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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pr 29. 2024

국수봉(國守峯)과 허난설헌(許蘭雪軒)

사월의 신록 속으로


온천지가 파릇파릇 울긋불긋 색채의 향연을 펼치는 사월이다. 모란정류장 전자안내판이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모두 '좋음'이라고 알린다. 봄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알레르기 기침을 잠재우려 알약을 한 알 삼켰다. 모란발 500-1번 광역버스에 올라 경충대로를 달려 광주 도평리정류장에 내렸다.


경충대로(京忠大路)는 경기도 이천시, 여주시, 광주시, 성남시를 잇는 도로인데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경충국도’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


경기 광주시에 있는 여섯 개의 국수봉(國守峯) 가운데, 지난달 초에 찾았던 도척면 진우리의 국수봉에 이어, 쌍령동과 초월읍 지월리에 각각 자리한 두 곳을 둘러볼 요량이다. 지월리 국수봉에는 조선 중기 불세출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하차도 건너 가마모산 남단으로 진입해서, 서방산과 뒤창개산을 거쳐 쌍령리 국수봉으로 향하는 코스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도평리 입구 마을버스정류소에서 외국인 한 분이 휴대폰 구글 앱을 켜 들고 근처 아파트로 가는 버스 도착 시간을 묻는다. 목적지가 채 1km도 되지 않아 한참 남은 버스시간을 기다리느니 걸어서 가는 것이 낫다고 일러주었다. 뾰족한 첨탑을 가진 초월성당이 수면에 어른거리는 곤지암천 천변도로를 따라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통성명을 하니 그는 '압다라'라는 이름의 방글라데시 국적 38세 청년으로 7년째 포천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3일 전에 입국해서 이곳 소재 일터에서 일하게 된 서른한 살 동생을 보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동생에게 줄 쿠* 밥솥이 담긴 박스를 한 손에 든 그는 무슬림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데 한국이 어떠냐는 내 질문에 "좋다"라고 대답한다. 돌아오는 길 광주 시내 길거리와 버스 안에서도 코리안 드림을 안고 이 땅을 찾아온 외국인이 숱하게 눈에 띄었다. 소위 '헬조선'이라 일컽는 이 땅의 부조리한 세태정작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가야할 방향과 꿈을 잃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곤지암천

가마모산 남단을 반시계방향으로 휘돌아 그 동편 도평초교 앞 가파르게 경사진 길을 올라 가마모산으로 접어들었다. 산기슭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니 초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사진 기슭에 위치해 있어도 평평하고 반듯하게 자리한 운동장과 단정한 교사 건물은 말없이 교육 현장에는 결코 편향과 편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정표가 이곳 들머리에서 국수봉까지 2.22km라고 알린다. 산으로 접어들자 울창한 참나무숲의 깊은 바다에 빠져든 듯 발아래 지척의  인간세상은 아득히 멀어진 느낌이다. 등로 옆 참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경기옛길 봉화길'이라는 표지가 눈에 띈다. 불꽃이나 연기로 연락을 취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없건만 봉화대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는 땅 위에 이렇듯 이름을 붙여 길을 만들어 놓은 발상이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깎아지를 듯한 경사로 둘러쳐진 가장자리와는 달리 잡목이 없고 참나무 고목들이 숭숭하게 숲을 이룬 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쾌활하고 시원스럽다. 금세 닿은 능선 위 좌우 갈림길에서 좌측 가마모산 남단 능선마루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국수봉 쪽으로 길을 잡았다. 몇몇 눈에 맨손의 산객은 필시 산책 삼아 나온 부근 마을의 주민일 것이다.

 

까끔씩 나뭇가지에서 내려온 가는 실 줄 끝에 매달린 알에서 갓 깨어난 벌레들이 얼굴에 부딪히고 몸에 달라붙으며 성가시게 한다. 지도 앱에 나타나는 '가마모산'과 '서방산'이라는 지점은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냥 지나가는 능선이나 다름없이 편평하다. 그에 비해 뒤창개산으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른 경사를 내놓으며 좌측으로 잠시 마름산의 등줄기도 보여준다. 뒤창개산 정상 부근에 벤치 셋이 놓인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봉수터였나"하고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뒤창개산을 지나자 느슨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숲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혼효림으로 바뀌었다. 산길은 쌍령배수지, 도평초교, 쌍령초교, 부자촌빌라, 지원아치교, 쌍령 2통 마을회관 등 좌우 방향 등로를 알리는 이정표를 내놓는다.


국사봉(國守峯)은 레드카펫으로 주인공을 맞는 높은 단(壇) 인양 나무데크 계단길로 산객을 맞이한다. 벤치와 운동시설 등이 자리한 해발 294미터 정상의 서편 가장자리 이층 육각정 정자에 올랐다. 국수봉(國守峯) 아래 북단에서 곤지암천은 경안천과 합류하고 경안천 건너편에 칠사산이 자리한다.


