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 등 온갖 봄꽃이 차례로 피고 지는 호시절이다.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 절기에 걸맞게 전국에 비가 뿌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친구들이 세종과 고양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포항까지 달려왔다. 청송의 주왕산 산행을 하기로 한 날인데 산행의 기대로 들뜬 마음은 오후 한때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아랑곳 않는다.
여섯 시경 M이 운전하는 차량에 H와 함께 탑승하고 포항 시내에서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으로 달렸다. 포항시 서북쪽 기계면을 지나고 귀에 익은 지명인 죽장면으로 들어선 지 얼마 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표지판의 '입암서원'이라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니 지척에 있어 호기심 많은 H와 의기투합 M에게 부탁하여 한 번 들러서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죽장면소재지를 지나서 1km쯤을 더 거슬러 올라갔다. 가사천(佳士川)이 금호강의 지류인 자호천으로 합류하기 전 입암리 마을을 휘돌아 내려가는 곳, 족히 수령 수 백 년이 되어 보이는 늠름한 아름드리 느티나무, 소나무, 향나무 등이 서있는 도로변 언덕배기 위에 자리한 서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서원은 1657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선시대 중기 인동(仁同) 출신의 대성리학자인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서원이다.
입암서원(위)/압암정사(아래)
언덕을 올라 대문이 잠긴 서원 앞에 서니 낮은 담장 너머로 서원 처마 안쪽에 걸린 '입암서원(立巖書院)' 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나저제나 한번 찾아보리라 마음에 품고 있던 입암서원을 눈앞에 마주하는 감회가 남다르다.
언덕 아래 저쪽 산록이 내려앉다가 앞쪽에 넉넉한 공간을 두고 암벽으로 우뚝 멈추어서는 곳, 하천 가장자리에 기둥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두 개, 그리고 그 바위와 하천을 내려다보며 자리한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직 한 가지 할 일이 있네. 세상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하고 삶의 마지막이 부귀영화로 치달리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고, 오직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아서 몸을 닦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라네.
......
저 입암은 아침저녁으로 마주할 때마다 솟아 있어 천만년이 지나도 항상 그 모습 그대로라네. 거센 물결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도 흔들지 못하고, 장맛비도 썩히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로도 녹이지 못하네."
"온 천하에서 제일가는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야흐로 온 천하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_여헌,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 中
여헌은 1596년 입암(立巖)에 잠시 은거하며 권극립, 손우남, 정사상, 정사진 등과 교유하며 지냈는데, 11년 후인 1607년 입암 부근 가장 좋은 자리에 서재인 입암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평생 40여 차례나 제수된 벼슬을 모두 사양한 것은 18세 되던 해에 지은 저서 <우주요괄첩>에서 관직에 오르기보다는 스스로 성인이 되겠다는 확고한 인생목표를 천명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 초상
하늘이 흐려 해는 보이지 않아도 날이 밝은 지 한참이 지난 시각 마을에서 연신 들려오는 닭울음소리와 함께 서원을 뒤로했다. 아침 식사를 거르는 법이 없다는 친구들 성화에 죽장삼거리 부근 식당에서 곰탕을 시켜 드니 배가 든든하기 그지없다.
첩첩산군 사이로 난 도로를 달려 길을 재촉했다. 포항 시내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장면을 가로지르고 해발 410미터 꼭두방재를 넘어서 청도군 현동면 도평버스터미널까지 이어진 '새마을로'를 따라 청도군 경계로 들어섰다.
역사적 인물, 전설, 특산물 등의 연고권을 두고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아전인수격 원조(元祖) 논쟁도 적지 않지만, 포항과 청송을 비롯해서 경산, 경주, 구미, 청도, 밀양, 성남 등 여러 지역에 '새마을로' 도로가 있는 것은 빈곤퇴치와 지역사회개발에 기여한 새마을운동 정신을 이어가자는 의미일 것이다.
사과 모양의 빨간색 버스 정류장과 차창 밖 좌우로 연신 스쳐 지나는 하얀 꽃을 틔운 사과 묘목들이 가지런하게 자라고 있는 사과밭이 사과의 고장에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여덟 시경 대형 버스와 승용차량 공용 널찍한 주왕산 주차장에 도착해서 신발 끈을 조이고, 스틱을 펴고, 배낭을 메며 산행 채비를 했다.
주왕산에서 골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다. 주왕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을 끼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가로수와 식당 매점이 좌우로 줄지어선 도로를 따라 약 1km를 올라가니 대전사(大典寺)가 맞이한다.
