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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24! 송년 산행

석모도 해명산

by 꿈꾸는 시시포스


무상한 시간의 한 물결이 다사다난했던 세상사의 앙금을 사람들 가슴속에 묻어둔 채 또 다른 물결에 밀려서 미지의 대해로 흘러가 버렸다. 섣달그믐을 하루 남겨 두고 송년 산행이자 친구의 정년 퇴임 기념으로 석모도 해명산 산행을 하기로 한 날이다.


석모도는 이십 칠팔 년 전에 직장 동료들과 야유회 때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이후 이번이 두 번째이다. 강화도에는 몇 번 다녀간 적이 있는데, 코로나19 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년 이른 봄에 강화도 마니산 산행을 한 것이 가장 최근의 일이다.


월요일의 이른 아침, 수서분당고속화도로 올림픽대로 김포한강로를 거쳐 강화도로 가는 도로는 출근 차량 등 생업 전선을 오가는 차량으로 군데군데 멈췄다가 뚫리기를 반복했다. 김포의 통진읍과 월곶면을 지나고, 부지불식간에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 본섬으로 들어서서, 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외포리에 닿았다.


외포리버스정류장 공터 한편에 차를 세우고, 부근에 있는 '안흥찐빵' 간판이 걸린 분식집에 들렀다. 산행 중에 허기를 달랠 찐빵 몇 개를 사면서 동료들을 기다릴 요량이다. 정류장에는 어디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지, 부부로 보이는 배낭을 멘 남녀 한 쌍만 보일 뿐 적막하여, 싸늘한 겨울 날씨에 더하여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식당을 비우고 반려견과 산책하러 나갔던 주인장은 내 전화를 받고 식당으로 달려와서 주문한 찐빵 두 팩을 솥에 넣고 쪄냈다. 열 살이라는 그녀의 반려견은 라도라브리트리브 종으로 특유의 친근감과 온순함이 엿보였고, 나이 탓인지 느린 동작과 깊고 흐린 눈빛에서는 측은함이 묻어났다.


2017년 6월 '삼산연륙교'라고도 불리는 석모대교(席毛大橋)가 개통되고 이곳 외포항과 석모도의 석포항을 오가는 여객이 줄면서, 연안여객선 부두로서의 외포항의 역할도 위축되었다. 외포항에서는 석모도를 오가는 여객선과 더불어 외포항 ~ 볼음도 ~ 아차도 ~ 주문도 간 운항하는 여객선이 1일 2회 운항되고 있다고 한다.


목동에서 출발해서 고양에서 출발한 H와 B를 픽업하여 버스정류장 한편으로 들어선 M의 차량을 앞세워 석모대교를 건넜다. 섬의 위쪽과 아래쪽 곳곳에는 갯벌을 매립하여 생긴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석모도 북동쪽의

송가도(松家島)는 조선 숙종 때에 간척사업으로 섬 남쪽의 매음도(煤音島), 어유정도(魚遊井島)와 함께 석모도의 일부가 되었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원래 많은 섬으로 흩어져 있었는데, 고려 때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다. 700여 년 전부터 간척사업으로 영토를 넓히고 일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처음 여행했을 때, 바다를 메워 거미줄처럼 겹겹이 운하를 만들어 건설한 도시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고려 고종 때 강화도 제포와 외포를 막아 좌 둔전, 이포와 초포를 막아 우둔전을 각각 만들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우리의 간척의 역사도 꽤 오래된 셈이다."

_2020.3월, <마니산 산행기> 中



추수가 끝난 너른 간척지는 허허로워 보였다. 시베리아 등지에서 월동을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기러기 떼가 간척지 논의 떨어진 곡식을 이삭줍기하듯 무리 지어 앉아 있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띈다. 석모도 순환도로의 북변을 휘돌아 서북쪽 한가라지 고개 주차장에 내 차를 세우고, M의 차량으로 옮겨 타고 산행 들머리인 섬 동남쪽의 전득이 고개로 향했다.


전득이 고갯마루 바로 아래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 코스는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해명산과 상봉산 줄기의 남쪽 끝 전득이 고개에서 해명산 정상, 방개 고개, 새가리 고개, 절 고개, 상봉산 정상을 차례로 거쳐 북쪽 끝 한가라지 고개로 내려서는 일직선의 대략 10km의 거리이다.


고개 위에 걸린 출렁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뻗은 느린 경사의 능선을 타고 오르자, 좌우로 너른 갯벌을 드러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십여 분 만에 시야가 탁 트인 능선 마루에 올라섰다. 우측으로 마니산 혈구산 고려산 등 강화 본섬의 여러 산과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 남서쪽의 불음도 아차도 장봉도 등 여러 섬을 가늠하며 조망했다.



해명산 정상으로 뻗은 능선을 지나자니 서쪽에서 불어와서 목덜미를 스쳐 가는 해풍이 서늘하면서도 상쾌하다. 좌측으로 이 섬의 유일한 해수욕장인 민머루 해수욕장이 보인다. 썰물 때면 수십만 평의 갯벌이 나타나 갯벌 체험장으로 이용된다는 이 해수욕장은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black-faced spoonbill)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순백색 깃털에 검은색 다리와 주걱처럼 생긴 부리의 귀여운 저어새는 지금쯤 먼 남쪽 지방에서 겨울을 나고 있을 것이다.


연륙교에 이어 2019년 봄에는 해수욕장 지척에 있던 옛 삼량염전 부지에 스파 리조트가 딸린 골프장이 개설되는 등 한적했던 서해의 작은 섬은 날로 도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휴양지로 변모하고 있다.


