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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12. 2024

지리산에 안겨 별을 품다(III)

지리산 2박 3일 종주산행

천왕봉 일출

산행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잠이 깨어 시각을 보니 여느 날보다 이른 자정이 조금 지났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복도로 에어매트를 들고 나와 미리 접어 두었다. 후끈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대피소 실내와 달리 바깥은 한기가 느껴질 만큼 서늘하다.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스마 폰으로 담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눈을 크게 열고 마음에 담아 본다.


일출 시각은 05:40 경이지만 새벽 세 시 반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해서 1.7km 거리 천왕봉으로 향한다. 랜턴으로 등로를 밝히며 제석봉으로 오르는 걸음이 가파른 비탈에 익숙해졌는지 덤덤히 받아들인다.


몇몇 산객들도 눈 띄는데 배낭을 짊어진 산객이 있는가 하면 스틱만 짚고 오르는 산객도 있다. 많은 산객은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나 대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험로를 피해 장터목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쉬운 등로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왕봉 오르는 길


장터목에서 출발한 지 20여 분쯤 거리에 '제석봉 고사목' 제하의 안내판과 그 뒤로 고사목 몇 그루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인다. 1950년대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숲이 울창했는데, 도벌꾼들이 도의 흔적을 없애려 불을 질러 지금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가 장관이라고 하지만, 어둠으로 인해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초래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뒤로 걷는 동행의 랜턴 불빛이 발밑으로 향할 때마다 하늘에서는 점점 밝게 빛나는 별무리가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과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외로이 서있는 한 그루 고사목은 가지마다 초롱초롱한 별을 가득 달고 서있다. 바윗돌 덮개가 덮인 암벽 사이로 철계단이 놓인 통천문을 통과하면 천왕봉 정상이 지척이다.


여명이 채 밝아오기 전 어렴풋이 사방이 분간될 즈음 천왕봉에 올라섰다. 일출까지는 한 시간 여가 남았다. 정상 바로 밑 옛 성모상(聖母像)을 모신 신당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널찍한 평지에 올라 나란히 서있는 '천왕봉 성모상', '천왕봉의 의미', '지리산 천왕봉' 제하의 안내문을 랜턴 불빛에 비추어 읽어 보았다.


지리산 성모는 천왕(天王), 천왕할매, 마고(麻姑)할매, 마야부인(摩耶夫人) 등으로도 불리는 지리산 수호여신이다. 1970년대 초까지 천왕봉에 있다가 없어진 것을 1978년 혜범(慧凡) 스님이 다시 찾아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벌써 올라와 있는 산객은 족히 30~40명은 되어 보이고 삼삼오오 끊이지 않고 속속 정상으로 모여든다. 등 뒤편 올라온 등로 쪽에서 불어오는 이른 새벽바람이 매섭고 차다. 일출 시각까지는 한참이 남았지만 차츰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 오자 정상 표지석 주변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산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표지석 앞면에 '智異山 天王峰 1915 M' 뒷면에 '韓國人의 氣想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글귀가 각각 쓰여 있다. 뒷면 '韓國' 글귀가 흐릿한데 그 연유를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1982년에 새로 세운 이 표지석 뒷면의 당초 글귀는 '嶺南人의 氣想 여기서 發源되다'이었다. 뒷면의 글귀 중 '嶺'자가 '慶'자로 바뀌었다가 '慶南'이란 글자가 누군가에 의해 망실이 되었다. 그 후 1980년대 중반 산악인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慶南'이란 글자 자리에 '韓國'이는 글자를 다시 새겼다."

_출처: 100san.tistory.com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변천사'


일출이 시작되기 전 잔잔한 수면처럼 평평한 구름의 바다 위로 노을이 긋고 있던 일직선 붉은 선은 점점 더 두터워지며 푸르스름하게 밝아 온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산 아래 안긴 마을의 불빛이 골짜기를 따라 길게 이어졌고, 오른편 능선 가운데 갇힌 구름은 하얀 눈으로 덮인 얼어붙은 호수를 연상케 한다.


