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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30. 2020

산 넘고 고개 넘어

한강기맥, 비솔고개에서 신당 고개까지

한강기맥은 오대산 두로봉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기해서 계방산, 발교산, 용문산, 청계산 등을 거쳐 양평군 양수리 두물머리까지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며 이어지는 167km 산줄기다.

드디어 장마가 끝났다. 광복절이 든 주말 경인지역엔 지리하게 물러날 줄 모르던 장맛비가 기압골을 끼고 게릴라처럼 국지성 비를 뿌리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54일간 지속된 이번 장마는 기상관측이 전국으로 확대된 1973년 이래 '최장' 기록을 남겼다. 전국 누적 강수량도 920여㎜로 역대 2위라 한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장마를 겪은 셈이다. 두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등 우리 세대는 이전 세대가 겪어 보지 못한 감격스러운 자랑거리를 비롯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옛 조선총독부 철거처럼 청산해야 할 과거사의 무거운 멍에도 짊어진 세대다.

일상에 묻혀 살다가 연례행사처럼 여름휴가를 냈다. 시골, 바다, 산행 등 휴가 중 버킷 리스트를 구상해 보았는데 친구들과 함께 하기로 계획한 지리산 종주산행도 그중 하나였다.

남부지방은 모처럼 비 소식이 없지만 여러 산악회의 지리산행 버스는 일찌감치 예약이 동이 났다. 삼신할매의 점지를 받아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는 고귀한 족속, 오랜 장마가 물러난 임시 공휴일을 낀 주말에 뼈 속 깊이 각인된 유목민 몽골로이드의 DNA가 발동했을 것이다.

사업이건 인생이건 문제에 맞닥뜨려도 대안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문제에 부닥쳐서 대안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문제다. 아쉬운 마음으로 지리산 종주 계획을 접고 그 대신에 한강기맥 '비솔고개~신당 고개' 구간을 걷기로 했다. 지난달 한강기맥이 시작되는 백두대간 두로봉에서 오대산 비로봉까지 구간을 다녀오며 친구들과 기맥 종주에 암묵적 동의를 한 터였다.

성문 모양의 용문역사

팔당대교와 신양수대교를 지나는 길 별천지가 펼쳐진다. 잔잔한 수면 위로 낮게 안개가 깔린 팔당호에 건너편 산이 갓 잠에서 깨어난 얼굴을 씻으며 그리메를 드리웠다. 산과 강, 안개와 구름, 그리고 아침 햇살이 서로 어우러져 형형색색 꿈틀대며 아침을 여는 모습이 몽환적이다. 자동차들이 쌩쌩 내닫는 경강로 노변에 차를 세우고 그 장관에 한참 빠졌다가 빠져나왔다.

용문역 건너편 건널목 가장자리 도로변 좌판에 할머니 두 분이 영지 표고 등 버섯을 진열하고 계시다. 성문처럼 생긴 특이한 모습의 3~4층 높이 역사(驛舍)는 낮고 소담한 주위의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역사 양쪽의 에스컬레이트나 계단을 통해 올라야 하는 대합실로 날아든 제비 한 마리가 이리저리 출구를 찾는 날갯짓이 황망스럽다.

사람들의 왕래와 소통의 공간인 역사가 차단과 방어의 역할을 주로 하는 성곽의 모습을 띠고 있어 의아하다. 더구나 높은 층고의 대합실을 통해 열차를 타고 내려야 하는 불편도 만만찮아 보인다. 대개 높고 웅장한 것은 겉치레요 낮고 소담한 것이 실용적이고 편안함을 주기 마련이다.

약속 시간에 도착한 친구들을 만나 10여 km 거리의 단월면 소재지로 이동했다. 용문에서 비솔고개를 지나는 버스가 드물고 단월은 들머리와 날머리 중간쯤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택시로 단월에서 10여 km 떨어진 비솔고개로 이동했다.

이번 산행의 들머리 비솔(非率) 고개는 양평군 단월면의 향소리(杏蘇里)와 산음리를 잇는 고개로 좌우로 소리산과 단월산이 자리한다. 이곳을 출발해서 소리산과 송이재봉을 거쳐 밭배, 통골, 새나무 등 여러 고개를 지나 신당 고개로 내려설 예정이다.


고개를 넘는 아스팔트 도로변에 서있는 산행 안내도를 살펴본 후 앞장서 계단으로 올라서는 두 친구의 모습이 늠름하다. 두 친구의 산행과 걷기 이력은 나보다 한참이나 오래되고 화려하다. 서울 둘레길, 평화누리길, 경기 영남길 등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해남 땅끝 마을까지 천 여 리가 넘는 삼남길 코스도 종주했으니 말이다.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햇볕을 가린 흐린 하늘과 숲, 매미와 풀벌레들의 맹렬한 울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 능선은 실바람이 살랑대어 산객의 발길을 가볍게 한다. 어느 산객은 한강기맥 전 구간 가운데 가장 편했던 구간이라고도 했다.