사찰 입구로 들어서니 범종각 뒤 널찍한 마당 건너편에 관음전 지붕 위에 서로 기대어 선 다섯 둥근 암봉, 즉 '기암(奇巖)'이 마치 머리에 쓰는 관인양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초파일까지는 아직 이십 여일이나 남아 있지만 부처님의 자비와 깨달음을 갈구하는 불자들의 열망은 사찰 마당 위 하늘을 빨강 노랑 등 수많은 원색 연등으로 가득 채웠다.
대전사와 기암
주왕(周王)의 아들인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불린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이 사찰은 통일신라 때인 672년 의상(義湘) 또는 고려 태조 때인 919년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빼어난 풍치를 자랑하는 주왕산(周王山)의 여러 장소는 그에 걸맞은 흥미로운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주왕산 이름은 당나라 때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한 주도(周鍍; 周王)가 도망쳐 숨어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두 손을 합장한 천수천안관음과 해상용왕 등 불상이 자리하는 관음전과 그 옆 보광전 내부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관음전 앞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미소의 보살님과 서로 합장을 한 번하고 대전사 좌측 후면 주왕산 산행 들머리로 향했다.
여러 코스 중 대전사에서 출발하여 주봉(主峰)에 오른 후 칼등능선을 지나 두 계곡이 만나는 후리매기 삼거리로 내려온 후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협곡 등 계곡의 숨은 비경들을 둘러보며 원점 회귀하기로 했다.
좌측에 계곡을 끼고 가다가 '주봉마루길'이라는 표식이 있는 나무기둥 문을 지나 주봉까지 2km 여 오르막 경사가 이어질 산행을 시작했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이제야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온 나와는 달리 M은 주왕산 산행이 5번째라 하고 H는 아내와 함께 주왕계곡에 한 번 왔었더란다.
소나무와 참나무의 성긴 숲은 초록으로 가득하고 철쭉은 여기저기서 녹색 잎사귀 위로 연분홍 꽃을 활짝 펴고 산객을 맞이한다. 계절마다 산행의 묘미는 각기 특별하겠지만 온갖 초목이 앞다투어 초록 잎을 틔우고 저마다 독특한 꽃을 피우는 봄철 산행이 가장 황홀하지 않을까 한다.
가파른 비탈길은 해발 약 250미터 대전사에서 해발 720미터 주봉에 닿기까지 숨을 고를 수 있게끔 전망대 세 곳을 내놓는다.
비탈길로 접어들자 계곡과 함께 물소리도 멀어지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골 건너편 기암(奇巖)이 흡사 도깨비 뿔처럼 보인다. 소나무 숲은 참나무 숲으로 이어지고 길옆에서 노랑무늬붓꽃이 발길을 멈추게도 한다.
앞서간 일단의 젊은 산객들이 먼저 도착해 있는 제1전망대 벤치에 앉아서 거칠어진 숨을 잠시 고르고 산행을 이어갔다. 한층 고도가 올라간 제2전망대에 올라서니 깊이를 알 수 없는 주방천 계곡 건너편혈암, 장군봉, 기람, 연화봉, 병풍바위와 이쪽의 급수대 등 암봉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산 아래쪽에서 옅은 분홍색을 띠었던 철쭉은 능선마루 부근에서는 키는 작아졌지만 꽃은 성숙한 여인의 진홍색 립스틱처럼 더욱 짙어졌다. 주봉 800미터 전 능선 마루로 올라서니 평탄한 길이 주봉으로 인도한다.
사방이 툭트인 마지막 제3전망대에 올라서니 능선을 타고 넘는 서늘한 바람에 몸에 밴 땀이 모두 씻겨나가는 듯하다. 전망대 데크 아래 차례로 연초록 잎과 목화솜처럼 흰 꽃이 어우러진 쇠물푸레나무, 뼈대를 드러낸 고사목, 노송 군락이 자리하고 계곡 건너편에 흐린 하늘을 인 암봉들이 암벽을 드러낸 채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주봉은 턱밑에 급전직하 나무계단길을 내놓는다. 그 길목에 새하얀 나비 날개를 닮은 꽃잎을 가진 꽃을 피운 싸리나무처럼 생긴 나무 군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검색을 해 보니 '가침박달'로 세계적 희귀종이라고 하니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내려온 계단의 높이 보다 조금 더 높이 사면을 오르니 네댓 명 산객들과 함께 해발 720미터 주봉 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산행 때와는 달리 산행 시작 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산정에 도착하니 마음이 느긋해진다. 기실 오늘 산행은 주방천 긴 계곡에 숨어 있을 기암절벽과 폭포를 보며 걷는 트래킹이 주가 되는 '힐링 산행'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명소로 널리 알려진 주산지도 둘러볼 요량이다.
