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창고를 들추다
고대 해양 실크로드 상에 위치한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는 '동양의 진주(Pearl of the Orient)'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영국 식민지이던 때에 생산되기 시작한 홍차, 즉 실론 티(Ceylon tea)의 산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의 동남쪽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인해, '인도의 눈물(Teardrop of India)'이라는 별칭처럼 고대로부터 남인도의 계속된 침략을 받았다. 풍부한 보석과 차(茶) 산지이자, 향신료 무역로와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한 탓에 1505년부터 1948년까지 440여 년간 차례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 후, 1948년 영국연방의 '실론(Ceylon) 자치령'이 되었다가 1972년에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스리랑카'로 완전히 독립했다.
열두 해 전, 회의 참석차 스리랑카 네곰보를 방문했었다. 그때의 기억의 잔상들이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선명히 남아 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홍콩 첵랍콕 공항에서 환승한 후, 방콕 스완나폼 공항에 착륙해서 한 시간가량 머문 후 이륙해서, 스리랑카 콜롬보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에 도착했었다. 귀로에는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을 경유했었다.
공항은 스리랑카의 최대 도시이자 상업 수도인 콜롬보에서 약 38km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출장지인 네곰보의 호텔까지는 택시로 20여 분 거리로, 열악한 도로 사정을 고려하면 지척이다.
스리랑카의 서부 인도양에 접한 네곰보(Negombo; 싱할라어: මීගමුව, 타밀어: நீர்கொழும்பு)는 긴 모래 해변과 니곰보 석호로 유명하다. 이 지역 주민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싱할라어와 타밀어는 외국인에게는 난해해 보이기만 했다.
객실마다 야외 풀장이 딸린 '제트윙 파빌리온' 호텔은 각각 1채씩 별도의 저택처럼 열두 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었다. 하루만 묵고 다음날 오전에 회의가 열리는 '제트윙 라군(Jetwing Lagoon)' 호텔로 이동했다. 이 호텔은 스리랑카의 주요 도시에 호텔 체인과 여행사를 거느린 Jetwing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이다. 방갈로처럼 줄지어선 단층 건물의 널찍한 호텔 방 침대에는 대형 모기장이 쳐져 있고, 가끔씩 작은 도마뱀이 벽면을 타고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저녁 무렵 해변으로 가보았다. 네곰보는 휴양도시로 주로 유럽 등 서양인들이 휴가차 많이 찾는 곳이라지만, 몬순(季節風, monsoon) 기후로 인해 파도가 거칠어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요일 오후, 캔디안 댄서(Kandyan Dance) 두 명이 요란하게 북을 두드리며 VIP를 회의장으로 인도하는 생경하고 독특한 장면으로 개회식을 알렸다. 펑퍼짐한 흰색 바지에 금속과 은구슬, 귀고리와 팔찌, 발찌 등으로 치장하고 양손으로 북을 치는 건장한 남성 댄서의 모습이 생경하고 인상적이었다.
캔디안 댄스는 스리랑카의 캔디 지역에서 공연되던 남성들에게만 허용되던 다양한 전통 춤으로, 강한 힘을 바탕으로 도약, 회전, 활기찬 발놀림, 공중곡예 등을 특징으로 한다고 한다.
개회식에서 여러 대표의 인사말에 앞서 이어진 스리랑카 국가가 울리고, 국기에 대한 예를 갖추는 절차 또한 여느 국제회의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낯선 경험이다.
그날 래카다이브 해(Laccadive Sea)에 접한 호텔 야외 저녁 웰컴 디너에서는 압살라 댄스를 연상시키는 여성 댄서들의 신비로운 춤도 감상할 수 있었다. 나흘간의 일정 중의 짤막한 현장 탐방(fild trip)과 공식일정 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콜롬보 외곽에 위치한 야생동물 연구소, 니곰보에서 제일 큰 불교사원인 앙구루카라물라 사원(Angurukaramulla Temple), 니곰보 석호(Negombo Lagoon) 등을 둘러보았다.
네곰보 석호 북쪽 시 중심부에 앙구루카라물라 사원이 자리한다. 오월 보름 축제기간 중이라 그런지, 이른 저녁 시간에 도착한 사원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크게 입을 벌린 용의 모습을 한 아치형 게이트 뒤에 6미터 높이 부처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전면에 연못처럼 생긴 수조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원 벽면을 장식한 출가와 고행 등 부처의 일생을 형상화한 원색의 부조상들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이 있다.
그 전날 저녁에 해변 식당에서 로컬 병맥주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붉은 기와지붕의 작은 교회가 눈에 띄어 궁금증이 발길을 그쪽으로 끌었다. 교회 정면 벽에 걸린 예수 십자가 상의 온몸에 선명한 선혈에 마음이 움찔했다. 그곳에서 만난 현지인 챤디말의 제의로 잠시 그의 집에 들렀다.
움막 같은 초라한 집에 사는 그는 니곰보 호수에서 어로를 하는 어부로 그의 부부, 딸 내외, 미혼인 아들이 함께 기거한다고 한다. 네곰보는 과거 서양의 식민지였던지라 가톨릭과 기독교 교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지만, 그 밖에도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이 혼재한다고 한다. 저들이 저마다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고된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면 좋겠다.
유월은 인도양 계절풍이 부는 시기라 그런지, 한낮 한때 스콜처럼 많은 비가 뿌렸다가 그쳤다. 콜롬보와 니곰보는 스리랑카 내 습윤지역에 해당하여 연간 평균 강수량이 2,500mm 내외로 비교적 많다고 한다. 폐회식은 SL 정부 요인의 요란스러운 입장과 인사말, 참석자들의 소감 등에 이어 SL 국가 연주로 끝을 맺었다.
그다음 날 오후 귀국 항공편 탑승을 앞두고, 짧게 니곰보 석호 생태 탐방을 했다. 탐방은 작은 동력 나룻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 광활한 니곰보 호수의 남쪽으로 진입하면서 시작된다. 네곰보 석호의 맹그로브 숲에는 190종 이상의 야생동물과 많은 조류가 서식한다고 한다. 호수 위 여러 섬 사이를 지나며, 열대우림 지역 특유의 수목이 우거진 숲과 섬 가장자리 등에 서식하는 파충류, 조류, 식물 등을 두 시간가량 둘러보았다.
석호 주변 마을에는 물가를 따라 어부들이 판잣집을 짓고,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전날 교회에서 만났던 온화한 성품의 챤디말과 그의 화목해 보이던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반다라나이케 공항의 면세점에서 실론 티(Ceylon tea) 두어 통을 샀다. 망태기 끈을 머리에 두른 채 찻잎을 따는 스리랑카 여인의 모습이 담긴 광고가 한동안 눈길을 붙잡았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땅을 뒤로하면서, 저들의 고달픈 현실이 나아져서 진주처럼 빛나길 기원해 본다.