2024년 8월 8일 05시 43분, 여기저기서 산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며 천왕봉의 일출이 시작되었다. 해변이나 다른 산의 산정에서 맞이하던 일출에 비해 태양의 크기는 더 작고 옹골차고 밝기는 수십 배는 더 밝고 강렬해 보인다. 이박 삼일 종주산행의 정점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지리산 제1경을 이렇게 목도하게 되니 감흥이 남다르다. 천왕봉에서의 해맞이가 누구나 경험할 수 없고 오죽 힘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맞이할 수 있다고 했을까!

천왕봉에서의 해맞이


선인들이 사랑한 지리산

두륜산, 방장산 등으로도 불리는 지리산은 한반도 남부 민족의 영산이라 여겨져 많은 이들이 찾아왔고 고려 때 이인로, 조선 때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조식, 유몽인, 조위한 등은 지리산에 관한 시문도 남겼다.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1472년 음력 8월에 조위, 유호인 등과 함께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천왕봉에 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새벽녘에 해가 동녘에서 솟아오르려 하자 노을이 영롱하게 빛났다. 일행 모두 내가 매우 지쳐서 재차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나는 '여러 날 동안 날씨가 계속 흐리다가 갑자기 맑게 개니 하늘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많구나. 지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데 힘써 다시 올라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끝내 말끔히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서 석문을 통과하여 위로 올라갔다. 성모묘에 들어가 다시 술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확 트인 것은 진실로 신명의 은택입니다. 참으로 매우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아무리 높이 나는 기러기나 고니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 날 수는 없을 것이다."

_심경호의 ≪산문기행≫ '김종직의『유두류록(遊頭流錄)』中  


일출이 끝나고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이리저리 오가며 산정이 선사하는 장관을 만끽하며 욕심껏 사진도 남겼다. 하산을 채근하며 B와 함께 앞서 길을 잡는 M는 달리 향도를 맡아 산행을 이끌던 H는 사진에 집착하며 한참 더 나를 붙잡아 둔다. 평소처럼 날씨, 코스, 교통편 등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산행대장 M은 대원로의 긴 하산 길과 원지에서의 서울행 차편 등을 감안하여 길을 채근했을 터이다.

치밭목대피소/무제치기폭포

천왕봉에서 6시경 출발했다. 중봉, 써리봉, 치밭목대피소 등을 거쳐 유평리로 이어지는 약 12km의 하산길 등로가 기다리고 있다. 당초 나는 천왕봉에서 5.4km 거리로 짧은 코스인 중산리로 내려가는 소위 '성중종주'를 생각했으나, 하나같이 급경사를 걱정하며 보다 느슨한 경사의 '성대종주'를 원한 동행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주 능선의 여러 봉우리들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고 길고 지루하기 때문인지 대원 코스에서 눈에 띈 산객은 같은 방향의 부자(父子) 산객 한 팀과 무제치기 폭포 부근에서 올라오 산객 두 분이 전부였다.


가파른 비탈을 치고 오르자 해발 1,874m로 지리산 제2 고봉인 중봉은 정상 턱밑에서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터를 내어준다. 중봉을 지나자 강렬한 태양이 따갑게 내려쬐고 이제나저제나 하는 써리봉은 나타날 줄을 모른다.


종주산행의 말미는 늘 악전고투다. B는 지난 유월에 다녀온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 산행 때 양폭대피소에서 천불동계곡을 거쳐 신흥사로 이어지는 하산길 천신만고 끝에 내려온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는가 보다. 설악산을 오르다 보면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기고, 이처럼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여리던 심지(心志)도 더욱 단단하고 굳세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구름이 타고 오르는 천왕봉의 장관을 다시 한번 더 보여주는 써리봉을 지나고 치밭목대피소를 향해 매진한다. 치밭목대피소를 목전에 둔 등로 옆 듬성듬성 자리한 바위 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이정표가 해발 1,623m라고 알린다. 천왕봉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0분이나 지났는데  고도는 고작 300m가량 낮아진 것이다.