산정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고 계곡 쪽 하산길로 발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강풍이 몰아치며 주변 나무들이 사시나무 떨듯 가지와 잎을 떤다. 바람이 예고된 비를 몰고 가까이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주봉 아래 갈림길에서 가메봉 쪽을 버리고 칼등고개 쪽으로 방향을 잡아 주방천 계곡 후리메기삼거리로 발길을 재촉했다.
허리 높이 둥치에 송진 채취의 깊은 상처 자국을 간직한 채 서있는 등로 옆 노송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온갖 시련과 풍상을 이겨낸 늠름한 기품이 엿보인다. 6,70년대 송진 채취 후 원목으로 벌채되던 주왕산 소나무들은 1976년에 주왕산이 우리나라의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수난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봉에서 2km여 흙길, 느슨한 경사의 솔숲길, 구불구불 이어지는 나무계단길 등을 거쳐서 칼등고개 능선이 가메봉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만나며 계곡을 내놓는 후리메기삼거리로 내려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폭포들과 계곡 주변 파릇한 잎사귀와 화사한 꽃으로 단장한 숲을 감상하면서 계곡 위에 걸린 몇 개의 다리도 이리저리 건너면서 등로와 나란히 흐르는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어느 폭포는 부챗살처럼 물줄기를 펼치며 떨어지는 모습이 흡사 내연산의 복호폭포를 닮았는데, 그 아래 너른 소의 수면엔 산벚나무 꽃잎이 떨어져 온통 수를 놓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속에는 버들치 무리가 활기차게 유영하며 봄을 만끽하고 있다.
후리메기삼거리에서 약 1km를 내리 흐른 계곡은 주방천에 합류한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후드득 제법 많은 비로 바뀌어 손에 들고 있던 스틱을 접고 우산을 폈다. 문득 봄비 내리는 밤의 호젓한 정취를 노래한 당나라 때의 대시인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 시구절이 떠올랐다. 때마침 오늘은 곡우(穀雨) 절기이고 산행에 이어 계곡 절경 탐방을 시작하려는 시각에 맞추어 내리는 비가 싫지 않고 오히려 반가왔기 때문이다.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내리네.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_두보, <春夜喜雨> 中
한편, 두보가 짧았던 하급 관직 시절인 47세 때 지은 시 <곡강(曲江)>에 드러난 혼란한 시대 궁핍하고 불우한 삶 중에도 풍류를 잃지 않은 그의 여유로움이 부럽기도 하고 닮고 싶기도 했다.
"꽃잎 떨어지고 봄날이 가는구나,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 근심에 젖게 하네
만물 이치 생각하면 꼭 즐겨야 하리니,
허명에 자신을 묶어 무엇하리오
조회에서 돌아오며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매일 강어귀에서 취해서 돌아오네.
외상 술값은 가는 곳마다 있지만,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네."
_두보, <曲江> 中
용연폭포
이정표가 가리키는 주방천 상류 쪽으로 300여 미터를 거슬러 올라가자 주왕산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라는 높은 낙폭의 2단 용연폭포(龍淵瀑布)가 모습을 드러낸다. 물에 깎여서 형성된 세 개의 동굴이 있는 암벽 옆에서 하얀 물줄기를 쏟아내리는 1단 폭포는 내연산의 관음폭포를 연상케 한다.
산행객이 많지 않은 것과는 달리 계곡으로 내려서자 탐방객들이 제법 많아 눈에 띈다. 중년의 여성 단체탐방객은 소풍을 온 어린아이들처럼 기분이 들떠 재잘대며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용연폭포에서 계곡 하류 쪽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굵어진 빗줄기에 접었던 우산을 다시 펴고 후라메기 능선 쪽 짧은 계곡에 안겨 있는 절구폭포로 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2단 폭포로 1단 폭포 아래 움푹 파인 폭호가 흡사 그 이름처럼 절구를 닮았다.
주방천으로 되돌아와서 하류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용추협곡(龍湫峽谷)과 용추폭포가 주왕산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좁은 암벽 사이로 난 협곡 위로 놓인 나무 데크 길 옆으로 계곡물이 굽이치며 휘돌고 용추폭포 등이 우렁차게 계곡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절경에 목구멍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듯하다.
