쪽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이정표는 비슬산 정상인 천왕봉까지 2.5km 거리라고 알린다. 해발 400미터쯤의 유가사에서 해발 1084미터 산정 까지는 약 680여 미터의 고도 차이가 있으니 만만찮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능선마루로 치고 오르는 길은 쭉쭉 곧고 높게 뻗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7:3 비율로 섞인 잡목이 거의 없는 성긴 혼효림 숲으로 시야가 쾌활하여 마음도 저절로 트이는 느낌이다.


가파른 경사를 거슬러 고도를 높여 가자 큰 바위들이 좌우로 하나둘 나타나고 해발 740여 미터 지점에 도성암 위쪽의 도통바위로 난 갈래길이 나온다. 주 등로에서 벗어나 우측 수평으로 난 길은 80여 미터쯤 거리에 수십 길 높이의 거대한 '도통바위' 아래로 인도한다. 도통바위의 유래에 대한 바위 옆 안내판의 설명과 전해오는 전설이 흥미롭다.


"대구 포산(苞山; 비슬산)에 은거하던 관기와 도성은 신라 때의 승려이다. 관기는 남쪽 고개의 암자에 도성은 북쪽의 굴에 거처했는데 10리쯤 떨어져 있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나무가 남쪽으로 향하고 관기가 도성을 부르고자 하면 나무가 북쪽으로 누워 서로 왕래하면서 여러 해 동 사귀었다.


도성은 처소 뒤 바위 위에 좌선하다가 성도하여 행방을 감추었는데 이를 '도통바위'라고 한다. 이어 관기도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손들이 수도하던 도성바위 밑에 암자를 지었는 이를 도성암(道成庵)이라 하였다."

_출처: 달성군 안내문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비슬산에서 천 명의 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온다. 이곳에서 도를 갈고닦은 도성 국사, 일연 스님, 정일 도사, 광기 스님 등 지금까지 45명가량의 도인이 출현했다.


그중의 한 명이 고려시대의 금물녀로 이곳에서 속세의 고난을 내려놓고 도를 깨우쳤다는 '도통바위 전설'의 주인공이다.


산나물을 캐어 쌀이나 보리쌀 등과 바꿔서 생계를 이어가던 금물녀는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아이들과 함께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갔다. 그녀는 온 천지가 눈으로 뒤덮인 한겨울 어느 날 도성암 위쪽 커다란 바위 밑으로 올라와서 눈을 감고 앉아 얼어 죽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홀연히 흰 눈이 뒤덮힌 온 산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스님의 법문이 울려 퍼졌다. 법문에 귀 기울이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이치에 골몰하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여인은 감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도를 깨치게 되었다. 그 바위 아래 구멍이 생겨났고 그 후 그 여인을 보았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_출처: 디지털대구문화대전


도통바위를 등지고 몸을 돌리니 바로 아래 도성암 기와지붕이 보이고 멀리  비슬산의 여러 봉우리들과 유려한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물금녀 등 도인들은 이곳에서 도를 깨쳤다지만, 나는 힘겨워하는 육신에게 잠시 가파른 비탈을 벗어나게 하니 막혔던 숨이 통하며 가슴이 트이는 느낌이다.


산행 초입부터 많이 눈에 띄던 돌탑들이 산 중턱 부분까지 간간이 눈에 띈다. 해발 800미터쯤의 나무계단길로 접어들자 바람이 작게 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훔쳐내던 번거로움을 잠시 덜어준다.


산마루 쪽에서 내오는 산객에게 반대편 코스는 덜 힘드냐고 묻자, 앓는 소리로 "이이고 힘듭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느 방향이든 어디에 처한 들 어느 인생이든 진 짐이 무겁고 힘들지 않을까? 싶다.


해발 1000미터 지점을 지나자 '정상까지 500미터'라는 이정표가 힘을 솟게 한다. 이내 능선 마루로 올라서니 앞쪽에 천왕봉이 잡힐 듯 지척에 있고, 아래쪽에는 산에 안긴 유가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부 능선길 주변의 비바람 눈보라에 꺾이고 부러져 드러누워 있는 노송들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간간이 무리 지어 있는 어른 팔뚝 굵기 진달래 군락은 아직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약 2시간 만에 비슬산 정상 해발 1084미터 천왕봉에 도착했다. 마른 억새와 앙상한 진달래가 바위와 어우러진 드넓은 정상부의 가장자리 기암 위에 정상 표지석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앞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컬러풀한 등산복 차림의 산객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표지석 부근에서 한참 동안 머물며 능선 아래쪽 장쾌하게 펼쳐진 파노라마를 조망했다.