눈아래 쌍령동 마을은 국사봉과 경안천으로 내려앉는 마름산 줄기 사이에 안겨 있고, 경안천 건너 광주시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남한산, 검단산, 맹산, 문형산, 청계산, 광교산 등이 가까이서 또는 멀리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국수봉에서의 조망


정자 옆에는 광주산악회에서 세운 국수봉 쌍령리전투 기념비가 놓여 있는데 대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산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위급할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이 일만여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쌍령리에서 청군과 맞서 용전분투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많은 군사가 전사한 곳이다.


이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柡)과 공청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 안동 영장 선세강(宣世綱) 등 여러 장수들도 전사했고, 경상도 관찰사 심연(沈演)은 패퇴하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 전적지 쌍령리에는 다섯 분의 충령을 모신 정충묘(精忠廟)가 있다."

_광주산악회 건립 <국수봉(國守峯)> 비석 中


"강화도로의 몽진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청군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이에 여러 도(道)의 감사나 병사들은 군사를 이끌고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이 근왕군(勤王軍)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1637년 1월 28일 쌍령 일대에서 3천여 청군과 맞부딪쳐 싸웠으나 4만(실제는 약 8천 명으로 추정)의 아군이 전멸하다시피 크게 패하고 말았다.


국수봉(國守峯)이라는 봉우리 이름에는 당시 경상도 등 남쪽에서 달려온 근위병들이 청군에게 포위되어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출하여 나라를 보존하고자 했던 간절한 염원과 전투에서 패한 원통함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_24.3월 진우리 국수봉 탐방기 中


광주산악회가 세운 비석의 내용과 다른 자료에서 확인한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다. 건너편 뒷동산에 자리하는 정충묘에는 전사한 장수 네 분의 위패를 모셨다고 하는데,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쌍령전투에서 순국한 무수히 많은 장졸들의 절의를 기리기 위한 곳임은  자명하다.


부쩍 늘어난 하이커 중 꼬부랑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산정 쪽으로 힘겹게 발길을 옮기는 할아버지 한 분도 눈에 띈다. 산정에서 200여 미터를 되돌아 내려와서 절뒤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국수봉과 나란히 자리한 절뒤산 정상 아래쪽을 우측으로 휘돌아 산줄기를 따라 지월리로 길게 내려앉는 꼬부랑 산길은 더없이 아늑하다.


이렇게 높이 올라왔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1.5km여 길게 이어지던 내리막길은 곤진암천 보(洑)의 물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천변 현산로로 내려선다. 지월리의 곤지암천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 중 하나인 지월아치교 앞에 서있는 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표지석 뒤 곤지암천 건너 저 멀리 무갑산과 관산이 호위무사처럼 늠름하게 솟아 있다. 표지석 아래 유비에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마을로 원래 '지곡(池谷)'이라 불리다가 연못에 비친 달의 형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지월리(池月里)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노란 애기똥풀꽃이 지천으로 핀 제방길을 지나서 곤지암천이 경안천에 합류하기 직전에 내놓는 경수교 다리를 건너니 맞은편 정면에 "허난설헌묘 1.4km"라는 도로 표지판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한다. 칠사산과 난설헌이 잠들어 있는 국사봉 산정 쪽으로 깊고 높이 파고들어 자리한 주택들이 광주시 난개발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지월 7리 동백마을 표지석 앞을 지나고 들머리를 이리저리 찾다가 국수봉 남단 경수마을에 자리한 정 공(鄭公) 묘소 옆 길을 빌어 국수봉으로 진입했다. 앞서 올랐던 쌍령리 국수봉과 좌우로 무갑산과 마름산을 굽어보는 정 공의 묘소는 가히 둘도 없는 명당으로 보인다.


낙엽이 깔린 등로는 재개발 구역의 버려진 골목으로 접어든 듯 사람의 흔적이 없고 능선을 따라 검은색 그늘막이 좌우로 쳐져 있어 을씨년스럽다. 다짜고짜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600여 미터 오르니 서울 광진 문 모씨와 서울 양천 심 모씨가 나뭇가지에 매달아 둔 리본이 국수봉 정상을 알린다. 성긴 숲 사이로 경안천과 그 건너 칠사산의 윤곽이 보일뿐 별다른 조망이 없고, 서편과 북서쪽 허난설헌 묘 방향으로 난 등로가 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좌우에서 들리는 차량들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산새들은 노래하고 바람은 잎새를 흔든다. 입이 있어도 남을 헐뜯고 상처 주기에 바쁜 자칭 '만물의 영장' 사람과 달리 새들이 주고받는 말은 사람이 듣기에 아름다워 '노래한다'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상 아래 갈림길에서 경안천과 허난설헌 묘로 갈리는 지점에서 만나는 첫 이정표가 반갑다. 난설헌 묘 쪽으로 난 길도 애벌레 실 줄이 앞을 막아서기는 마찬가지지만 야자수 매트가 깔려 있는 등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그 길 좌측에는 철망 울타리가 쳐져 있어 산행의 호젓함이 반감된다.