주왕산은 약 7천만 년 전에 거대한 호수 바닥에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퇴적암층을 뚫고 화산이 분화하면서 화산재와 용암이 응집하여 형성된 것으로,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이 강한 안산암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깊고 복잡한 협곡, 바위, 암봉, 폭포 등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독특한 지형으로 주왕산 일대가 2017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삼악산의 등선폭포 협곡을 옮겨 놓은 듯도 하고 작년 팔월에 찾았던 중국의 삼산오악 가운데 하나로 역시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된 저장성 원저우(温州) 옌탕산(雁荡山)의 절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청학과 백학 전설이 어린 학소대, 떡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 신라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등극하지 못한 김주원의 전설이 서린 급수대 주상절리 등 계곡 주위를 옹위하며 하늘을 가릴 듯 머리 위로 솟아 있는 비경을 둘러보며 용추협곡을 빠져나왔다.
절구폭포(좌)
용추협곡(좌,우)/용추폭포(중)
주왕암 가학루(좌)/용왕굴 가는길(우)
주왕암
무장굴(우)
주봉능선과 관음봉 아래 안겨 있는 주왕암은 대전사와 함께 건립되었다고 전하는 암자이다. 그 앞에서 진분홍빛 꽃이 만발한 겹벚꽃 한 그루가 반기는 2층 누각 가학루(駕鶴樓)로 들어섰다. 촛대봉을 배경으로 돌로 쌓은 축대 위에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는 주왕암 나한전을 올려다보며 주왕의 전설이 어린 주왕굴(周王窟)로 향했다.
양팔이 닿을 듯 좁은 암벽 사이로 난 가파른 철계단을 따라 백여 미터를 오르니 수직 절벽이 앞을 막아서는데, 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물줄기 옆에 주왕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왕이 몸을 숨겼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네댓 평 넓이의 낮은 암굴 안쪽 벽면에는 호랑이와 시동을 거느린 산신령 돌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전설은 그 옛적 당나라 때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탐한 자가 벌인 중국 중원에서 머나먼 이곳까지 쫓고 쫓기는 쟁투의 집요함과 처절함을 전하고 있다. 동서고금 작은 권력이나 사소한 이익을 놓고도 이전투구를 벌이는 세태를 생각하면 벼슬을 40여 차례나 사양했다는 여헌 선생의 이야기는 경외스럽기만 하다.
주왕이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武藏窟)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돌다리인 자하교를 건너고 주방천을 따라 1km여를 더 내려와서 산행 시작 약 5시간 만에 대전사로 회귀했다.
대전사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가에 줄지어선 식당가가 유혹하지만 청송 사과 한 봉지와 사과막걸리 두어 통만 사들고 산행 중에 간간이 간식으로 달랜 허기를 누르며 곧바로 주산지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km여를 오르자 주산지 제방과 그 왼쪽 편 가장자리 바위 위에 서있는 어른 허리 높이의 주산지비(注山池碑)가 눈에 들어온다.
주산지는 숙종 때인 1720년에 착공하여 경종 때인 1721년 완공된 제방의 길이와 높이가 각각 63미터와 15미터, 관개면적 13.7헥타르의 인공 저수지이다. 주산지비는 1720~1721년 주산지 축조에 공이 컸던 이진표(李震杓)와 임지훤(林枝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로 그들의 후손과 조세만(趙世萬) 등이 1771년에 세웠다고 한다.
"둑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한 조각 비석을 세운다."
一障貯水 流惠萬人
不忘千秋 唯一片碣
_주산지비(注山池碑) 내용 中
주왕산 여러 봉우리와 능선에 둘러싸인 고구마 모양새의 주산지 북변의 탐방로에는 궂은 날씨에도 주왕산 계곡처럼 남녀노소 많은 상춘객들이 담소를 나누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저수지 가장자리 물속에 자생하는 버들 고목들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서린 굵은 줄기에서 뻗은 가지마다 빛나는 연녹색 잎사귀로 눈부신 봄 치장을 하고 있다.
상춘객들은 수면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왕버들의 수려한 자태에 감탄하며, 그 모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갖가지 포즈로 인증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집으로 올라오는 길 H는 눈에 띈 '주왕산탁주' 도가에서 사하촌에 비해 병당 1100원이나 더 싼 가격의 사과막걸리 한 박스를 사서 차에 실었다.
좋은 시절 사월의 자연이 펼쳐 놓은 황홀한 잔치에 취한 듯 흠뻑 빠진 하루였다. 봄비도 감흥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더욱 굵어진 빗줄기를 차창에 뿌려댄다. 각기 집에 도착한 후 H는 막걸리가 "맛이 없다"라고 푸념했다. M의 말대로 며칠 숙성해서 나아진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