너른 평원의 억새밭이나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자리한 육각정 정자 두 곳 등 정상부 곳곳에 자리를 틀고 앉아 챙겨 온 음식을 들며 담소하는 산객들 얼굴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인다. 표지석 아래 너럭바위 위에 배낭을 내리고 간단히 허기를 달래고 대견봉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완만한 능선 내리막길 주변에 노송들이 둥치째 꺾이고 부러져 드러누워 있는 모습이 융단폭격을 당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늦겨울 폭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M이 귀띔한다.


해발 1000 내외 능선 흙길은 폭신하여 발걸음이 가볍고 공기는 선선하여 기분이 상쾌하지만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내놓기도 한다. 월광봉을 우회하는 오르막 비탈길에서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던 일단의 젊은 여성 산객이 참꽃 군락지까지 아직 멀었냐고 묻는다. 지도 앱을 참고로 어림해서 "거진 다 왔다"라고 대답하자 그녀 동료 중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한 명이 "거짓말"이라고 단언하듯 대꾸한다.


산행에서 종종 하게 되는 선한? 거짓말은 지친 산객에게 힘을 북돋워 주기도 한다. 마침 군락지 쪽에서 마주 오는 산객이 있어 물어보니 10여 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거짓말쟁이의 누명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녀들과 함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발길을 다잡는다.  


비탈길이 다하고 평탄한 길로 이어질 즈음 월광봉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주 등로에서 살짝 벗어나 비탈 위쪽 100여 미터 지점에 자리한 월광봉으로 올랐다. 봉우리 위에는 청도군에서 세운 이정표와 상세한 산행 안내도가 자리하고 있다. 먼저 올라온 산객 두 명이 진달래 군락지를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남기고 있다.


참꽃 군락지는 월광봉에서 대견봉을 거쳐 유가사 쪽으로 내려앉는 긴 능선과  그 사이 30여만 평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월광봉 전망대에 올라서니 광활하게 펼쳐진 군락지의 수천 수백만 그루 진달래는 아직 겨울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누런 색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 보인다.

실제 사진(상)/안내판 사진(하)

청도군에 속한다는 월광봉은 진달래 꽃이 다투어 필 무렵이면 조망지로서 제격이지 싶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참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할 일주일쯤 후로 날아가서 이 자리에 서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편의 청도군 각북면 쪽도 잠시 조망하고 월광봉 뒤로하고 주 등로 능선으로 내려서면 본격적인 진달래 군락지로 들어선 셈이다. 가지마다 갓 부화한 병아리 깃털처럼 옅노랑 색깔로 맺혀 있는 꽃망울은 당장이라도 연분홍 꽃잎을 터트릴 태세이다.


조바심에 제철보다 앞서 군락지를 찾아온 많은 상춘객들은 꽃망울을 머금은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채 융단처럼 펼쳐진 군락지 사이로 놓인 나무 데크 길을 서성이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조망용 나무데크 길과 연결된 강우레이더관측소가 자리한 조화봉으로 통하는 포장도로는 공사 중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조화봉을 등지고 군락지를 감싸 안은 능선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휘돌다 보면 대견사가 조화봉과 대견봉 사이 능선 아래 남향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신라 헌덕왕 때 보당암(寶幢庵)으로 창건된 천년고찰로 조선 세종 때 대견사로 이름이 바뀐 이 사찰은 '북 봉정암, 남 대견사’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전국에서 손꼽히는 기도도량이라고 한다. 가파른 절벽 가장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은 설악산 봉정암의 오 층 석탑이나 경주 남산의 용장사터 오 층 석탑과도 흡사해 보인다.


절을 아늑히 둘러싼 능선에는 형제바위, 소원바위, 참선바위, 층층바위, 큰 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부처바위, 부부바위 등 특이한 모양새의 수많은 기암이 둘러서 있고 능선 반대편에는 참꽃 군락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이 사찰은 일본의 기운을 가로막는 혈(穴)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1917년 강제 폐사되고 삼층석탑 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대견사지’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2011년 11월 달성군과 동화사에 의해 재건이 시작되고 2014년 삼일절에 기공식과 개산식을 열어 '일제에 의해 단절된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다'라고 하니 천만다행한 일이다.