연신 몸에 달라붙은 애벌레를 손가락으로 튕겨 털어내고 몸을 움츠려 옻나무 가지를 피하며 나아갔다.


허난설헌묘 뒤편 좌측으로 내려서니 중부고속도로 상하행선을 내달리는 차량 소음이 귓전을 따갑게 때린다. 세 개의 단으로 층층 조성한 묘역은 기와를 인 허리 높이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담장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제일 아래쪽 묘역으로 들어서니 얕은 높이 병풍석을 두른 난설헌 묘와 그 좌우로 일찍 잃은 두 아이의 묘, 1985년 박두진, 정한모, 박용식 등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건립한 '허난설헌 시비' 등이 석물들과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난설헌은 당호(堂號)이다. 엽(曄)의 딸이자 봉(篈)의 동생이고 균(筠)의 누이로 강릉에서 출생하여 1577년 안동 김 씨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다고 한다.


한국 한시사에 있어 여류 한시 시인으로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당시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그녀의 시가 소개되어 애송되는 등 당대 세계적인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푸른 바다는 구슬빛 바다에 잠겨 들고

푸른 난새는 색색 찬란한 난새에 기대는데

스물일곱 송이의 아름다운 부용꽃

달밤 찬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_허난설헌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결혼이 파탄 나고 슬하 어린 두 남매가  사망하여 큰 슬픔에 잠겼을 때 외삼촌 집에 머물며 썼다는 위 '꿈속 광상산에서 노닐다(夢遊廣桑山)’라는 시에는 스물일곱 나이에 자신 죽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는 듯 보인다. 위 시가 가진 구조적 단어 배열, 색채와 형태의 대비, 공간적이고 회화적인 표현 등을 두고 아래와 같이 평한 어느 블로거의 글이 눈길을 끈다.


"허난설헌은 회화적이고 건축적인 상상력과 조직력을 가진 시인" _출처: 유지원의 네이버 '글문화연구소'


"붓 끝에 피어나는 청초한 그 잎새 고개 숙인 꽃술은 그윽한 향기 머금어 천 년의 향을 토해 낸다" _허난설헌의 시 <난초(蘭草)> 中


어릴 적부터 천재적 기재를 발휘하던 그녀는 오빠 허봉의 귀양과 객사, 남편과 시집 식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두 자녀를 잃는 등 불행과 연이은 비극 불운한 일생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니 '가인박명'의 운명이 안타까울 뿐이다. 시 <난초(蘭草)>의 시구절처럼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시들로 인해 '천 년의 향을 토해내며'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니 그녀에게 조금의 위로가 될까.


허난설헌의 묘는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85년 약 500m 떨어진 경안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현 위치로 이전했는데, 그때 안동김 씨 서운관정공파 종중 선영의 묘도 함께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묘역 위쪽 중간 단에는 좌우로 그녀의 남편 김성립과 재취 부인 남양 홍 씨의 합장묘, 김정립과 해주 정 씨 합장묘가 각기 자리하고, 맨 윗단 좌우에는 김홍경과 세 부인의 합장묘, 김담 부부의 합장묘, 그리고 하당공계파 시조비가 나란히 자리한다.


엄격했던 유교사회 양반 가문의 의례에 따라 묘역을 배치했겠지만, 허난설헌은 죽어서도 부부 합장묘가 아니라 홀로 아이들 곁을 지키며 영면하고 있는  모습이 의아했다. 살아생전 가혹했던 일생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홀로 할 수 있도록 김 씨 문중에서 자유와 아량을 베풀어 준 것이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고속도로에 앞이 막혀 외통수처럼 고립된 묘역에서 버스가 지나다니는 도로로 나가는 길이 만만찮아 보인다. 묘역 오른편에서 고속도로와 접한 국수봉 기슭 가장자리의 침출수 차단용 수로를 거치고 잡목 사이를 헤집으며 경안천 쪽으로 난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철제 펜스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국수봉 능선으로 되돌아 올라서서 30여 분만에 경안천과 허난설헌묘 갈림길 이정표를 다시 만나니 마음이 안도한다. 서편의 가파른 비탈길은 그 끝에 나무계단 길을 내놓으며 경안천 천변으로 인도한다.


경안천을 호쾌하게 흐르던 물이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징검다리 위에 서서 돌아보니 국수봉과 천변 사방은 온통 생기발랄한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다. 찬란한 시절은 눈 깜빡할 사이에 금세 지나가는 법이니 이처럼 좋은 시절이 곧 '화양연화'라 생각하며 촌음이나마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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