능선길 등로는 수월하여 등산 초보자라도 어려움 없이 걷기에 딱 좋다. 햇볕이 들지 않은 음지의 바위에는 언제인지 내린 것인지 잔설이 보이기도 한다. 우측 멀리 섬과 섬을 잇는 반듯한 석모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전득이고개에서 해발 327m 해명산 정상까지는 1.8km로 금세 닿았다. 능선 한가운데 서 있는 이정표저럼 생긴 허리 높이 사각 나무 기둥이 해명산 정상임을 알린다.


해명산 정상에서 각각 1.9km와 2.5km 지점에 있는 방개고개와 새가리고개를 향해 산행을 이어갔다. 평탄한 능선은 산행이라기보다 가볍게 산보하는 느낌이다. 능선길 곳곳에 기기묘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눈길을 잡곤 한다. 우리는 즉석에서 '햄버거 바위', '외계인 바위' 등 그 모습에 걸맞는 이름을 붙여보기도 한다.



능선에서 서쪽 바다 쪽으로 돌출한 너럭바위 위에 둘러앉아 배낭에 챙겨온 음식을 나누어 들며 바다를 조망했다. 썰물로 멀리 물러난 해면 위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과 부드러운 나신(裸身)을 드러낸 갯벌의 위에 드러난 오묘한 추상화 같은 형상이 신비롭다. 그 형상은 키 큰 전나무 같기도 하고, 우주탐사선이 보내온 어느 행성 표면의 영상을 보는 듯도 하다.


방개고개와 새가리고개를 지나면, 좌측으로 거대한 암벽을 길게 늘어뜨린 낙가산을 지난다. 밋밋한 능선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낙가산 정상은 A4 코팅 용지에 '낙가산(236m)'라고 적힌 안내문이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다. 낙가산 능선 좌측의 눈썹바위 암벽에는 1928년 보문사와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가 함께 새겼다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의 보문사 마애 관음좌상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5년에 회정(懷正)이 창건한 보문사는 양양의 낙산사, 남해의 보리암과 더불어 국내 3대 해상 관음 성지로 꼽히는 사찰이다. 석모도 낙가산(洛伽山)은 관음성지로 이름난 중국 절강성 앞바다의 보타산과 낙가산처럼, 관세음보살이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인도의 보타 낙가산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보문사 아래 너른 주차장에 주차된 많은 차량은 '석모도 주민은 보문사가 먹여 살린다'던 외포항 찐빵집 주인장의 조금은 부풀려진 말이 허언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찰은 낙가산에서 눈썹바위 아래로 내려가는 등로를 폐쇄하고,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서 폐지한 사찰 입장료를 아직도 징수하고 있다고 한다.



보문사 앞바다 쪽으로 강화군이 운영하는 '석모도 미네랄 온천'이 자리한다. 땅속 460m 화강암에서 솟아나는 고온의 온천수는 칼슘, 칼륨, 마그네슘, 스트론튬 등 미네랄 성분을 다량 함유해 아토피나 건선 같은 피부 질환, 관절염, 근육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인천 강화군에서 운영하는 ‘석모도 미네랄 스파’ 온천이 수년간 무허가 상태로 운영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허가일로부터 5년인 온천 이용 기한이 지난 2021년 12월 29일 이후, 무허가 상태로 운영을 해오다가 문제가 되었던 이 온천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절고개를 지나고 어느새 해발 316m 상봉산 정상에 닿자, 서쪽 바다에서 더욱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좁은 능선 한편에 서 있는 목책처럼 생긴 나무 기둥 정상 표지석에 동행과 함께 몸을 맞대고 서서 인증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시나브로 한가라지 고개가 1km 남짓 거리로 다가오며 산행이 종점으로 치달았다.


"해명산 능선을 따라서 산행을 하면, 주변 섬들이 오밀조밀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바다 위를 걷는 듯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능선 곳곳의 기암괴석을 보고,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곳으로 권하고 싶은 곳입니다."


산행을 마치며, 산행 들머리에 서 있던 안내판이 해명산 산행의 묘미를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명씩 차량에 나누어 타고 반 시계 방향으로 석모도를 남쪽으로 휘돌아서, 강화도로 넘어와서 남단 동막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점심과 저녁 중간쯤의 어중간한 시간이지만, 분오항에 주차하고, 예닐곱 개 식당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자리한 분오어판장의 '서해호' 식당에 자리를 잡고 우럭 지리탕을 시켰다.


넓은 간척지를 가진 강화와 석모도 주민들은 대부분 쌀 보리, 콩, 감자 등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고 한다. 근해에서 병어, 새우류 숭어 꽃게 등이 잡히고 굴 양식도 활발하다고 한다. 쌀, 순무, 밴댕이 젓갈, 새우젓, 천일염 등 이름난 특산물도 즐비하니 풍요로운 고장이라 할만하다.


구수한 우럭 지리탕과 더불어, 식탁에 내놓은 김치와 깍두기 모양의 순무 김치는 젓갈 특유의 감칠맛에 더하여 상큼하고 개운한 맛이 특별났다. 식당을 나서서 분오리 돈대에 올라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감상했다. 돈대 아래 산책로 해변에는 누군가가 놓은 돌탑들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간다.


탑돌 하나하나에 담긴 저마다의 소망은 다 이루어졌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소설가 한강의 말로써 조금의 위안을 삼는다. '삶이 있는 한 언제나 희망은 있다'는 옛 시골집 방에 걸려 있던 액자 속 글귀도, 누구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삶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차를 몰아 귀로에 오르며, 세모를 하루 앞두고 특별한 추억 하나를 시각 청각 미각 등 오관에 더하여 마음에 각인하는 날이었다.

아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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