고개에서 올라선 고도 400m 능선은 짧고 뒤이어 오른 고도 500m 능선은 제법 길다. 해발 658m 소리산 정상을 비교적 수월하다 싶게 올라섰다.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물 맑은 석산계곡이 어울려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는 같은 이름의 소리산(小理山, 479m)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십여 리쯤에 자리한다.

소리산 정상에서 내리닫는 가파른 비탈이 완만하게 내려앉는 능선을 향해 허리춤에 자루를 매단 버섯 채취꾼 두 분이 널찍이 거리를 두고 올라온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자루에 새벽어둠을 헤치며 산을 올랐을 산꾼의 땀의 대가가 담겨 있을 것이다.
'여~어!'
능선 아래 숲 속에서는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간간이 높고 경쾌한 톤의 환호성이 눅눅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온다.

연달아 능선과 작은 봉우리들을 지나며 숲은 참나무 소나무 칡넝쿨 풀숲 등 다양한 모습 보여준다. 송이재봉으로 향하며 버섯이라도 있을까 하고 능선 좌우로 눈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어설픈 산객의 눈에 쉽게 뜨일 리가 없다. 산길 옆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때깔 좋은 식용불가 잡버섯들뿐이다.

가파른 비탈을 올라 해발 670m 송이재봉 정상에 올라섰다. 아담한 크기의 긴 타원형 표지석이 말쑥한 모습으로 산객을 맞아준다. 송이재봉이 내리지르는 비탈을 내려서서 임도를 건너 또 다른 봉우리로 향하는 능선을 올라간다. 임도를 따라 우회하려던 M이 길을 찾지 못하고 한참만에 되돌아서 뒤쫓아온다.

모터사이클 바퀴에 깊이 패인 능선길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는 사면 능선 한가운데를 따라 모터사이클 바퀴 자국이 깊게 파여 있다. 깊게 이랑이 패이고 나무들의 잔뿌리가 허옇게 드러나 비가 내리면 흙이 휩쓸려 내려갈 위험도 있어 보인다. 이런 바퀴 자국이 신당 고개 부근까지 한강기맥 능선을 마구 할퀴어놓았다. 우리 땅 수려한 산의 정기를 받은 인재의 맥을 끊으려 혈맥마다 쇠말뚝을 박았다는 옛 오랑캐들의 소행이 오버랩되며 분노가 치민다.

국립공원, 도립공원, 군립공원, 지질공원 등의 지정 보전 관리를 위해 1980년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자연공원법」의 테두리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좁아 보인다. 산을 찾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이때 산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과 산객들을 불편케 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엔진의 무자비한 굉음과 날카로운 바퀴에 제동을 걸어줄 새로운 법규가 마련되어야 하지 싶다.

단월명성터널과 임도가 각각 아래위로 지나는 고도 335m 밭배고개 한편에 MTB 자전거도로 안내판이 지키고 서있다. 산행 안내도는 오래되고 색이 바래어 흐릿하다. 아직 예정된 구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다.

풀숲이 우거져 바람이 멈춘 곳은 찜질방처럼 공기가 후끈하고 바람이 있는 능선이나 고갯마루는 견딜만하다. 별다른 조망의 감동도 없이 밋밋한 봉우리 고개 능선 임도를 따라 걷는 무미건조한 길은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자기 자신과의 따분하고 지루한 싸움이다.

통골 고개 위로도 임도가 지난다. 들머리부터 계속해서 따라오는 송전선을 머리에 인 높은 송전탑 아래 공터에 앉아 참을 꺼내 허기를 달랬다. 능선 아래 임도를 따라간다. 굉음을 내며 모토 사이클 서너 대가 임도의 바닥을 긁으며 가솔린 타는 역겨운 냄새를 내뱉고 지나간다.

비솔고개~신당고개 구간 능선 위로 지나는 송전선

이 구간의 기맥은 곳곳 임도에 잘리고 모토사이클에 패이고 송전탑에 점령당해서 깊은 상처 투성이고 어떤 구간은 풀숲에 덮여 희미하다.

목적지를 지척에 두고 동행들은 하나같이 갈증이 극에 달했다. 각자 2병씩 가져온 생수도 거의 동이 나자 남은 생수를 나누어 담는 물 고르기를 하며 갈증을 달랬다.

기맥은 날머리인 신당 고개를 발아래 두고 처음으로 지나온 능선 쪽으로 트인 조망을 선사한다. 그루터기 벤치에 걸터앉아 숨 고르기를 하고 나서 가파른 비탈을 미끄러지듯 하강하여 신당고개로 내려섰다. 세 성인을 모신 신당이 있던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이는 고개를 넘는 편도 3차선 44번 국도 위로 차량이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내닫는다.

용문역 부근 식당에서 막국수를 한 그릇씩 비웠다. 여름은 우리 곁에 머물고 있고 가을은 아직 멀찍하다. 겪어보지 않은 지루하고 길었던 장마도 끝났으니 남은 날들은 알곡이 튼실히 영글어 갈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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