동화사의 말사로 그 이름이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대견사가 자리한 곳은 수많은 도인을 낳았다는 비슬산 전설에 걸맞게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요지로 일제가 시기하여 괜한 트집을 잡을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은 1227년 22세 때 승과에 급제한 후 이 사찰에서 초임 주지로 부임하여 22년간 주지를 지냈다고 하니 그 의미가 남다르게 와닿는다.


일연이 1281~83년 무렵 인각사에서 저술한 삼국유사는 단군신화, 고주몽 박혁거세 석탈해 등 삼국 건국 시조들의 탄생설화, 만파식적, 향가 등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칫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을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설화와 가사문학 등을 전함으로써 한국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총체적 문화유산의 보고를 지금껏 전하고 있으니 우리 역사에 있어 중국의 사마천에 버금가는 위대한 사가(史家)로 칭송해도 결코 과하지 않을 듯싶다.


대견사 경내의 삼층석탑, 마애불, 대견보궁, 관음전, 산신당 등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서로 기댄 바윗돌이 만든 굴 속 암벽에 음각되어 있다는 마애불은 눈으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리랑카에서 가져왔다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뒷벽이 뚫린 대견보궁 뒤편 사리탑에 봉안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칠 년 전 설악산을 찾았을 때 벽기둥에 '세상 지혜는 버리고 들어오라(入此門來 莫存知解)'는 법문이 적힌 봉정암의 적멸보궁 투명한 유리창으로 마당 건너편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오 층 석탑이 들어와 보좌에 앉은 듯했던 모습이 선명히 되살아난다.


비슬산산림욕장에서 셔틀버스가 운행되는 까닭인지 대견사와 그 뒤편 능선의 참꽃 군락지 주변은 아직 제철이 아님에도 등산객과  상춘객으로 제법 많이 분빈다. 대견사를 나서기 전에 약수를 한 모금 마시니 도(道)라도 깨우친 듯 개운한 느낌이다.


대견사를 뒤로하고 지척에 있는 해발 1035미터 대견봉에 올라서서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이제 산행도 막바지에 다달아 유가사 쪽으로의 2.9km 고도차이 약 600여 미터의 하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비탈 내리막길 주변에 다른 무리보다 일찍 꽃을 피운 진달래도 간간이 눈에 띈다.


김포에서 왔다는 여성 산객 세 분은 멀리 남쪽까지 진달래를 영접하러 왔다가 실망이 크다고 했다. 오가며 여러 번 마주친 청주에서 단체 산행을 온 산객들은 진달래야 피었던 말았든 상관없다는 듯 여기저기서 인증 사진을 남기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딸과 함께 산행을 온 한 부부, 아내가 진달래꽃 옆에 얼굴을 대고 "누가 더 예뻐"라고 아양을 떨자 "말해 놓고도 민망하제"라고 답하는 남편, 그 모습에 입가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어찌 저리 무뚝뚝할까! 영락없는 경상도 대구 사람이네'라는 생각을 했다.


고도가 낮아지며 봉우리를 터트린 참꽃들과 함께 생강나무꽃 등도 자주 눈에 띈다. 해발 600미터쯤에서 너덜바윗길로 접어들자 우측 계곡에서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계곡 주변에는 잎을 갖 틔운 버드나무를 비롯한 온갖 활엽수들이 머지않은 봄의 향연을 위해 성대한 초록빛 치장을 준비하고 있다.


맑고 풍부한 수량의 계곡물로 세수를 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대견봉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여 만에 유가사 뒤쪽으로 내려섰다. 유가사 뒤편 너른 산기슭에는 여러 모양의 바윗돌에 소월의 <진달래꽃>',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춘원의 <애인>, 묵연 스님의 <다 바람 같은 거야> 등의 시를 담은 시비들이 돌탑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흥덕왕 때인 827년 도성(道成) 스님이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유가사의 용화전, 나한전, 산령각, 대웅전 등 불전을 둘러보고 범종루와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며 산행을 마무리했다.


진달래꽃 명소로 알려진 비슬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다 보지 못한 듯하여 아쉬움이 남지만 이 산이 품은 역사를 되새겨 보고 전설도 곱씹어 본 의미 있는 산행이었다. 제 철보다 때 이르게 찾아온 아쉬움을 달래주려는지 비슬산이 멀어지는 산객에게 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위로의 말을 던진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_김소월의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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