치밭목대피소에서 유평마을로

아홉 시경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해서 그 아래쪽 100여 미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샘터에서 간단히 건식 식사를 고 유평리 쪽으로 출발했다. 대피소의 하산길 등로 옆에 서있는 이정표가 대원사까지 7.7km, 대원사주차장까지 9.8km라고 알린다.


이정표를 보고 등로에서 84m 떨어져 있다는 무제치기 폭포로 달려간 H는 뒤처져 따라오던 M과 B와 거의 동시에 폭포 쪽에서 되돌아왔다. H가 찍은 3단 너른 폭을 타고 내라는 폭포 동영상은 호쾌하고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마음을 다잡고 계곡 옆으로 난 너덜길을 오르내리며 걷는 길, 땀은 비 오듯 쏟아지며 눈으로 흘러들어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이 가질 않을 지경이다. 계곡은 등로 아래 멀찍이서 물소리만 요란할 뿐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비탈길 암벽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에 쪽세수로 땀을 씻어 본다.


앞서 간 H가 유평리 마을에 도착하기 약 1km 전쯤 등로 옆 계곡에 몸을 담그고 우리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주저 없이 계곡으로 내려가서 발과 몸을 담그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유평마을이 가까워지자 매미 떼창이 계곡 물소리와 함께 요란하다. 천왕봉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 끝 유평마을 후면으로 내려서며 길고도 길었던 2박 3일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무리한다.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한 민박 집 입구에 걸려 있는 '무릉도원'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여 학문을 몰두했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을 사랑해서 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 하며 17번이나 올랐다고 한다. 남명은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이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무너져 내리듯 쉽다."라고 했다.


실로 산을 오르는 일은 선(善)을 행하는 일처럼 어렵고도 힘들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메고 시시각각 짓눌러 오는 고통을 견뎌내며 지리산 주 능선의 수많은 비탈을 오르내리는 산행은 오죽하랴. 지리산 산행을 하듯 세상을 대하면 세상의 어떠한 나쁜 유혹이나 고난도 감당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인들이 즐겨 산을 찾은 이유를 갈파한 어느 작가의 글이 마음에 닿는다.


"오늘날에는 지리산 종주 및 등반 코스가 선인들의 유람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길들에서 선인들이 산에 올라 정신세계를 확충하였던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기에 외줄기 길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산수를 그린 그림에 외줄기 길이나 외나무다리가 종종 나오는 것은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_심경호 ≪산문기행≫ 중


유평마을로 내려섰다. 앞장서서 걷던 H가 히치하이킹을 해서 대원사길을 따라 유평마을에서 대원사로 향하는 트럭을 불러 세웠다. 인심 좋은 기사분을 만난 덕에 우리 일행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대원사 버스정류장까지 약 4km를 도보로 이동하는 고역을 피할 수 있었다. 때마침 B는 완전히 떨어져 너덜대는 등산화 한쪽 밑창을 뜯어 버리며 트럭을 얻어 타게 된 것이 천운이라며 안도한다.


대원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지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고, 짐칸에 배낭을 넣고 버스에 르니 모든 근심이 날아간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M은 예매해 두었던 15:50 원지 발 서울남부터미널 행 버스표를 14:40 출발 편으로 바꾸었다.


원지(院旨)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고 정류장 건너편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으로 허허로워하는 속을 달랬다. 국밥에 '지리산 성 생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니 달아올라 식을 줄 모르던 몸의 열기가 일거에 날아가 버린 듯하다.


새로운 로망을 꿈꾸며

지리산 종주산행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때때로 환희와 안도의 순간도 있지만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치는 순간 대부분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기 일쑤다.


그렇지만 한 번 지리산 종주산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로망을 이룬 것은 아닐 것이다.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이라는 말뜻처럼 로망(roman)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꿈꾸고 체험하고 싶어 하는 미래희망형이기 때문이다.

가물거리던 청년시절 지리산 종주산행의 기억을 아쉬워하며 30여 년 만에 다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결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산행을 함께한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또 다른 로망을 함께 하길 고대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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